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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광식 <내 고향 청계천 사람들>
ⓒ 창해
새어머니는 극장 외출을 할 때 절대로 나를 데리고 가는 일이 없었다. 완고한 시아버지의 꾸중도 꾸중이려니와 어린이들에게 극장은 교육상 유해한 장소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나를 따돌리고 나가면 결사적으로 울며 그 뒤를 좇아갔다.

청계천 4가 우리 집에서 동양극장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어머니는 다행히 전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셨다. 따라오면 안 된다고 야단을 맞았지만 나는 결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지 않았다. 사뭇 울며 뛰어갔다. 그러나 동양극장 앞에서 나의 끝없는 추적은 좌절되었다. 표도 없거니와 '연소자 입장불가'였다. 나는 극장 앞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찾아야 돼. 우리 엄마 찾아야 돼."

극장 관계자가 달랬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끝에 드디어 마지막 막이 오를 무렵 입장이 허락되었다… 그로부터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는 동양극장을 매일 같이 드나들게 되었다. 동양극장은 문화일보 사옥이 되었고, 나는 그 신문사의 사장이 된 것이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다.

- 17~18쪽, '신여성 새어머니' 몇 토막


손광식. 그는 지금 청계천 복원공사가 한창인 서울 청계천에서 으앙, 하고 태어나 콧수염이 꺼뭇꺼뭇해질 때까지 청계천에서 자란 청계천 토박이다. 그가 태어난 그해는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다섯살 때는 진주만 폭격이, 열네살 때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어린 시절을 전쟁 혹은 그 영향권 안"에서 보낸 것이다.

그 시절, 겪은 일이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그는 청계천에서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었고, 여동생을 홍역으로 잃었다. 그리고 '일제, 해방, 전쟁, 배고픔, 혁명, 쿠데타, 개발, 독재' 등등 결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굵직굵직한 역사의 현장을 청계천에서 담 너머 불구경하듯이 혹은 직접 피부로 겪으며 자랐다.

청계천은 손광식의 "성장을 지켜 보았고 온갖 정감이 넘치는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추억을 만들던" 고향이었다. 하지만 1958년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그러한 추억들도 깡그리 덮여 버렸고, 고향 일대는 온통 회색 콘크리트숲으로 바뀌고 말았다. 근데, 청계천 복원 공사로 인해 그동안 죽어 버렸던 그의 고향이 다시 가쁜 숨을 천천히 내쉬고 있는 것이다.

▲ 터져요~ 뻥!
ⓒ 창해
"지난 7월, 며칠 동안 계속된 폭우로 물이 불어나자 한강이나 중랑천에서 거슬러 올라온 것으로 보이는 붕어와 잉어 등 물고기 수십 마리가 공사현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과 1년여 전까지만 해도 청계천 밑에 물이 흐른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말이다." -'프롤로그' 몇 토막

지난 30여년 동안 언론계에서 맹 활약을 펼쳤던 언론인 손광식(67)이 자신의 오랜 기억의 흑백필름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청계천 이야기를 오롯히 담아낸 에세이 <내 고향 청계천 사람들>(창해)을 펴냈다.

이 책은 제1부 '청계천에 흐르는 유년'과 제2부 '그 옛날 우리가 꿈꾸었던 것들'에 '나의 수호천사 영자 누나', '두 번 입학한 초등학교', '비행기의 공포', '떠버리 아저씨', '첫사랑 광옥이', '피난시절의 추억', '문학소년의 꿈', '댄서의 순정', '어긋난 사랑의 비극', '장사동 일사팔의 일'을 포함 모두 51편의 글이 청계천의 전설처럼 실려 있다. 흑백 사진과 함께.

손광식은 프롤로그에서 "우리 60대의 인생은 그야말로 소설"이라며 "청계천이라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민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청계천에는 그 어느 곳보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의 애환 속에는 시대상과 사회상"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 청계천의 복원 공사에 대해서 "계획대로 차질 없이 공사가 진행된다면 머지않아 맑은 청계천 물과 아름다운 천변 풍경이 우리 앞에 등장할 것"이라며 몹시 반기는 눈치다. 이어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 아프고 쓰리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모두 그 아름다움 속에 갈무리" 되기를 바란다.

나보다 두살 위인 누이는 시집을 늦게 갔다. 한쪽 다리 불구가 허물이 되고, 배화여고 중퇴라는 학벌이 걸리고, 항시 뒷전으로만 밀려 있던 집안에서의 위치 때문이었다. 신랑은 상처한 건설회사 직원이었다. 경제적으로도 별로 여유 있는 집이 아니었다.

시집간 지 몇 년 후 하루는 누이가 나를 경제기획원으로 찾아왔다. 어느 여름, 햇볕이 아주 강렬했던 날이었다. 당시 나는 경제기획원 출입기자였다.

"왜 왔어?"
"응, 돈이 좀 없어서……."
"얼마?"
"한 만 원만 줘."

그것이 이승에서 누이와의 마지막이었다. 그해 겨울 나는 중동 특별취재에 들어갔고, 이듬해 봄에 귀국했다. 한 일주일쯤 지났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누이의 몸 상태가 좀 나쁘다고 아내가 말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사실은… 누님, 당신 외국서 취재하고 있을 때 이미 돌아가셨어."

- 71~72쪽, '참새와 누이에 관한 아픈 기억' 몇 토막


'나'의 누이는 한 쪽 다리가 짧다. 어느날 '나'는 누이와 함께 누이가 다니고 있는 방산초등학교 운동장에 놀러갔다가 참새 한 마리를 잡는다. 그런데 그 참새는 누이처럼 한쪽 다리가 성치 않다. 그때 누이는 "다리를 다친 상태였구나"하면서 몹시 당황해 한다. "참새도 자기와 같은 불구자라는 사실에서 오는 참담함" 때문에.

언론인 손광식은 누구인가?
청계천에서 태어나 자란 청계천 토박이

"마치 한 편의 빛바랜 활동 사진을 보는 것 같다. 나이든 사람들은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추억이 하나둘 떠오를 것이고, 젊은 세대들은 멀게만 느껴졌던 아버지 세대와의 정서적 격차가 한결 줄어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최우석(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언론인 손광식은 1937년 서울 청계천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소년기, 청년기를 청계천과 함께 한 서울토박이다.

청계초등학교를 비롯, 줄곧 서울에서 중ㆍ고등학교와 대학까지 졸업한 그는 일선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내디딘 뒤 <경향신문> 편집국장과 주필, <문화일보> 주필과 사장을 맡았다.

30여년 동안 몸 담았던 언론계를 떠난 뒤에는 <삼성경제연구소> 고문을 거쳐 지금은 <상지컨설팅> 회장을 맡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한국의 이너서클> <한국의 경제관료(공저)> <거탑의 내막(공저)> 등이 있다.
/ 이종찬 기자
'나'는 갑자기 그 참새가 무서워져서 눈 앞에서 얼른 사라져 버리기를 바란다. 그 다음날 참새는 '나'의 바람대로 사라지고 없다. 그 참새는 하룻밤 지난 뒤 죽었고, 누이가 죽은 참새를 들고 방산초등학교 어딘가에 묻었기 때문이다. 근데, 그 참새처럼 누이도 훌쩍 '나'의 눈 앞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글쓴이는 뒤늦게 후회한다. 그때 "왜 만원만 달라고 했다고 만원만 주었을까?"라며. 그때부터 글쓴이의 머리 속에는 늘 그 방산초등학교 운동장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책한다. "나의 돌팔매가 부메랑이 되어 불쌍한 우리 누이에게 돌연한 재앙을 안겨준 것은 이니었을까?"라며.

비야 누구나 피하는 것이지만 아예 보따리를 싸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리 밑의 각설이들이다. 청계천 여러 다리의 교각 밑에는 각설이들의 움막이 있었다. 겨울에는 겹겹이 가마니를 둘러치고 용케 추위를 견뎠다. 그리고 봄이 되면 가마니 밖으로 나와 이를 잡았다.

우리에게 거지의 상징은 깡통과 이 잡기였다.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 나도 깡통을 들고 다니고 이를 됫박으로 잡았으니 거지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리 밑 인생들이 대피를 하면 청계천 물이 서서히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살이 빨라졌다. 거의 다리 밑 10cm쯤까지 차올랐다 싶으면 비가 그쳤다. 그러면 골목 사람들은 일제히 다리께로 나와 붉은 흙탕물에 떠내려오는 온갖 부유물들을 구경하기에 바빠진다.

정말 만물상이었다. 찬장이 있는가 하면 호박이 둥둥 떠내려가고, 헤엄을 치는 개가 있는가 하면 돼지도 떠내려갔다. 그 중에서도 우리 눈에 제일 많이 띈 것은 공이었다. 잠자리채를 장대에 묶어 공을 건져보려 했지만 거친 물살에 장대만 부러지기 일쑤였다.

- 99~101쪽, '여름풍경' 몇 토막


'나'가 어렸을 적 청계천의 여름은 몹시 무더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었고, 더위를 쫓는 유일한 도구는 부채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청계천 다리 아래 움막을 치고 이를 잡으며 힘겹게 살아가던 각설이들의 슬프고도 힘겨운 삶을 떠올린다.

▲ 우리 옆집은 막걸리와 해장국을 파는 주막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나무장수나 막일을 하는 사람들이 오가며 한 잔씩 술을 걸치거나 술국을 한 대접씩 마시고 가는 그런 술집이었다
ⓒ 창해
그리고 장마가 닥치면 청계천에서 콸콸콸 소리를 내며 힘차게 떠내려오는 흙탕물 소리를 듣는다. 그 흙탕물에는 마치 각설이처럼 피라미와 붕어, 비단잉어도 함께 떠내려온다. 그때 천렵꾼들이 물고기들을 잡기 위해 몰려든다. '나'와 아이들 또한 천렵꾼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물고기 잡는 모습을 구경한다.

글쓴이는 어린 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청계천 물고기들은 한국전쟁 뒤 청계천 복개공사가 끝날 때까지도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글쓴이의 둘째 아우가 청계천 "마지막 마무리 공사를 할 때 썩은 다리 시멘트 구멍을 통해 청계천으로 내려가 미꾸라지"를 잡던 모습을 그리워한다.

그 잉크 냄새는 나에게 운명이었다. 잡지를 펼쳐드는 순간 나는 진한 인쇄 냄새부터 맡았다. 그리고 내 이름이 그 잡지에 나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제1회 '학원문학상' 수필 부문에서 내가 응모한 '송 서방'이 가작으로 입선된 것이었다. 고백하자면 나에게 문학적 소양이 잠재되어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림이라면 그래도 소질이 있다는 평을 들었고, 나도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잡지 <학원>에 보낸 수필은 난생 처음으로 쓴 글이었다. 그래도 행여나 해서 원고를 보내 놓고 청계천 좌판에 문안을 드렸다.

"학원 언제 나오지요?"

그때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으니 1954년이라고 기억한다. 당시 청계천에는 아직 상가가 형성되지 않아 자리를 선점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순댓국집도 겨우 하나둘 문을 열 때였다. 그야말로 만물잡화 상가였다. 좌판 책가게는 개똥이집에서 돌아서자마자 있었다. 책가게라고 하지만 낡은 교과서가 대부분이고, 새로 나온 책은 몇 권 안 되었다.

- 189~190쪽, '문학소년의 꿈' 몇 토막


글쓴이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해 정월에 나온 <학원> 표지, "검정 겨울 교복을 입은 학생이 말고삐를 잡고 있는" 그 사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잡지의 표지 모델로 탤런트 사미자씨 오누이가 등장한 것도 잊지 못한다. 글쓴이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신문기자로 일생을 보낸 것도 그때 맡은 그 인쇄 잉크 냄새 때문이라고 회고한다. "순간적인 운명"이라며.

언론인 손광식의 <내 고향 청계천 사람들>은 청계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글쓴이의 가난하고도 힘겨웠던 성장사이자 잃어 버린 고향에 대한 못다한 그리움으로 똘똘 뭉친 회고록이다. 특히 청계천 복원이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 옛 청계천의 흔적을 차근차근 들추어낸 이 책은 청계천 복원의 새로운 길라잡이가 된다.

내 고향 청계천 사람들

손광식 지음, 창해(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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