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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가 탄생시킨 심술쟁이 오리 '도널드 덕'이 지난 9일 70세 생일상을 받았다. BBC 뉴스 인터넷판은 이날을 맞아 전세계 디즈니 공원에서 도널드의 생일을 축하하는 각종 행사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파리 디즈니랜드에서는 이날 70개의 촛불이 꽂힌 생일 케이크가 도널드에게 증정됐으며 물갈퀴가 달린 그의 발자국은 브루스 윌리스, 샤론 스톤 등 명배우들의 손자국과 나란히 '명예의 거리'에 남게 됐다.”<연합뉴스>

지난 9일은 디즈니의 스타 '오리' 도널드 덕이 태어난 지 70년째 되는 날이었다. 각국 언론들은 도널드의 생일 기념 행사를 취재했고, 이를 TV나 신문에 내보냈다. 한낮 '오리'의 생일에 대단한 관심이 쏟아진 것이다. 하긴. 이 오리는 보통 오리가 아니긴 하다. 무엇보다 70년 동안 살 수 있는 오리는 없으니까.

디즈니 만화로 가장한 미 제국주의의 야만

"대통령들의 이름은 바뀌어도 '디즈니'라는 이름은 남는다." 할리우드와 더불어 미국 문화 산업의 거대 기둥인 디즈니. 디즈니는 만화라는 '순수한' '어린이들'의 세계를 통해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디즈니 만화의 순수성에 딴지를 건다면 어떨까. 재미있고 유쾌한 오리와 생쥐들의 이야기가 사실은 계급에 대한 차별, 가족과 여성에 대한 왜곡, 제3세계에 대한 편견 등을 강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면?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 Donald Duck·새물결·2003)는 바로 이런 '디즈니 만화로 가장한 미 제국주의의 야만'을 분석, 비판한 문화 비평서다. 디즈니 만화 속에 미국의 제국주의가?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심지어 저 순진무구한 도널드 덕의 익살 속에도 이데올로기가 감춰져 있다니"란 말이 나올 법하다.

데이비드 컨즐은 영어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디즈니는 시시한 마술사는 아니다. 그러므로 웃음 짓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험상궂은 얼굴을, 미키 마우스의 장갑 속에 감추어져 있는 쇠주먹을 들추어 내어 이 마술사의 속임수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도르프만과 마텔라르(이 책의 공동 저자)의 안목이 필요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저술의 가치는 특정 부류의 만화 혹은 특정한 문화 사업가에 대한 조명에 있다기 보다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가치들이 문화에 의해 유지되는 방식에 대한 조명에 있다."

그리고 디즈니 이데올로기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철저한 분석이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 제국에 가장 철저하게 종속된 식민지 중의 하나에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이 책은 1971년 칠레 혁명 와중에 집필되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정부에 의해 분서 당하기도 했다.

도널드 덕 만화 영화는 우리 나라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TV 만화 시리즈여서 도널드와 그의 조카들 휴이, 듀이, 루이가 벌이는 소소한 사건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 책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런 말랑말랑한 TV 시리즈가 아닌 신문 등에 연재된 카툰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소개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다음의 예들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어쨌든 대체 디즈니 만화 뒤에 어떤 속셈이 감춰져 있다는 건지, 70세 생일을 맞은 도널드의 이야기를 살짝 들춰 보기로 하자.

제3세계를 보는 시선

첫 번째 예는 도널드의 삼촌 스크루지 맥덕의 이야기이다. 스크루지는 이름처럼 돈만 밝히는 구두쇠로 나온다. 스크루지와 히말라야 설인(雪人) 구(Gu)의 에피소드에서는 제국과 식민지의 수탈 관계를 비유적으로 보여 준다.

구(Gu)는 '멍청하고 의지 박약한 몽골인 계통을 대변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만화에서 그는 '어린아이'처럼 취급된다. 그가 사는 곳은 너저분한 동굴이고 그는 천박하고 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해 발음도 정확하지 않다. 스크루지는 구가 누군가에게 조종 받아 훔친 칭기즈칸의 황금관을 단돈 1달러밖에 나가지 않는 손목시계와 맞바꾼다. 구는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 이야기가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에서 최초의 정복자와 식민지 개척자들과 원주민 사이에 이루어진 물물 교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적으로 우월한(유럽이나 북미에서) 만들어진 장신구 따위를 황금(그리고 향신료와 상아, 홍차 등)과 맞바꾸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디즈니는 저개발 국가 국민들을 '어린이'와 같은 대상으로 바라보며, 디즈니 만화가 어린이에 대한 말을 할 때 실제로는 제3세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문명과 기술로 무장한 이들과 '구'와 같은 존재와의 관계는 제국과 식민지, 주인과 노예 관계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 스크루지 맥덕은 달 모양의 '24캐럿짜리 순금'을 손에 넣는데, 이 금의 진짜 주인인 금성인이 등장해서는 스크루지에게서 '한 줌의 흙'을 받고 그 순금을 판다. 그리고 그 금성인은 황금과 흙 한 줌의 거래에 아주 만족하며 행복해 한다. 결국 스크루지는 황금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금성인이 원시적인 순수 상태로 돌아가게 해줌으로써 그에게 '좋은 일을 한 셈'이 된 것이다.

저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디즈니가 '정복에 따른 오점을 정화'한다고 이야기한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금성인을 보며 가난한 자와 저개발 국가를 수탈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 따위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특정 계급의 정치적 유토피아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체제에 대한 저항을 우스꽝스럽고 가식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랑', '평화' 등이 쓰인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던 도널드가 "저 사람들 목이 마를 것 같군! 이봐요, 피켓 따윈 던져 버리고 여기들 와서 공짜 레모네이드나 드시라고요!"라고 외친다. 그러자 그들을 일제히 피켓을 내던지고 가판대로 몰려든다. 게다가 이미 가판대에는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무리가 있는데, 깔끔하게 모자를 맞춰 쓰고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이들은 꼬마 사관 생도들이다. '더럽고 무질서한 반란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저자들은 이 만화를 보며 다음과 같이 비꼬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폭동을 일으키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보라. 이들은 자기들이 외치는 이상을 레모네이드 한 잔에 팔아넘긴다."

또한 저자들은 디즈니 만화에서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인물들을 만나볼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노동자는 제3세계인으로 보이는 인물로 등장하거나 범죄 성향의 부랑자로 그려질 뿐이라며, "어린이의 상상 세계는 특정한 사회 계급의 정치적 유토피아가 되어 버렸다"며 비판한다.

그 외에도 도르프만과 마텔라르는 디즈니 만화에서 나타나는 일그러진 가족상을 분석하며 "디즈니의 세계는 정상적이고 평범하며 어린이의 본성에 충실하다"는 월트 디즈니의 주장을 반박한다. 예를 들어 디즈니 만화에는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피터팬이나 인어공주 등 원작이 따로 있는 애니메이션은 제외하고. 디즈니 만화에서 부모는 거의 '강제적으로' 거부 당한다.

"… 스크루지 맥덕은 도널드의 삼촌이며 그랜드마 덕은 도널드의 숙모이며(그러나 스크루지의 아내는 아니다) 도널드는 휴이, 듀이, 루이의 삼촌이다. 그의 사촌 글래드스턴 갠더는 스크루지의 '먼 친척 조카'이다. 글래스턴에게는 샘록이라는 조카가 있으며, 다시 샘록에게도 여자 사촌이 둘 있다. 그리고 도널드의 종조부인 스와시버클 덕, 그리고 그랜드마 덕의 종고조부인 에이서 덕과 같은 먼 조상이 있다. 그리고 …”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68쪽)

두 저자는 디즈니의 세계를 '19세기식 고아원'이라고 혹평한다. 데이비드 컨즐도 디즈니 만화의 어린이들은 실제로는 '어른의 불안과 고뇌를 감추는 가면'이라고 비판한다. 디즈니는 자신의 세계를 '정상적이고 평범하며 어린이의 본성에 충실하다'고 주장하지만, 이 책은 디즈니 캐릭터들이 월트 디즈니의 가정 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컨즐은 월트가 아홉 살 때 매일 새벽 3시 반에 신문을 돌리는 등 고된 생활과 아버지에게 이유 없이 가죽끈으로 맞는 등 억압 받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어머니와 누이동생에 대한 기억은 없고, 유명해진 뒤에도 형 로이를 빼고는 실제로 부모나 가족 중 누구와도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컨즐에 따르면 대부분의 비평가들도 디즈니가 실제 어린이, 진정한 아동 심리 혹은 유년기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정도만 봐도 도널드 덕이 단순히 재미있고 인기 있는 오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도널드는 월트 디즈니의 정신적 산물이자 미국의 문화 사절단인 셈이다. 그것도 아주 친근하고 '순수한'. 그런데 도널드가 들려 주는 이야기는 결코 순수하지도, 친근하지도 않다. 단지 디즈니가 지키고 싶은 이데올로기를 웃음과 재미로 포장했을 뿐이다.

최근 디즈니가 배급을 포기한 영화,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 이 영화는 9·11 테러와 관련해 부시 가문과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빈 라덴 가문의 유착 관계를 폭로하고 있다. 결국 영화는 다른 배급사를 통해 미국에서 개봉했다.

역시, 디즈니가 저런 영화를 배급할 리 없다. 도널드가 지켜야 하는 디즈니 세계는 미국의 꿈이니까. 도널드 덕과 디즈니. 할리우드만큼 강렬해 보이지 않아도 분명 강력한 문화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 만화'로 치부하며 무시하기엔 너무 커다란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널드 덕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책이 디즈니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디즈니 만화로 가장한 미 제국주의의 야만

아리엘 도르프만 외 지음, 김성오 옮김, 새물결(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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