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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황평우 기자는 우리 문화재와 역사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온 시민기자로, 피맛골 재개발 공사현장에서 매장문화재를 발견, 문화재청과 종로구청 등 관계당국에 이를 제보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 교보문고에서 시작하는 피맛골 입구
ⓒ 황평우

서울 종로의 큰 길을 가운데 두고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길 양쪽의 상가건물 뒤로 가면 좁고 긴 골목길이 나온다. 이 길은 조선시대 말을 피해 다닌다는 뜻에서 피맛골(避馬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종로1가부터 6가까지 위 아래로 나누어 윗 피맛골(上避馬洞)과 아래 피맛골(下避馬洞)이라 불린 이 길은 조선시대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골목길이다.

피맛길 탄생의 배경은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하급 관리가 말을 타고 가다가 종로에서 상관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길가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다가 상관이 지나간 후 다시 말을 타고 가야 했다.

조선시대 때 현재의 종로 1가부터 6가까지, 숭례문에서 종루까지, 돈화문에서 종로까지 길옆에 행랑을 짓고 운종가(오늘날의 상가형태-장사를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하며 수익금 중 일부는 세금으로 납부하며 부역을 면제받는다.)를 형성하였다. 그 운종가 행랑 뒤로 길을 내 하급관리들이 큰 길을 가다가 상관이 오면 뒷길로 피해가기도 했다.

그 이후 이 골목길은 서민들의 길이 되었고, 운종가에서 거래를 마친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가 성행하게 되었다. 피맛길에는 내외술집, 모주집, 목로집, 색주가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의 목로집은 선술집으로서 산적, 돼지고기, 생선 등을 담은 목판이 있어 손님이 들어오면 먹고싶은 안주를 고르게 하여 즉석에서 그것을 구워냈다.

지금도 이 피맛골 중 종로 1가의 교보빌딩 후문 쪽인 청진동, 피카디리 극장과 단성사, 옛 종로서적에 뒷길이 남아 있으며, 청진동의 뒷길에는 술집, 음식점 등이 있어 그 옛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광화문 네거리, 교보문고(옛 기로소터) 옆 골목 입구에는 '피맛골'이란 간판이 걸려 있다. 종로 큰길 따라 여기서부터 동대문까지 난 이 골목길에는 피맛골이 '아랫것'들이 다니는 길이었다는 전통을 이어받아서인지 값싼 음식점들이 쭉 늘어서 있다. 점심시간에 이 골목길은 온통 생선구이와 된장찌개, 김치찌개 냄새로 뒤덮인다. 한 끼 밥값은 4000원~5000원으로 저렴한 편. 주요 고객은 회사원 등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이다.

맛없다고 소문나면 개업하고 두어 달 만에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이곳의 음식맛은 정평이 나 있다. 저녁에는 빈대떡, 순대, 곱창구이, 낙지볶음 등 값싼 안주에 소주나 막걸리를 한잔할 수 있는 선술집 골목으로 변한다.

▲ 철거가 진행중인 종로타운 예정부지. 곳곳에 주초석이 널려있으나 이미 많은 부재들은 반출되었다
ⓒ 황평우

현대와 전통이 조화된 역동의 공간이자 쉼터

값싼 술집이 빈틈없이 꽉 들어찬 종로2가 피맛골 주점거리도 명소 중의 명소로 꼽힌다. YMCA 뒤편에 위치한 피맛골은 70~80년대 민주화 항쟁이 들끓을 무렵 학생과 회사원들이 울분을 삭이며 김치 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네던 곳이다.

40~50여개의 학사주점이 쭉 늘어선 이곳에는 주로 대학생 등 20대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만원짜리 지폐 한장이면 서너명이 동동주 한 사발에 김치볶음이나 골뱅이, 부대찌개 등 푸짐한 안주를 골라서 맛볼 수 있다. 평일에도 저녁이면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특히 주말이면 그야말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피맛골이 있기에 종로의 골목은 현대와 전통이 조화된 역동의 공간이자 쉼터로 통한다. 그만큼 젊음의 거리로, 먹거리의 중심으로 꾸준히 자리매김해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제일은행 본점(옛 의금부터) 옆에는 피맛골의 내력을 적은 팻말이 세워져 있고 서민의 애환을 담은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이 피맛골의 뒷골목도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차츰 사라져 가고 있으며 머지않아 그 흔적마저 종적을 감출 위기에 놓여 있다.

종로구 청진동 166번지 일대의 청진구역 제6지구 도심재개발 지역에 시행면적 2619평, 지상 20층, 지하 7층의 오피스텔을 시작으로, 옛 도심의 문화가 재개발이라는 이름아래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재개발 파고에 사라져갈 피맛골의 운명, 그러나...

▲ 지상 20층-지하 7층 규모의 청진동 6지구의 종로타운 조감도
골목문화가 사라지는 것에 안타까워하던 시민들과 문화연대, 도시연대 등은 무분별한 도심지 재개발을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재개발사업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 철거가 상당수 진행중이지만 세입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기자가 2004년 1월 18일~19일 광화문 세종로주변의 일상생활을 사진에 담으며 탐사를 하던 중 청진동 제6지구 현장에서 장대석과 주초석이 다량으로 발견되는 사실을 확인하고 문화재청과 서울시 종로구청에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를 하였다.

1월 20일 문화재청은 담당관을 현장에 파견하였고, 문화재청 신희권 매장문화재과 학예관·종로구청 박대복 문화재팀장·건축업체 고위간부와 기자가 합동으로 장대석, 주초석, 조선후기 기와편 등 매장문화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장조사에 참가한 신희권 학예관은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를 해야한다, 시굴조사를 해야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히며 "즉시 문화재청에 보고하겠다"라고 했다. 문화재청은 1월 20일 오후 즉시 '공사중단명령'을 내리고 시굴조사에 착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옛 도심지 재개발지역에 공사중단 명령을 내린 사례는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70년대 지하철 공사 당시 어마어마한 장대석과 주초석들이 발견되었으나 개발독재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며, 80~90년대 서울의 구 도심 재개발 사업에 있어서도 경제적 이익을 앞세운 논리에 문화와 문화유산 보존의 논리는 힘없이 무너져가는 아픔을 맛보아야했다.

▲ 정교하게 가공된 장대석(한옥의 기단부)이 발견되었다
ⓒ 황평우
그러나 이제부터 옛 도심지의 재개발사업에도 문화유적 보호와 역사인류학적인 지표조사가 선행된 후 그 결과에 따라 보존과 개발이 행하여져야 한다는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종로구청 박대복 문화재팀장은 건축주인 (주)르.메이에르 고위 관계자와 현장에서 면담을 가지고 문화재보존과 지표, 시굴조사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공기가 연기되더라도 이해해 줄 것을 당부했으며 시행자측도 문화재보호법에 따르겠다는 약속을 했다.

앞으로의 일정을 예상해보면 시굴조사 후 문화재위원회를 통해서 전면발굴을 결정하며, 발굴 후에도 재개발을 계속하는냐 피맛골 골목은 보존하는냐 등의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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