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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의 모델은 서울의 한강이다. 콘크리트 축대로 정돈하고, 보를 세워 물을 채우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서울 한강에 사는 물고기, 곤충, 새들은 주변보다 왜소하고 종류도 적다. 바로 환경 탓이다. <오마이뉴스> <서울환경연합> <대한하천학회>는 모래밭, 여울, 숲이 있는 한강을 제안하고자 연속기획을 마련하였다. 기획에는 토목, 사회, 역사, 도시계획 등의 전문가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편집자말]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하기 전부터 강은 흘렀다. 강은 사람들이 강에 기대어 사는 것을 포용했으며 인간이 강을 해치는 것조차도 묵묵히 담아냈다. 강 그 자체가 역사요 문화다.

인류 정착 문화의 시작은 물을 이용한 식량 생산이었으며, 잉여생산물은 인간들의 취락형성과 발달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수리 기능을 갖춘 강과 그 유역의 식량생산 경작지가 배경이다. 강 주변은 교통, 외적으로부터의 방어, 자연환경 요소가 주는 예술 창조활동 등을 총망라한 인간 역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에서 보듯 물의 이용이 편리한 강변에서 취락도시가 발달했다. 이것은 한강을 끼고 문화를 일으킨 서울지역의 지리적 조건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한강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근거지가 되었을까. 그 역사는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강유역의 비교적 온화한 기후, 풍부한 수량, 고루 발달된 샛강, 강안 좌우 언덕의 우거진 숲, 그 둘레에 식생 하는 짐승 등은 한강 주변에서 사람들의 주거를 가능하게 했다. 현재까지 발굴을 통해 밝혀진 한강 주변의 구석기, 신석기 유적지는 약 200여 곳에 이른다. (물론, 보존된 곳은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옛날에는 한강변에도 사람들이 북적였네

겸재의 <압구정도>
 겸재의 <압구정도>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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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의 발달과 금속기의 사용은 생산력 증가를 가져왔고,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등장해 정치조직을 형성했다. 한강 유역은 고대의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이 국력을 키워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됐던 역사의 장이다. 또한 한강은 고려와 조선의 중요한 교역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런 한강의 오랜 역사와 문화는 조선의 화가들을 통해 우리에게 남겨졌다. 조선 초부터 한강의 경치는 팔경에 포함될 정도로 명승지 중 하나로 거론됐고, 많은 정자와 루가 입지해 있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임금의 종친, 문무재상, 승지들이 참여한 연회에서 활쏘기를 했는데 좋은 점수를 딴 권람에게 <한강도> 한 폭을 주기도 했다.

한강 그림을 많이 그린 것은 겸재 정선이다. 한강은 서호, 동호, 남호로 구별할 수 있는데 서호(양천방면) 일대를 그린 겸재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4점이 남아있다. <경교명승첩>은 겸재가 60대 후반인 1740년 12월, 양천 현령에 부임한 후 친구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기로 약속하면서 다음해 여름까지 한강변의 명소, 백악산 일대, 고사, 자화상, 거처 등을 그린 화첩이다. 이중 남아있는 것은 <금성평사도>(金城平沙圖), <양화환도도>(楊花喚渡圖), <종해청조도>(宗海聽潮圖), <소악후월도>(小岳候月圖) 등 4점이다.

화첩에 포함된 4점 외에도 <관악석남도>(冠岳夕嵐圖), <관악청남도>(冠岳晴嵐圖)가 있다. 또 한강 전경을 그린 <목멱조돈도>(木覓朝暾圖), <안현석봉도>(鞍峴夕烽圖), 화면 중앙에 주요 경물을 부각시킨 <공암층탑도>(孔岩層塔圖), <소요정도>(逍遙亭圖), <양화진도>(楊花津圖), <선유봉도>(仙遊峯圖), 양화진 일대 겨울 경치를 그린 <양화답설도>(楊花踏雪圖) 등도 모두 정선의 그림이다.

동호 일대를 그린 한강도로는 압구정에서 바라보는 동호의 경치를 그린 <압구정도>가 있다. 남호 일대(서빙고에서 용산)는 본래 용산강을 일컫는데, 너벌섬(지금의 여의도)과 밤섬을 볼 수 있다. 남호일대를 그린 그림 중 정선의 그림은 <동작진도 銅雀津圖>가 있다. 

카페촌에 밀려난 미사리 유적지, 서울시 홍보관으로 전락한 몽촌토성

한강은 강변에 비옥한 농토를 주었다. 홍수 때마다 토양이 밀려와 강변에 비옥한 충적지를 발달시켜 선사시대부터 농경 및 취락 터가 형성됐다. 또한 한강변에서 일찍이 어로생활을 했음을 알려주는 많은 유물들도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한강은 일제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공공재에서 사유재로 급변하게 됐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민중들은 한강을 떠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개발세력들 역시 한강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했다.

면목동 구석기 유적은 서울의 한강 유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일한 구석기 유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밀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택 건설 등 도시개발을 진행해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됐다.

미사리와 암사동 주변 선사유적지 일대. 경작지와 각종개발로 사라지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미사리와 암사동 주변 선사유적지 일대. 경작지와 각종개발로 사라지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 황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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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동 선사주거지는 두만강 하류, 대동강 하류, 낙동강 하류와 더불어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의 4대 중심지 중 하나이다. 암사동 선사유적은 1925년(을축년) 대홍수 때 다수의 토기편이 노출되면서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도로 개설과 택지개발로 대부분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조정경기장으로 파괴된 미사리 선사유적지는 카페촌에 밀려나 표지판만 존재한다. 역삼동 청동기 유적은 한강유역에 벼농사가 시작된 이후의 전형적 주거지 형태였지만 사라졌다. 송파구 가락동 송파대로 동쪽 해발 40m 가량의 낮은 구릉 위에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가 발굴됐는데, 이곳도 사라졌다.

강동구 명일동 유적은 청동기 후기의 주거지로 1961년 암사동 남쪽 해발 42m의 야산 사면 일대에서 발견됐으나 이곳도 사라졌다. 송파구 석촌동 주거지 유적은 잠실대교 건너편 한강 연안 충적 모래층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한강개발사업으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가장 대표적인 성이지만 올림픽도로와 거주지 개발로 무참하게 훼손되었다.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가장 대표적인 성이지만 올림픽도로와 거주지 개발로 무참하게 훼손되었다.
ⓒ 황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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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리토성은 백제 초기의 성지 가운데 가장 장대한 규모를 가진 성이다. 이 토성의 성격 규명은 백제사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때문에 사적으로 지정, 보존키로 했으나 서울시의 적절한 대책이 없어 어려움에 처해있다. 북쪽 성벽의 많은 부분이 올림픽도로 개설시 도로로 편입돼 훼손됐다.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에 위치한 몽촌토성(夢村土城)은 백제 초기의 토성이다. 한성시대 백제 도성의 유력한 후보지의 하나로 추정돼, 사적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몽촌토성 주변도 인근 호텔에 가려졌으며, 가짜 해자 등을 설치해 원형을 잃어버린 허수아비 유적이 되어버렸다.

이런 가운데 몽촌토성 안에 건립될 한성백제박물관은 많은 문제점이 있다. 몽촌토성 안에 건립한다면서 백제의 초기수도 풍납토성의 위용을 재현하겠다고 하는 게 대표적이다. 또 서울시는 한성백제박물관에 한강르네상스 홍보를 하겠다고 하는데, 역사와 문화를 전시하는 박물관에 서울시 추진사업을 홍보한다는 발상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박물관이 서울시장의 홍보관은 아니지 않나.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에 있는 송파진(지금의 송파).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에 있는 송파진(지금의 송파).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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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가장 긴 돌다리에 콘크리트 덧댄 사연

삼성리토성(三成里土城)은 강남구 삼성동(현 경기고등학교) 일대를 말하며, 삼국시대의 토성이다. 이 산성은 위치와 지형조건으로 보아 한강 나루를 지키는 백제 수비성의 하나로 추정된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강남일대를 개발하면서 강북의 고등학교들을 이곳으로 대거 이전시켜 교통밀집지로 바뀌었다.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가 한성에 도성을 정한 후 475년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축조된 백제 전기 고분군이다. 백제의 매장풍습과 함께 축조 당시 문화·정치·사회 등에 관한 문화백제의 역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한국전쟁 시 미군 전차의 한강도하 때 전차 밑에 깔리고, 인근에서 건축자재로 사용해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1987년 복원됐다.

호텔과 도로로 잘려나가 도심지 작원 공원으로 전락한 세계유산 선정릉.
 호텔과 도로로 잘려나가 도심지 작원 공원으로 전락한 세계유산 선정릉.
ⓒ 황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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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은 강남의 도로 건설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사방팔방이 잘려나가 지금은 봉분만 남아있다. 얼마 전에는 봉분 뒤편에 서울에서 가장 크다는 나이트클럽이 들어서기도 했다.

한강에 있었던 제천정(濟川亭), 압구정(狎鷗亭), 천일정(天一亭), 화양정(華陽亭), 심원정(心遠亭) 등 정자들도 사라지고 없다. 광진구 자양동의 한 아파트단지 내에 낙천정이 있는데 사라졌다가 1991년에 팔각지붕의 정자로 건립됐다. 이 또한 최근 아파트 재건축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철거가 제기되고 있다.

봉은사는 강남에 있는 서울의 대표적 도심 수행공간으로, 보우대사, 추사 김정희, 수많은 목판 경전, 독특한 구조의 선불당 등 19세기의 귀중한 숨결이 남아있는 목조건물이다. 그러나 봉은사는 무자비한 강남개발로 인해 주변에 초고층건물이 들어서면서 수행환경이 훼손되고 있다.

금호동과 응봉동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매봉의 남쪽 기슭 한강 연변은 전부터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히는 '입석조어'(立石釣魚)의 대상지인 입석포(立石浦)였다. 현재는 철도 등으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입석포에서 중랑천 쪽으로 올라가면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는 살곶이다리가 위치해 있다. 살곶이다리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긴 다리다. 그러나 무분별한 하천개발로 하천의 폭이 넓어져 교량 중간에 길이 27m 가량의 콘크리트를 증설하면서 옛 다리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서울시는 이곳 중랑천에서 의정부까지 배가 지날 수 있게 한단다. 살곶이다리의 운명이 풍전등화이다.

밤섬(栗島)은 마포팔경(麻浦八景)의 하나다. '율도명사'(栗島明沙)의 풍광이 뛰어나 많은 시인들이 밤섬 위쪽으로 넓게 펼쳐진 흰 모래밭을 읊었을 정도다. 밤섬을 중심으로 주위에 푸른 버드나무가 펼쳐졌으며, 밤섬을 끼고 고깃배와 놀잇배들이 한가롭게 떠다녔다. 여름철 백사장에는 피서 인파가 넘쳤고, 봄·가을에는 뱃놀이와 강상풍경을 구경하는 인파로 붐볐다. 그러나 1968년 여의도 윤중제 공사로 밤섬을 폭파하게 되었고, 당시 어로와 조선을 주업으로 하던 주민들은 인근 창천동으로 이주 당했다.

여의도(汝矣島)는 한강의 하중도(河中島)로서 1970년대 한강 개발의 상징물이다. 잉화도(仍火島)·나의주(羅衣洲)·나의도(羅衣島)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목장이었다. 사축서(司畜署)와 전생서(典牲暑)의 관원이 파견돼 목축을 감독하였으며, 궁중이나 나라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제공했다. 그러나 1968년 한강개발계획 수립으로 운명이 바뀌었다. 섬 주위에 높이 16m, 폭 21m, 연장 7km의 윤중제를 쌓아 87만 600평의 땅을 만든 뒤 주거·금융·대사관·방송국·국회의사당 등을 세웠다. 이때 경관이 훌륭했던 인근의 밤섬을 폭파하여 여의도 땅을 돋우는데 필요한 토석을 채취하여 사용하였다.

오늘날은 나루터의 배대신 한강철교를 건너는 1호선 전철이 사람들을 실어나른다.
▲ 현재노량진 오늘날은 나루터의 배대신 한강철교를 건너는 1호선 전철이 사람들을 실어나른다.
ⓒ 네이버지도검색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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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푸아그라'? 제발 좀 비워주세요

한강은 예부터 중요한 수로로 이용되어 왔다. 한강의 하구가 휴전선이 되기 전인 1950년 이전에는 한강의 하구를 통해 상류 330㎞까지 역함이 가능해 마포, 용산, 뚝섬, 여주, 목계, 충주, 청평 등지의 나루가 번창했지만 모두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6천 해리의 긴 해안선과 7대강을 포함하는 하천이 국토를 가로지르며 흘러서 수운 교통이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졌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한강에 다리가 놓이고 한강의 수운로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한강에서 유람선과 가짜 오리 배를 제외한 배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남한강과 북한강 수로 변에는 각각 약 200여개 및 100여개의 포구와 나루터가 있었고 선박의 기항지도 약 150여 곳이 있었다. 이들 포구와 나루터 주변에는 창고업, 도매업 그리고 숙식업이 성했으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중간상인인 객주집과 창고·위탁업을 겸한 여각이 전국의 산물이 집결되는 한강변에 모였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문화와 놀이가 있었다. 현재 한강의 객주와 여각터는 대형 호텔과 고급카페로 대체되었고 비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가의 아파트의 소수자들만이 한강을 가두어두고 있다.

조선이 한양에 수로를 정한 이후 한양은 500여 년 동안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중심지를 흐르는 한강은 단순히 하천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수운로로서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어 포구주변에 장이 서면서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니 조선 최고의 교역의 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강에 다름과 차이를 극복하는 교역이기 보다 다름과 차이가 천박하게 표출되는 사익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한강의 주인은 아파트와 자동차 등 소위 개발세력과 토건주의자들이다. 서울시가 주창하는 이른바 한강르네상스사업은 많은 계획을 담아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강을 좀 비워달라는 것이다. 서울시의 한강 르네상스 계획은 마치 프랑스의 푸아그라 요리를 연상한다. 좋은 요리 재료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억지로 거위에 먹이를 집어넣고 그 지방간으로 요리를 만들어 먹고는 좋다고 웃어대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모습들이 연상된다.

서울시를 비롯한 강주변의 지방정부가 한강과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사업은 한강에 사람들의 진입을 쉽게 하는 조치와 콘크리트 제방을 철거하는 일, 자동차 길을 멀리 돌리는 것. 이 세 가지밖에 없다.

시민들이, 예술가들이, 청년들이,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담론과 주제들을 모아 새로운 한강의 문화를 꿈꾸게 하면 된다. 한강의 주인은 서울시청 직원도, 영혼 없는 전문가도, 토건업자도 아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황평우는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입니다.



태그:#한강, #한강은 오시장에작품이아니다, #한강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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