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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오후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고문·용공조작 피해자 1차 증언대회'에서 피해자인 '재일동포 간첩 사건'의 신귀영씨(왼쪽)와 '진도간첩단 사건'의 석달윤씨의 아들 권호씨가 자신이 겪은 고문 및 가족들의 피해상황을 증언하던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전창일씨(오른쪽)는 자신이 끌려가 고문당한 상황을 재현해 보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국가보안법 고문·용공조작 피해자 1차 증언대회'가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주최로 16일 오후 국회도서관 지하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7신 : 16일 오후 6시49분]

'남매간첩단 사건' 김삼석씨 "160번 수사관 얼굴과 몸집, 말투 똑똑히 기억"


▲ '남매간첩단 사건'의 김삼석씨가 증언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마지막 증언자로 80년 '남매간첩단 사건'의 김삼석씨가 나섰다.

다음은 김씨의 증언 요지다.

"내 사건에는 안기부 프락치가 개입됐다. 이 프락치가 우리 남매에 접근을 해서 93년 9월 8일 경, 정기국회를 앞두고 소위 '작품'을 만들려고 한 거다. 그런데 작품이 안되자 프락치를 통해서 소위 일본 사람이 여동생에게 북한 원전을 주는 척 하면서 함정수사해 현행범으로 체포, 남산 안기부로 끌고 갔다.

여러분들이 말씀하다시피 나도 곤봉으로 맞고 뺨도 맞았다. 교대로 17명의 수사관이 조사를 했는데, 잠 안재우기 고문이 나에게는 가장 치명적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밤낮 구분이 안됐다.

성적인 욕설이나 '평생 햇빛은 다 봤다, 여기서 죽어서나 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협박) 발언도 했다. 원산폭격과 서서 무릎 쪼그리기도 당했다. 이것도 5분하면 진땀이 난다. 이렇게 7일 정도를 당하다가 수사관 2명을 따라서 화장실을 간 적이 있다.

남매간첩단 사건이란?

김삼석씨는 지난 94년 이른바 '남매간첩단' 사건으로 실형 선고를 받고 4년 동안 복역한 뒤 사면 복권돼 지난 7월 말까지 1년여동안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은 구속영장은 물론 압수수색영장도 없이 김씨를 연행, 안기부 남산 사무실로 연행해 성추행, 잠안재우기, 구타 등의 고문을 했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김씨는 이로 인해 수사관들의 요구대로 일본에서 북한공작원을 만나고 왔다고 허위자백을 했고, 일본 가족교포회장인 이좌영씨로부터 결혼축의금으로 받은 돈도 북한공작원에게 받았다고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 강제 날인해야 했다고 기억한다.

한편 이후 백흥룡씨가 양심선언을 통해 이 사건은 자신이 프락치로서 안기부와 공모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폭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남매간첩단 사건은 최근 영화 <프락치>를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다.
당시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는데, 160번 명찰을 단 수사관이 칫솔을 내 성기에 대면서 '칫솔이 큰지 성기가 큰지 대보자, 불알에 다마를 몇 개 넣었는지 보자'는 식의 성고문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 11년 전 사건이지만 아직도 160번 수사관의 얼굴과 몸집, 말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후 나는 고문이나 가혹행위 고발하기 위해 죽으려고 했다. 열흘 정도 지나서 변호사가 접견을 왔던 자리에서 내가 혀를 깨물고 콘크리트 벽에 몸을 부딪혔다. 당시 충격은 혀로 오지 않고 머리통으로 왔다. 또 꼬리뼈도 휘어졌다. 당시 안기부에 파견됐던 의사가 똥구멍으로 손가락을 넣어서 꼬리뼈를 교정했던 기억이 난다.

남매사건이다 보니 여동생도 내 옆방으로 연행됐는데, 내가 당하는 것은 몸으로 때울 수 있는데, 여동생이 옆에서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오빠로서 못할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여동생은 6개월 정도 옥살이를 하고 나는 4년을 꼬박 채우고 석방됐다. 그리고 내 이름 앞에는 여전히 간첩이라 말이 천형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6신 : 16일 오후 6시20분]

'노동해방문학 사건' 이원혜씨 "편지나 일기장 읽어내려가며 조롱과 비아냥"


▲ '노동해방문학 사건'의 이원혜씨가 증언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네번째 증언자로 90년 '노동해방문학 사건'의 이원혜씨가 나섰다.

다음은 이씨의 증언 요지다.

"1990년 11월부터 1992년 12월까지 2년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 이른바 '사노맹' 조직 사건으로 복역했다. 당시 내가 있었던 곳은 사노맹의 대중조직이었던 노동해방문학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던 출판사와 노동해방문학실이었다. 노동해방문학실은 지역 노동자문예운동과 지역 문화운동을 조직하고 진보적 생각을 가진 여러 문인과 함께 다양한 창작활동을 했던 곳이다.

1990년 11월 3일 결혼했는데 열흘 뒤 안기부 직원들에 의해 남산 안기부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 조직사건 연루자들이 겪었던 내용이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국보법이 무슨 법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안기부에 끌려갈 때는 입구에서부터 고개를 숙이게 한다. 차 안에서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 숙이게 하고 양팔을 잡는다. 조사실에 도착하면 모두 군복 상의를 입힌다. 당시는 영장 없는 구금기간이 3일이고 3일 안에 구속영장이 떨어지지 않으면 석방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래서 대부분 3일 동안 단식과 진술거부를 하게 된다. 당시 구속영장 신청하기 위한 진술서를 쓰는데, 보통 '묵비권 행사', '답하지 않음'이라고 쓰인다.

나는 당시 '과연 이런 진술서 가지고도 구속영장 나올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장이 나오더라. 국보법이라는 법을 실행하고 운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에는 영장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 경찰서에서 유치인 수감신청을 하고 다시 안기부로 데려오게 된다. 그런데 원래 법적으로 유치는 유치장에서 하게 돼 있고 조사시간에만 안기부로 가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경찰서에서는 유치인 신청만 하고 나머지 기간들을 안기부에서 보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폭언과 폭행이 시작됐다.

방식은 뺨을 여러 차례 때리거나 쓰러지면 발로 짓밟거나 하는 건데 당시 안기부 수사관은 서너 명이 두 조가 돼 24시간 교대 근무를 했다. 당시 내가 있던 방에서는 담당 수사관이 아닌 나이가 많은 수사관들이 조사를 했다. 수사관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기 때문에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초기에 진술을 거부할 때에는 침대에 눕거나 의자에 앉지 못하게 한다. 세우고 있는 동안은 계속 폭언을 한다.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야전침대를 붙들고 누웠더니 침대 모두 부숴 치우더라.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압수수색을 해온 물건들이다. 보니 우리 집에 있는 내 거의 모든 짐을 갖고 왔더라 남편과 주고받았던 편지나 사적인 일기장까지 있었다. 사건과 관련 없는 내용들이었는데, 수사관들은 그것을 읽어가고 짚어가면서 조롱과 비아냥을 했다. 맞는 것보다 그런 인간적인 모멸감, 조롱과 멸시에 대한 분노가 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20일 정도를 지냈다.

선생님들이 겪은 일에 비하면 고문이라고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국보법이 한 사람을 가두고 법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인권에 대한 아무런 배려 없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신념을 조종해온 법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국보법이라는 법은 그물과도 같다. 예전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가권력, 사법권력이 그 그물을 던지면 누구든, 사실여부를 떠나 끝까지 조일 수 있는 법이다. 지금도 그런 법이 살아있다. 국보법이 폐지되는 날까지 이런 노력이 조금씩 진행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법이 폐지되는 날이 와서 수많은 조작사건들의 진상이 규명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5신 : 16일 오후 6시]

'재일동포 사건' 신귀영씨 "70일간 잠안재우기, 구타, 전기고문, 물고문..."


▲ '재일동포 사건'의 신귀영씨가 증언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세번째 증언자로 80년 '재일동포 사건'에 연루돼 피해를 입은 신귀영씨가 나섰다.

다음은 신씨의 증언 요지다.

"1937년 일본에서 출생했고, 45년 가족과 귀국했다. 원양어선 선원으로 근무하던 65년 일본에 살던 형님을 만났다. 그 어선이 일본 시모노세끼에 정박하는 사이 20년만에 형 신수영을 만날 수 있었다. 이후부터 79년 9월까지 배가 일본에 기항하면 자연스럽게 형을 만나고 통화하거나 집에 가서 식구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가족들의 대소사에 대한 축의금과 어머님께 드리는 형님 돈을 받아온 게 간첩행위로 단정돼 81년 6월 대법원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신춘석과 서성칠도 원양어선을 타고 일본 기항 중 친인척을 만나는 자리에서 신수영을 만났다는 이유로 간첩이 된다. 결국 이는 신수영이라는 조총련계 재일동포를 매개로 구성된 간첩단 사건인 셈이다.

1980년 3월 25일 부산시경 대공분실에 구속영장 없이 연행돼 78일 동안 불법구금 상태와 심한 고문 속에서 강제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받을 당시 나는 물론 그 집안 남자들은 거의 모두 붙들려 가서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67세 노인에서 3살짜리 어린애까지 20일간) 보안유지란 명분으로 감금당했다.

신춘석은 1980년 3월 24일 구속영장 없이 부산시경으로 불법연행되어 50여일 동안 잔인한 고문과 위협에 의해 마침내는 허위자백과 틀에 짜인 자술서를 쓰게 되었다. 이러한 허위자백과 불법수사는 생명을 끊는 최후의 순간에서나 볼 수 있는 배설을 세 번이나 하였고, 20여 일간 피고인은 걷지도 못한 채 앉은뱅이로 또는 등에 업혀 고문실과 조사실을 다녀야 했고, 의사와 간호사가 비상대기를 하는 상황에서 자백이 이루어졌다.

재일동포 간첩 사건이란?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은 신귀영씨를 비롯해 그의 가족인 성칠·춘석씨가 모두 1980년 2~3월 연행돼, 조총련 간부의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같은 해 귀영씨와 성칠씨에게 징역 15년이, 춘석씨에게는 10년형이 확정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94년과 99년 두 차례 무죄 취지로 재심이 청구돼 총 7차례의 심리에서 3차례의 재심개시결정(부산지법 2차례, 부산고법 1차례)과 4차례의 파기 및 기각(대법원 2차례, 부산고법 2차례)을 거쳐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그러나 귀영씨는 당시 부산시경 대공분실에 구속영장도 없이 연행돼 78일동안 불법구금 상태로 심한 고문으로 강제 자백을 했고, 춘석씨 또한 50여일동안 고문과 위협에 의해 허위자백에 의한 자술서를 써야 했다는 것이 이들의 얘기다. 성칠씨 또한 구타, 전기고문, 물고문, 발톱빼기 등의 고문을 70여일 동안 당하다 허위자백을 했다고 후일 밝혔다.
서성칠은 1980년 3월 7일 아침 7시에 부산시경에 구속영장 없이 연행되어 처음에는 일본에 있는 친족관계에 대하여 조사를 받다가 이후 신수영(사촌 처남)과의 관계를 추궁 당하며 갖가지 고문을 당하였다. 잠 안재우기 고문은 물론 구타, 전기고문, 물고문, 발톱빼기 고문 등을 70여일 동안 당하였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후의 순간이 옴을 느낀 그는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후일 밝혔다. 서성칠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1990년 대구 교도소에서 복역 중 사망했다.

1994년 11월 '조총련 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령을 내릴 만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신수영의 진술서를 확보해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또한 경찰의 불법감금과 고문에 의해 사건이 조작됐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1995년 7월 1·2심 재판부는 재심을 받아들였으나, 같은 해 11월 대법원은 이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되돌려보냈다. 새로 제출된 신수영씨 진술서만으로는 무죄를 인정할 만한 명백한 증거라고 볼 수 없고 관련 경찰관들의 고문, 감금행위 주장도 별도의 확정판결이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그래서 목격자 박 모씨가 고문으로 위증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다시금 재심을 청구했다. 2001년 8월 부산지방법원은 재심청구를 받아들였으나 부산고등법원은 재심결정을 다시 뒤집었다. 이어 대법원에 재항고했으나 지난 6월 대법원은 또다시 기각했다.

얼마 전 대법원에 가서 1인시위를 하는데 정의, 평등, 자유가 쓰여있더라. 무엇이 자유이고 무엇인 평등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헷갈린다. 정치인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마음대로 자주 말하는데… 진정한 자유는 사람을 함부로 헤치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나라에서 한 사람을 이렇게 간첩으로 몰 수 있는지… 참 헷갈릴 지경이다. 공안 사건에서 고문하고 기소하고 재판한 사람들은 자손 대대로 증오를 받을 것이다(청중들 박수).

1심 재판관 최종복씨는 지금 서초동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번 1인 시위하면서 KBS <시사투나잇> 제작진과 함께 찾아갔지만 도망가서 못 만났다."


[4신 : 16일 오후 6시]

'진도간첩단 사건' 석권호씨 "옷을 모두 벗기고 물고문을 시작했다"


▲ '진도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석달윤씨의 아들 권호씨가 80년 당시 사건을 보도한 일간지 기사를 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두번째 증언자는 지난 80년 '진도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복역한지 18년만에 98년 가석방돼 풀려난 석달윤씨 아들 권호씨.

다음은 권호씨의 증언 요지다.

진도간첩단 사건이란?

석달윤씨는 지난 80년 8월 21일 일명 '진도간첩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 6·25 당시 월북했다가 남파된 고종사촌 형인 박양민과 8차례에 걸쳐 접선하면서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후 98년 복역한지 18년만에 가석방돼 풀려났다.

석씨 또한 마찬가지로 연행 초기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에서 약 47일간에 걸쳐 각종 고문을 받아 허위진술을 했다고 고백한다.
"사실 나의 이야기가 아닌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정확하게 잘 전달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그러나 들었던 이야기와 그동안 빨갱이의 가족으로서, 간첩의 가족으로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겠다.

79년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들어섰던 80년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아버지는 안기부 직원들에 의해 영장도 없이 80년 8월 21일 연행됐다. 남산대공분실 168호로 끌려갔다. 연행된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친척 17명에 이른다. 전두환은 권력 안정화 위해서 간첩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10월 6일까지 47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옷을 모두 벗기고 수갑을 채우고 물고문을 시작했다. 2인 3교대로 잠 안재우고 고문했고 물고문을 자행했다. 그 물을 다시 빼내기 위해 배를 밟고 몸을 굴렸다. 전신을 두들겨 패고 볼펜 심지를 성기에 집어넣었다.

남파 간첩을 만났다는 자백을 강요했다. 거부하면 '죽어나가도 의사의 진단서 하나면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수사관이 말했다. 결국 아버지는 6.25 이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촌형과 군산과 진도 등지에서 8차례 접선한 것으로 허위 조작된 이른바 간첩이 되었다.

친척분 중 한 분은 고문을 받고 풀렸났지만 두 달만에 사망했다. 고모는 1년6개월 감옥생활을 했다. 1년간 면회도 할 수 없었다. 동아일보 81년 1월 20자에는 고정간첩 3개망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빨갱이로 간첩으로 몰려서 주변의 이웃들은 우리 가족을 마치 못본 것처럼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엄마와 나는 고구마만 먹으며 두 달 동안 살기도 했다. 학교에서 '빨갱이 새끼'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다(한동안 눈물을 흘림).

아버지는 81년 9월 22일 검사가 사형을 구형했고 판사가 무기징역에서 18년으로 감형 선고했다. 18년 세월을 감옥에서 고통받았고 98년 가석방됐다. 지금도 보안관찰법으로 일상 생활을 통제 속에서 살고 있다(다시 흐느끼며 움. 청중들 박수로 위로).

93년 고문을 자행한 수사관들을 고소했다. 94년 7월 검사는 87년 10월 공소시효가 이미 완료돼 조사를 못한다고 기각했다. 고문하고, 간첩으로 조작한 사람들에게 공소시효가 끝났을 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같이 간첩으로 몰려 피해를 받은 우리들에게 시효는 끝나지 않았다.

국보법을 폐지하지 못하면 역사의 진실을 찾지 못한다. 고문과 암흑의 세월을 만든 국보법은 마땅히 폐지돼야 한다."


[3신 : 16일 오후 5시30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전창일씨 "전기고문·물고문·폭행, 다 당했다"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전창일씨가 증언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첫번째 증언자로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피해를 입은 전창일씨가 나섰다.

다음은 전씨의 증언 요지이다.

"30년 전의 얘기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독재정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보다 강력한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유신헌법이라는 전대미문의 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다는 정치 명분을 내세워 민주주의를 말살했다.

그런데 이 유신헌법은 바로 자기가 영구집권을 보장받기 위한 제도였다. 당시 양식있는 사람들은 이 체제를 반대하는 인식에서, (가령) 일부 야당은 유신헌법을 개헌하기 위한 국민청원운동을 일으켰다. 그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장준하 선생이다.

그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로 청원운동자를 투옥했다. 그리고는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기본권인 청원운동을 벌인 이들에게 10년·12년·15년의 형벌을 가했다. 이때 몇 개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포착돼 박 정권이 또다시 탄압의 마수로 내건 게 긴급조치 4호다. 이는 1호보다 더 혹독했다.

그런데 이 학생운동의 배후를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서울과 영남 쪽에서 여러 인사들이 구속됐다. 이들은 1963년 박정희 정권의 군사쿠데타의 주 목적 중 하나인 한일협정 체결반대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었다. 당시 학생들을 지원하고 배후조종했다고 만든 사건이 '1차 인혁당' 사건이다. 그 사건은 이후 재판과정에서 조작된 것이 드러났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중형을 구형하도록 검찰에 압력을 가했지만 검사들이 거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지 않고 그보다 낮은 반공법을 적용, 주범이 2~3년, 1년 또는 무죄로 석방됐다. 그것이 1964~5년의 일이다.

소위 '2차 인혁당' 사건은 73~74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유신헌법 반대운동을 하려고 암약했던 것이 아니냐고 우리를 붙잡아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황당무계한 것은 북한 당국과 연결을 지어가며 학생을 충동질해 남한의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모의했다는 것으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는 이미 이 사건 수사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나도 당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닷새동안 수감돼 있다가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는데, 먼저 잡혀서 조사받던 사람들이 썼다는 소위 '자술서'를 몇 부 갖다 놓고 읽어보라고 하더라. 읽어보니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폭력혁명을 모의했다는 내용이 있더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란?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은 1차 인혁당 사건(1964)이 일어난지 10년 뒤인 1974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며 전창일씨를 비롯한 22명 체포, 국가보안법·긴급조치법·반공법위반 혐의로 기소한 사건이다.

당시 기소된 22명 중 8명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 일명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불린다.

이 사건은 ▲조직결성과 관련한 증거가 없고 ▲중앙정보부에서 경북도경 소속 경찰이 이 사건 피의자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몽둥이 찜질,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고문을 했었고 ▲피의자신문조서, 진술조서, 진술서의 장소가 중앙정보부가 아닌 서울중부서, 서울구치소로 허위 기재됐으며 ▲재판과정에서 변호인이 신청한 증인과 증거가 이유없이 기각됐다는 점 등을 볼 때 조작됐다는 의혹이 일었다.

이날 증언대회에 나온 전창일씨는 당시 이 사건으로 구속, 20년간 복역했다.
우리는 그런 모의를 한 바가 없다. '자술서를 믿을 수 없다, 본인의 대질을 요구한다'고 했더니 끝까지 대질을 안시키더라. 그리고 수사관들은 이런 요지로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사실이 아니니 쓸 수 없다, 나는 내 양심상 유신헌법을 지지할 수 없었고 이런 폭력행위는 한 사람이 없고 다른 사람도 그렇다'며 부인했더니 미리 준비한 참나무 각목으로 개 패듯 패는데, 하도 얻어 맞아 지금도 허리를 잘 쓰지 못한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지하실에 끌고 내려가서 팬티까지 모두 벗긴 뒤 손목까지 꼭 묶는다. 그런 뒤 머리에 타올을 씌우고 콧구멍에 물을 붓는다. 그러면 숨을 쉴 수가 없다. 말도 못하고 결국 기절할 때까지 그것을 반복한다. 그러면 완전히 뻗어 정신도 못 차리고 콘크리트 바닥에 나체로 누워있게 된다.

이 자리에는 아마 그런 고문 당해본 사람이 많을 거다. 기억하기도 싫은 그런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증언이므로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말한다.그렇게 고문을 당한 뒤 깨어나면 '차라리 죽던가 무의식 상태로 있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것을 반복해서 했는데도 자필서를 안 쓰면 전기고문을 한다.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에서는 전기고문을 안 당해본 사람은 있어도 폭행과 물고문은 다 당했다. 고문에 의해 날조된 것이다. 살아남고 죽지 않기 위해서는, 고문치사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조사관들이) 부르는 대로 (자술서를) 안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인혁당 조작사건(2차사건)'의 전말이다.

검사 앞에서 신문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검사니 좀 낫겠지 해서 검사에게 검사의 성함이나 알고 신문에 응하겠다고 하니 검사가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알 필요 없다고 하더라. 당시 수사관들도 우리가 보는 앞에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런 만큼 자기 신분을 속이며 범죄행위를 한 것이다.

그런데 검사가 취조하는데도 고문수사관이 옆에 둘 서 있다. 그래서 피의자가 그것은 고문에 의해 할 수 없이 쓴 것이라고 진실을 밝히게 되면 검사는 '왜 내 앞에서 거짓말하느냐'면서 수사관에게 눈짓을 한다. 그러면 수사관이 다시 데리고 가 고문한다. 이것은 검사가 수사관들에게 고문을 시키는 것이다. 말로는 하라고 안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다.

끌려나오면 피도 흘리고 그러면 '아니 왜 그랬어, 어디 갔다 왔는가'라고 말했다. 사람으로서는 못할 태도를 보인 것이다. 내가 징역 살고 나와보니 그 검사들이 다 암에 걸려 죽었다고 하더라(청중 "아이고, 시원해" "잘 됐네"). 당시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구나'하고 느껴지더라.

재판에서도 검찰이 제시한 공소장이 그대로 판결문으로 되풀이 됐다. 당시 철자법 틀린 것까지 공소장과 그대로더라.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 그대로 찍어서 내놓은 것이 판결문이었다.

이 억울한 사건은 지금 현재 사법부에 재심 청구를 해놓은 지 2년이 됐다. 현재 사법부의 판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또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에도 심의 신청을 해놓은 상태다."

▲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고문·용공조작 피해자 1차 증언대회'에서 청중들이 피해자들의 증언을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2신 : 16일 오후 5시2분]

증언대회 시작... 국회도서관 지하대회의실에 쏠린 눈


'국가보안법 고문·용공조작 피해자 1차 증언대회'가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이하 국민연대)주최로 16일 오후 4시부터 국회도서관 지하 대회의실에서 열리고 있다.

사회를 맡은 박래군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공동운영위원장은 "과거에 고문을 받아 고생했던 사람들의 절규가 다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며 "한나라당이 사상전향을 강요하며 색깔 마녀사냥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 국보법이 아직도 살아있는 법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고 밝혔다.

임기란 전 민가협 상임의장은 인사말에서 "다시 떠올리기도 싫고 치가 떨리는 기억을 되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과거 고문사건을 잘 모르는 젊은 분들에게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국보법으로 인해 안기부와 대공분실을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비참하게 살아왔다"며 "오늘의 자리가 국보법을 없어지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전창일(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20년간 복역), 신귀영(1980년 재일동포 관련 사건), 석권호(1980년 진도간첩단 사건 석달윤씨 아들), 이원혜(1990년 노동해방문학 사건), 김삼석(1993년 남매간첩단 사건)가 참석해 고문피해에 대해서 증언할 예정이다. 또한 박연철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이 참여해 과거 국보법 사건의 수사와 재판과정의 문제점에 대해서 발언할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는 150여명의 방청객이 찾아와 고문피해자 증언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1신 : 16일 낮 12시53분]

고문 피해자들 증언대회, 오늘 오후 4시부터 국회도서관


70∼90년대를 아우르는 이른바 '조작간첩'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거 공안기관에서 받았던 고문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는 16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지하 1층 대회의실에서 '국가보안법, 고문·용공조작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고 이른바 '조작간첩'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과거 국가보안법 사건수사와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고발할 계획이다.

이날 증언대회에는 일명 '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전창일씨), '80년 재일동포 관련 사건'(신귀영씨), '80년 진도 간첩단 사건'(석달윤씨 가족 권호씨), '90년 노동해방문학 사건'(이원혜씨), '93년 남매간첩단 사건'(김삼석씨) 등 주요 간첩사건 관련자들이 직접 나와 국보법과 공안기관에 의한 인권침해 사실을 증언한다.

특히 이번 대회는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의 '간첩암약설' 주장과 관련, 이철우 열린우리당 의원이 당시 수사과정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국보법 사건 연루자에 대한 공안기관의 고문 문제가 불거진 상황에서 열리는 것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한편, 증언대회에 앞서 국보법폐지국민연대는 "지난 56년간 사실상 헌법 위에 군림했던 국보법의 명맥은 반인권적 작태를 통해 유지됐다"며 "국보법이 적용된 사건은 어느 사건이건 체포에서부터 복역과정까지 늘 인권침해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국민연대는 "특히 70∼80년대 이른바 '조작간첩' 사건 관련자들은 60일∼180일간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고문을 당했고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 유일한 증거가 돼 십수년을 감옥살이 해야 했다"며 "고문 피해자들은 '고문→허위자백→반복→고문'을 거듭하다보니 '허위사실이 마치 진실인양 착각이 들 정도가 된다'고 증언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국민연대는 "이런 과정에서 왜곡·조작된 사건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되고 그 과정에서 안타까운 피해자들이 양산됐다"며 "이러한 관행이 단지 사법경찰, 옛 안기부, 옛 기무사뿐 아니라 인권수호기관이어야 할 검찰 및 사법부에 이르기까지 공통으로 나타나는 문제였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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