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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지난 4일 보도한 한승조 고려대 전 명예교수의 일본 시사월간지 <정론> 기고문 파문이 확산되는 가운데,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14일 최근 제기되고 있는 친일담론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친일지상주의'의 결과라는 글을 보내왔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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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적 친일지상주의, 우리 사회에 치명적"


1. 한승조 사태가 던지 두 문제: 친일 담론의 업그레이드와 친일 비판 담론의 수세성

3월 4일 <오마이뉴스>의 보도로 전 고려대 명예교수인 정치학자 한승조 노인(奴人? 老人?)의 일제식민지배 축복론을 접했을 때 처음 느낌은 충격이나 분노가 아니라 일종의 신기함이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즉, “아, 그랬었구나 그러면 그렇지. 지금까지 그 말 참느라 그동안 되게 고생했겠다.” 돌발적으로 보이는 한승조 노인의 이런 망언을 황대권 선생은 친일파의 “커밍아웃”이라고 표현했다. 황대권, 「커밍아웃」, 『한겨레』(2005. 3. 7. 월)


그리고 그가 일본 산께이신문 자매월간지인 <정론>에 기고한 글의 전문을 일본 산케이 신문의 자매지인 <정론>에 기고한 한승조, 「공산주의·좌파사상에 기인한 친일파 단죄의 어리석음 - 한일병합을 재평가하자」의 전문은 『오마이뉴스』(2005/03/04 오후 11:33)에서 접할 수 있다. 앞으로 진행되는 반박에서 한승조 인용은 모두 이 인터넷 번역에 의존한다.
찬찬히 들여다보고 나서 밀려온 두 번째 느낌 역시 충격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두 번째 느낌은 당혹감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나이들대로 든 노인네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정치 전공자라는 사람의 글인데, 그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 학문적 허약함과 이론적 부실함을 깔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가치감정에 있어서는 주위의 의견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고집스럽게 세우는 의사소통능력의 박약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도저히 제대로 학문한 사람이 제 정신을 갖고 쓴 것이라고 믿겨지지 않는 만큼, 정말 그를 극력 옹호하는 어떤 고대생의 말대로, 한승조 사태가 나자 가장 당혹한 것은 한 노인이 봉직했던 고려대의 후학들이었다.

사태 발생 직후 고대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게재되었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그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옹호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초중등생 조차도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다. … 그야말로 중증 정신병자가 아니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분노하고 있는 그 ''생각''이 한승조 교수의 진정한 ''생각''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한승조 교수는 글을 기고한 이후에도 그것은 소신에 의한 것이었다며 공론화되어야 한다고 오히려 더욱더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이것만 봐도 한승조 교수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무언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는 결코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여 그것에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발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가 말하려고 했던 진정한 진실은, 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다.

종교철학에서 다루는 문제로 ''악의 문제''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세상에 악이 도대체 왜 존재하냐는 것이다. 악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여러 이론이 있는데 많은 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신은 선을 더욱더 크게 확장시키고 드러내기 위해 악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다. 즉 악을 이용해서 인간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연단시켜 선에 대한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고 궁극적으로 영혼의 성숙 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그 어려움과 고난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비온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는 말이 이와 같은 뜻을 말한다.

한승조 교수의 말도 이와 같은 차원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지배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http://agorabbs1.media.daum.net/griffin/do/debate/read?bbsId= D104&articleId=1446&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BISMILLAH : 고대 게시판에서 한승조 옹호하는 글 퍼옵니다.) 혹시 다른 뜻이 있어 반어법을 구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글이 무엇보다 우선 사실 관계에 대한 추정에서부터 틀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야 했으나 비판의 최우선 전제, 즉 비판할 대상이 진실성과 진지성을 가진 것처럼 간주하면서 비판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변 규칙을 그 글에 적용해 주는 것이 못마땅해 비판을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런 어정쩡한 마음에 한참이나 어쩔 줄 몰랐다.

아무리 모든 문제를 토론과 대화로 처리해야 한다지만, 일본 우파의 정신자세를 그대로 유전받아 현존하는 국가의 정당성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고도 전혀 그런 점을 눈치채지 못하는 이런 자폐성 멘탈리티에 대해 그것을 반박한답시고 논증씩이나 하면서 학문적 예우를 해야 할 내 자신이 솔직히 말해 역겨웠다.

이 사태가 처음 불거진 3월 4일 한승조 노인은 <연합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글을 쓴 것에 대해 전혀 부끄러울 게 없다"며 "오히려 이 문제가 공론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했다. 유창재 기자, 「한승조, 소신과 변명 사이 ‘오락가락’」, 『오마이뉴스』(2005/03/05 오후 12:44 )

사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마치 불량 논문을 교정하듯이 반박하다보면 오히려 나의 비판보다는 그가 필요 이상으로 뜰지 모른다는 쓸데없는 노파심이 몇 자 적기 시작했던 반박문의 전송을 질질 끌게 만들었다.

내가 이리저리 쓸데없는 생각을 곱씹는 동안 한 노인의 망언에 대한 시민과 언론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수구 언론은 냉담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이런 망언을 한 한승조 노인을 적극 옹호하거나 최소한 노골적으로 엄호하는 제스추어를 보이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한 노인과 내내 보조를 맞추었던 일부 극우파 청년들도 즉각적으로 선을 긋고 나서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한 노인의 망언에 대한 국민적 혐오와 증오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다양했다.

그러면서도 한 노인에 대한 직접적 위해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동안의 민주화 과정에서 길러진 시민적 인내심덕분이었다. “가족까지 전부 일본으로 보내라”는 식의 험한 말에도 『오마이뉴스』에 전문 번역된 한승조, 앞의글에 대한 네티즌 리플, “21. 차라리 일본으로 가시요~~... 을지문덕 , 2005-03-05 13:10” 및 같은 인터넷신문의 김덕련 기자, 「한승조 명예교수,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 사임 」(005/03/06 오후 3:12)에 달린 아이디 산이좋아(chm258)의 댓글, “ 한승조는 일본으로보내어 우리한국에서는 한승조의 가족까지도 전부 보내야한다” [2005-03-06 21:06] 한승조 노인을 아예 한국에서 내쫓아버리자고 주장한 오프라인에서의 의견으로는 수필가 신영규 씨의 「한승조씨를 추방하라」, 『한겨레』(2005. 3. 11., 18면, 독자기자석, 발언대) 가 있다.

불구하고 이 ‘한승조족’(韓昇助族)도 우리가 부여안고 해결하고 극복해야 하는 우리 현실의 일부라는 정조는 그 모든 비판의 밑에 깔려 있는 정서적 공분모였다.

그러면서도 한승조 개인에 대한 압박이 늦춰지지는 않는 것같다. 사태가 발생하고 단 이틀만에 한 노인은 고려대 명예교수 자리를 던졌고(그런데 고려대는 내가 이 글을 마무리하는 3월 10일 현재 아직 그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네티즌과 일부 정치권에서는 1980년대 군부 정권이 대한민국 국가의 이름으로 그에게 수여한 세 개의 서훈을 문제 삼고 나섰다. 예전에도 이 사회의 어느 부분에선가 항시 잠복하면서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던 친일옹호론이 간헐적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는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승조 사태 이후 망설임과 개인적인 다망함으로 글을 마칠 수 없었던 나는 한승조 노인의 친일 담론 자체가 기존의 것들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런 업그레이드된 친일 담론에 대한 논변적 대응들이 시민적 공분에 담긴 비판적 직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는 것 같다는 두 가지 문제점 때문에 이 사태에 대한 나의 소견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2. 한승조 사태가 던진 문제(1): 한승조 망언 자체의 문제로서 친일담론의 업그레이드, 즉 친일지상주의와 세계화 시대의 친일론

한승조 망언은 기존의 친일담론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두 가지 주장을 내포한다.

[친일지상주의1] 그 중 하나는, 친일이야말로 식민지 당시의 현실이나 탈식민지 국면에서의 한국 현실을 감안할 때 가장 정당한 국가적 선택이었고 그렇지 않은 어떤 민족지향적 입장이나 행위도 잘못된 것이었다는, 단순 친일옹호론이 아닌, 친일지상주의이다.

(친일지상주의1-1) 우선 ‘친일이 정당했다’는 그의 주장을 들어보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천만다행이며 저주할 일이기보다는 도리어 축복이며 일본인들에게 고마워 해야할 사유는 될지언정 日政35년 동안 일본에게 저항하지 않고 협력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것 때문에 나무라고 규탄하거나 죄인취급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이 국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 중의 어느 한 나라에 合倂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에게 합방된 것은 “불행 중 다행” 또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만일 러시아에 合邦병탄되었더라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한국은 공산화를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스탈린이 집권하자 그는 1930년대에 그랬듯이 대규모의 民族移住政策(민족이주정책)을 강행하여 한국민들을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奧地(오지)로 移住시켜서마구 분산 수용하였을 것 같다.”

(친일지상주의1-2) 그러면서 ‘친일을 하지 않은 쪽은 부당했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그 근거는 대한민국과는 달리 철저하게 친일파를 숙청했다는 북한의 현실이다. 한 노인에 따르면, “친일파를 단죄해서 민족정기가 선 사회는 북한이며 그러지 못하여 혼탁하며 발전하지 못한 사회가 남한이라고 공산주의자나 좌파들은 일상적으로 주장해왔지만 그렇다면 북한이 결과적으로 남한보다도 훨씬 더 크게 성장 발전하였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지 못하고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났다면 그들 주장이 얼마나 부실하며 잘못된 기본전제 위에 서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친일청산' 주장은 중대한 역사왜곡이며 억지주장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친일지상주의1-3) 그리고 ‘친일은 식민지지배가 종식된 이후에도 한국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친일의 지속적 유익론이 친일지상주의의 대미를 장식한다. 즉 “일본은 과거 식민지 때 우리에게 그다지 큰 억압을 자행하지 않았으며”, 식민지 시절 이후에도 “한국인의 문명화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제는 삼일 운동 때도 스탈린보다는 훨씬 적은 인명을 살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일 양국의 인종적 또 문화적인 뿌리가 같았음으로 인하여 한국의 민족문화가 일제식민통치의 기간을 통해서 더욱 성장 발전 강화되었을망정 소실되거나 약화된 것이 없었다. 한국의 역사나 語文學 등 韓國學(한국학연구)연구의 기초를 세워준 것이 오히려 일본인 학자들과 그의 한국인 弟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영어의 sibling rivalry(어린 자매들 간의 경쟁의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인에 대하여는 무조건 지지 않으려는 경쟁의식을 갖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한국인들의 성장 발전의 의욕을 크게 자극하였다.”고도 주장한다.

[친일지상주의2.] 한승조 망언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이런 친일지상주의의 시간적 타당성을 미래로까지 무한 연장시켰다는 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한승조 노인은 바로 세계화 또는 탈산업주의 국면에서 친일의 진정한 정당성이 높이 평가받겠다는 세계화 시대의 친일론을 펴고 있다. 즉, “親日行爲는 산업화 단계 내지 민족주의 시대에는 罪惡視(죄악시)되며 반민족행위로 지목되어 비판 규탄의 표적이었다. 그러나 탈 산업사회(post industrial society) 또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에 와서는 친일행위가 도리어 애국애족행위로 인식되고 환영받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친일은 청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세계화 시대를 맞아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해 더욱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우리 민족의 역사적 유산이 된다.

지금까지 친일을 정당화한 논법에서 주종을 이루었던 것은 목숨을 연명하거나 자기 가족이나 조직을 지키는 등, 일제 당시 제국체제의 강압 아래서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친일적인 행위를 한 자락이라도 하지 않으면 못 배겼다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했을 때 나올 얘기가 있다면, 바로 우리 민족을 위해 친일 행위를 했다든지, 아니면 ― 소설가 복거일 씨가 대표적으로 제기한 논변으로 한 노인도 적극 끌어다 썼지만 ― 식민지 지배 당시 지배기구와 접촉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가운데 친일파와 비친일파를 가르는 기준이 애매하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정도의 친일옹호론쯤은 조소꺼리도 되지 못한 채 무시되어 왔다. 친일행위와 친일파에 대한 지금까지의 그 어떤 논의도 친일이나 친일행위가 가장 옳은 일이었으며, 따라서 반친일파가 부당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승조 망언에 대해 이 국가 시민들이 예전의 친일옹호론에 대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분노를 표한 것은 단지 그가 명문 고려대의 명예교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감히 일본 우파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고강도 친일론, 즉 친일지상주의를 펼쳤다는 데 있었다. 즉 오직 친일만이 정당했었고 또 현재에도 정당하며, 여기에 반하는 일체의 민족지향적 담론과 실천은 틀린 일이었다고 현란하게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네이버에 나온 'gwxr4033'라는 네티즌의 견해에 따르면, "잊을 만하면 일본인들이 '조선이 합방을 원했다'고 발광해 열받게 만들더니 이제는 한국의 교수라는 사람이 일본인들보다 더 심한 망언을 했다"고 한탄했다. 김태경/이한기 기자, 「네티즌들 분노 "그렇다면 독립운동가는 테러리스트냐?" 」, 『오마이뉴스』(2005/03/04 오전 11:21)

3. 한승조 사태가 던진 문제(2): 한승조 망언에 대한 대응의 문제

그런데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시민의 공분을 배경으로 많은 필진들이 여러 매체에서 한승조 노인의 <정론> 기고문에 가한 비판적 논변에는 한승조 논조에 대한 단호한 반박이나 연민과 냉소가 섞인 경멸, 그리고 친일옹호논변에 노출된 한국 사회의 취약함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논거를 구성하는 시각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한승조 비판 논변들은 우선 한 노인에 대한 전례 없는 시민적 공분의 직관적 내용을 담기에 미흡했을 뿐 아니라, 한 노인이 “나이들어 혼미한 정신” 속에서나마 제기한 구체적 논점과 증거들을 완벽하게 청산하기에도 불충분했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승조 사태에 대한 대응이 아직은 초기 단계이고, 대부분의 비판이 시민적 공분에 동참하는 가운데 자연발생적으로 나온 즉각적 반응이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하면서도 나는 앞으로 전개되기를 기대하는 보다 철저한 친일 인식과 그 극복을 위해 예비 작업을 하는 심정으로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제기되었던 한승조 비판의 몇 가지 문제를 짚어보겠다.

3.1. 일본 제국주의 부당성 논거의 보강: 일제야말로 최악의 강제였다는 보다 적극적인 논증의 필요성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한승조 비판의 가장 중요한 논거가 아직은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도덕적 비판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라들 사이의 관계는 평화와 정의의 원칙에 의해 설정되고 규제되어야 한다는 국제관계의 윤리규범은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국제법적 평가의 최고원칙임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우리 대한민국은 …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과 본문 제5조 ①항(“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은 국제관계에 있어 대한민국이 바로 이 원칙을 준수하겠다는 국가적 의지를 확고하게 천명하고 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인간으로서, 어떤 국가에 사는 국민이면서, 온전하게 판단할 능력을 갖춘 이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그 누구라도 부정하지 못할 바로 이 원칙에 의거하여 우리는, 그것이 일본에 의한 것이든, 러시아에 의한 것이든, 일체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지배는 부당하다는 판단을 내리며, 세계의 동료 인류에 대해 아주 떳떳하게 보편적인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전세계의 질서를 결정했던 서유럽 및 미국, 나아가 일본의 제국주의는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가 평화로워야 한다는 평화의 원칙과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관계가 정의롭게 규제되어야 한다는 정의의 원칙을 장기간 침해한 부당한 국가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국가행위가 적어도 규범력에 있어서는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은 제국주의 당시에도 이미 공인된 인식이었다.

따라서 일체의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부당성 판단은 역사에서 일회적으로 조성된 당시의 상황에 기대어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이므로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우익의 논리”에 비해 권태억, 「식민지 소년 한승조, 불쌍한 시대의 희생자. [긴급기고] 서울대 국사학과 권태억 교수가 본 '망언 파문'의 뿌리」, 『오마이뉴스』(2005/03/05 오후 3:18)

도덕적으로 명백하게 규범적 우위를 가진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영국을 비롯해 옛 제국주의가 급속히 쇠퇴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피압박 민족들의 ― 무장 또는 비무장 ― 저항이 가열됨으로써 식민지 통치 비용이 급속하게 불어난 결과 제국주의적인 물리적 지배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서방 제국주의 세력들이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더도 덜도 말고 제국주의 지배의 정당성 기반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각에 있었다. 누구보다 제국주의 식민 통치로 거의 300년간 혜택을 누려왔던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피압박 민족들의 저항 앞에서 도덕적 자신감을 상실하였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20세기 후반기에 들어 적어도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 설정에서 제국주의 담론이 더 이상 명분으로 통하지 못하는 인륜적 상황이 정착되었다. (물론 경제와 군사에서도 이런 상황이 확정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유독 일본 제국주의만이, 참으로 특이하게도, 그것이 붕괴될 때 서구 제국주의 붕괴의 전형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할 형세였다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과 대만을 포기할 때 양국의 정세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대만의 민중적?민족적 저항에 의해 타도된 것이 아니라 다른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끈질긴 무장 투쟁을 배경으로 하여 연합국인 미국과 중국의 승인 하에 조선 국내 침공 작전을 준비 중이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과 국내 지하 세력의 내응 계획이 종전 당시 군사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것은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일본 안팎의 일본 제국주의 옹호자들의 심리적 저변에는 ‘피압박민족의 저항에 패배당하지 않은 유일한 제국’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으며, 그 또 다른 한 측면에서는 ‘자발적으로 식민지나 속령을 포기한 전례가 없는 과거 제국주의 상황’을 자기정당화의 유력한 근거로 확보하고 있다는 망상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한승조 비판의 대부분의 논거는 일단 국제윤리에 강하게 의존하여 보편성을 끌어잡는 반면 제국주의 붕괴의 일반적 유형에 비추어 일본 제국주의 붕괴의 전반적 정당성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 부당성 논거가 보편적인 윤리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한승조 비판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아쉬움은 일제에 의한 한국 병탄 당시의 사실적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당시로서는 망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이 병탄하지 않았다고 해도 러시아가 삼켰을 것이라는 일본 우익들이 흔히 내세우는 논리”를 일단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하고 시작하는 전제설정의 소극성이다. 위의 같은 글.


일제 시민지 체제의 성립과 전개와 관련된 당시의 사실을 이렇게 소극적으로 미리 예단하게 되면 당시의 사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사실에 대한 이 정도의 인식만으로는 “한국이 국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 중의 어느 한 나라에 合倂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이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에게 합방된 것은 “불행 중 다행” 또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한승조 노인의 망언을 충분히 반박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한승조 노인의 말을 보다 근본적인 도덕 원칙에 의거하여 반박하기 위해 “설령 러시아로의 병합은 최악이라는 교수님 주장을 받아들이는” 대 바로 “그렇더라도 일본에 병합되었다는 ‘차악’이 곧 한국에게 축복을 준 ‘선’으로 둔갑될 수는 없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겠다. 김정환, 「한승조 교수 글에 대한 공개 반론」, 『한겨레』(2005. 3. 10.), 21면. <왜냐면>

하지만 이 경우 근본적 비판에 대한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사태 인식의 측면에서 러시아로의 병합이 과연 최악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의문의 공백을 틈타 한승조족이나 일본 극우파의 논리 일각이 친일옹호 담론의 한 구석에 다리를 걸칠 여지가 남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사태의 기술에 대한 용어와 개념의 선택도 사태의 객관적 진행과정과 부합하도록 극도의 신중을 기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그 뒤에 이어진 한일합방을 두고 “한국이 국권을 상실했다” 또는 “대한제국이 망했다”라고 기술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기술은 20세기 초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국권이 교체된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태에 즉하여 일어나 사태대로 기술하면 당시 한국은 “국권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국권을 상실당한 것”이다.

보다 넓은 맥락에서 당시 사태를 정확하게 조망되도록 하면, 당시 대한제국을 두고 “망할 수밖에 없었다”든지 “국권을 상실했다”는 표현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지 금방 인지할 수 있다. 즉 어떤 국가라도 알아서 망하거나 자기 국권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국가란 있을 수가 없다.

어떤 사회에서도 가장 강력한 권력체는 국가이며, 그런 국가가 알아서 망하는 법은 있을 수 없다. 국가는 그 어떤 경우에도 망해져야 망하는 것이지 저절로 망하는 법이 없다. 그 자체만으로 놓고 보면 “망할 수밖에 없는 국가”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 국가가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국가를 망할 수밖에 없게 만든 국가 안팎의 국가도전 요인들을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한승조 노인의 발언은 마치 망할 수밖에 없는 대한제국이 1) 러시아와 일본 둘 중의 한 나라를 골라서 망해줄 선택권을 행사한 듯한 인상을 주면서, 2) 더욱 가관인 것은, 사후 역사를 끌어들여 러시아보다 일본에 망해준 것이 당시 한국으로서는 올바른 길이었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망한 것이 고려가 조선에 망한 것이나 신라가 고려에 망한 것과 같은 차원에 놓고 기술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국주의 침탈의 일반적 운동양식을 전혀 모르고 하는 얘기이다. 왜냐하면 특정 국가, 가령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될 운명에 처해졌을 때 이미 인도는 선택의 여지없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게끔 되어 있었다. 당시 인도가 볼 때 포르투갈이나 프랑스보다 영국이 차라리 나아서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식민지가 된 월남이나 알제리도 그러했고,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위상을 바꾼 필리핀도 자신들이 선택해서 미국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제국주의 시대에 어떤 국가나 민족이 어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가 되느냐 여부는 철저하게 제국주의 열강들 각자의 자기 관심과 서로간의 상호 역학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런 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승조 노인은 대한제국이 원해서 일본을 선택하여 자발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기로 자청한 것처럼 역사를 묘사한다. 그런데 합방 당시의 사태에 대한 이런 식의 기술은 한승조 사태가 벌어진 직후 한일간의 국가 쟁점으로 불거져 나온 일본 극우파 역사교과서가 제시하는 한일합방의 기술 및 그 정당화 논리와 빼다 박은 듯이 똑같다.

따라서 일본에의 종속을 당연시하는 이 한일 극우파의 담론 유착은

― 1) 20세기 초 조선 상황에서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강점은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가해진 선택권 없는 강제였으며,
― 2) 그 이후 역사의 전개 과정으로 볼 때, 일제의 조선 강점은 러시아에 의한 강점보다 훨씬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충분한 근거가 있다

는 점이 입증되었을 경우에만 논변상 가장 타당하게 기각될 수 있을 것이다.

3.2. 탈제국주의 조건 아래에서의 친일멘탈리티의 지속적 배양 조건에 대한 의문: 단순한 일제 잔재가 아닌 자생적인 친일 후속 세대로서의 한승조 및 ‘우리 안의 친일’ 문제

그렇다면 해방 60년을 맞는 21세기 초의 대한민국에서 도대체 어떻게 바로 100년 전 을사늑약의 악몽이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재현될 수 있는 것인가? 한승조 사태가 터진 후 그 사태의 원인에 대한 진단이 사방에서 제기되었다.

가장 첫 번째로 제기되었으면서 평자들이 대체로 공감하는 한승조 사태의 진단은 현재 75세로서 바로 식민지 치하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거친 한승조 노인을 식민지 시대 당시의 친일파 및 친일 정책의 직접적인 끝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승조 노인은 ‘최후의 일제 잔재’이다. 그는 이제 수명을 다해가면서도 그런 운명에 단말마적으로 저항하는 우리 사회의 쇠락하는 친일파를 대변한다.

한승조 사태가 터진 바로 다음날 제기된 서울대 국사학과 권태억 교수의 「식민지 소년 한승조」에 대한 냉소적 연민이 섞인 비판이나 “그의 망언과 광태야말로 지금이라도 우리가 친일잔재를 청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역설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으며,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자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가열차게 치고 나온 민족문제연구소의 성명 「한승조 교수의 일제 찬양 망언과 광태를 강력 규탄한다」가 ‘현재의 한승조 노인’을 ‘과거 친일의 강력한 잔재’로 보는 한승조관을 가장 전형적으로 표출한다.

제국주의 본국의 부르주아와 식민지 부르주아의 차이를 더 할 나위 없이 예리하게 비교한 성공회대의 김동춘 선생도 “한승조 교수의 발언은 바로 탈식민화 물결에 대한 식민지 부르주아의 위기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한다. 김동춘, 「신부르주아를 기다리며」,『한겨레』(2005. 3. 12.), 19면.

분명히 한승조족, 특히 한승조 노인 개인의 활동 양식은 과거 일제의 잔재와 내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누차 지적되었지만 청소년기의 사회화 과정에서 작용한 성장 체험에서 해방후 분단형 건국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지배 세력으로서 사회 각 방면에서 기득권과 세력을 구축한 제2세대 친일파와의 인적 교류 관계 등일 일생에 걸쳐 누적되면서 가한 영향이 노년에 접어든 명문대 전직 교수의 발언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 사회에서 ‘현재’에 이르러 한승조로 표출된 그런 친일 성향 개인의 역정을 우리 현대사의 진행과정과 즉사실적으로 결부시켜 가면서 아주 정밀하게 한 번 추적해 보자.

한승조 씨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과 같이 한일합방 당시 제국 일본을 상대로 국가를 ‘제국주의에 직접 매도한’ 제1세대 친일파는 아니다.

나아가 한승조 씨는 3.1운동 이후 실시된 총독부의 문화정치나 1937년의 중일 전쟁 이후 수없이 변절하거나 아니면 식민지 교육 기관이나 보안 기관 및 군사 조직에서 ‘제국주의에 의해 직접 양성된’ 제2세대 친일파로서 ‘식민지형 근대적 엘리트 그룹’으로 분류되기에는 일제 당시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내가 보기에 참으로 기막힌 것은 식민지 소년 한승조의 친일 멘털리티는 제국주의 식민 통치가 끝나고 대한민국에 일제가 남기고 간 잔재물들이 한국 사회와 국가 안에서 현재적으로 확대재생산되는 가운데 ‘제국의 부재 아래 포스트임페리알리즘(탈제국주의) 국면에 이르러 한국 사회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제3세대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속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한승조 개인은 단순히 제국주의 시대의 은혜를 직접 입은 일제 잔재가 아니라 제국주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사후에 본격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친일 의식을 갖게 된 자생적 친일파에 속하며, 사실 이것이 우리의 문제를 더욱 치명적으로 만든다.

우리 국가와 사회의 어떤 부분이 일본 제국주의 통치가 종식된 이 국가 안에서 일본 없는 친일파를 자생적으로 온존시키면서 급기야 일본 극우보다 더 극심한 식민지배축복론, 친일지상주의를 고창하게 만들었는가?

한승조 현상을 과거의 일로 간주하여 일제잔재청산 문제로만 접근하면 ‘후속 친일파’를 계속 온존시키고 양산시킬 잠재성이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 자체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결과가 된다.

한승조 비판으로 제기된 기왕의 논지들에 전폭적으로 찬성하면서도 필자는 한승조 현상은 ‘현재 한국’(contemporary Corea)의 자화상이라는 점도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생적 친일파를 만들어온 ‘우리 안의 친일’ 부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투시하는 작업이야말로 ‘친일의 현재화’에 근본적으로 대처하는 관점이 아닐까?

이상과 같은 두 가지 큰 문제점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까지의 한승조 비판을 보강하는 입장에서 필자의 소견을 다음과 같이 적어본다.

4. 일제식민지배 최악론: 일제 지배 차악론 및 최선론의 반증

우리 국가와 민족의 장기 발전 추세를 사후적으로 조망하는 입장에서 볼 때 한승조 노인의 견해와는 정반대로 필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야말로 우리에게 그 어떤 선택의 여지없이 덮쳐온 최악의 운명이었다는 것을 자신있게 입증할 수 있다고 본다.

4.1.일제 강점의 무대안성: 권력숭배주의의 은폐

무엇보다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의 강점이야말로 당시 러시아도 저지할 수 없었던 강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들으면 “한국이 국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 중의 어느 한 나라에 合倂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식의 말은 아는 사람이 들려주는 참으로 그럴 듯한 진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상황의 불가피함을 주장하려고 했으면 끝까지 주장했어야 했고 또 그것이 당시 사태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다.

당시 상황은 결코 “일본과 러시아 중의 어느 한 나라에 合倂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오직 일본에게 合倂당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러일전쟁 중 만주와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의 육해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러시아 국내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나 제정이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갔던 1905년 초까지의 상황을 보면 러시아가 한국을 합병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었다.

이 점은 이미 한승조 사태가 난지 며칠 되지 않아 즉각 지적되었다. 3월 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교수는 한승조 노인의 “악성 망발”의 논리적 모순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한 교수의 주장 가운데 논리적 모순은 크게 두가지다. 한 교수는 '일본이 병합하지 않았으면 러시아가 병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 러시아 정세와 국제관계를 모르고 한 무지한 망언이다. 당시 러시아는 독일과 폴란드와 군사적으로 대치한 상황이어서 조선을 점령할 처지가 아니었고 의지도 없었다. 1903년 7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파블로프 조선주재공사 등이 참석한 여순회의에서 북만주는 계속 점령하되 조선의 북부(북한) 점령은 러시아에 이득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호진 기자, 「"친일사대 지식인,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 [인터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진단하는 '한승조 발언' 」, 『오마이뉴스』(2005/03/07 오후 12:39)


그러면서도 친일옹호론자들은 한국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는 일본 극우파의 상투적인 주장에 논리적으로 완전히 매료된 듯이 보인다. 여론의 뭇매를 맞는 한승조 노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논전의 바다에 뛰어든 지만원 씨는 3월 10일 CBS TV의 시사프로 <시사저널>에서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와 벌인 논쟁에서 한승조 노인과 똑같은 주장을 폈다.

“가장 먼저 맞붙은 주제는 한승조가 일본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면 러시아 식민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됐던 '러일 전쟁' 부분. 지 소장은 이와 관련, "한승조 교수 글 전체를 두고 봐야 한다"며 "러시아에 먹혔으면 1917년 혁명 때 수천명이 죽고 분산정책으로 오지로 끌려갔을 것이며 해방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진 교수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겨 아시아에 공산주가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는 얘기는 '일본이 아시아를 구원했다'는 일본 파시스트들의 생각"이라고 반박했다.”김하원 기자, 「지만원, "김구는 빈 라덴. 얻은 게 뭐냐". 지만원-진중권 '정면격돌', 진중권 '지만원 친일론' 초토화 」, 『PRESSIAN』(http://www.pressian.com 2005-03-10 오후 6:48:48)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의 가정에 입각한 한일 극우파의 일제지배 행운론이 안고 있는 논리적 부당성의 치명적 약점이 드러난다. 진중권 교수가 예리하게 지적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진중권 교수)는 이어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라며 "예컨대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안 터뜨렸으면 일본 본토까지 전쟁이 확산되고, 수 천만 명이 죽어 일본에 불행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원자폭탄이 아니라 원자복탄이라 부르자'라고 말하면 말이 되겠는가"라고 지 소장의 주장의 비논리성을 꼬집었다.” 위의 같은 글. 이 토론이 있은 다음 날인 3월 11일 아침 7시20분 MBC에서 방송하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진중권 교수의 ‘원자복탄’(原子福彈) 발언을 ‘오늘의 말, 말, 말’로 내보냈다.

이런 상황을 완전히 묻어두고 한승조 노인은 마치 당시 조선이 러시아나 일본 중 합방당할 상대를 고를 수 있기나 했었던 것처럼 러시아를 얘기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그 뒤에 오는 스탈린의 학정과 일제 통치를 독자에게 비교시켜 일제 통치의 야만성을 상대적으로 덜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논리적 잔꾀인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가정하는 한승조 노인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백번 수긍하더라도 그 가치감정이 참으로 박약하다는 것은 피할 수 없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일본과 러시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합방당할 수 있었던 상황이고, 그 어떤 쪽에도 합방당하지 않을 운명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합방 그 자체가 강제로 되는 한에도 우리 쪽에서 합방 그 자체를 정당한 것으로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저항’이라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쪽에 의해서든 제국주의에 의한 일체의 합방 그 자체에 동조하지 않는 것은, 설사 어떤 경로로든 합방을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도, 합방에 저항하는 가장 올바른 태도로 남는다. 타자에 의한 합방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타자에 무조건적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가 나의 ‘영토’를 부당하게 ‘합방’하더라도 나의 ‘의견’의 ‘합의’를 정당하게 갖고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의 의무에 속한다. 한승조 노인에 대한 전에 없는 분노는, 합방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권력이 있다면 그 권력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그 파렴치한 권력 숭배에 대한 혐오가 친일에 대한 증오에 더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여론은 권력숭배주의야말로 친일정당화론이 일반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친일멘털리티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임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4.2. ‘핀란드-혁명 러시아’ 반증: 제국주의 정당성 기반의 붕괴를 알리는 효시

그러나 한승조 노인의 이른바 역사 인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은 그가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내세운 다음 논거이다.

한승조 노인에 따르면 한국이 “만일 러시아에 合邦병탄되었더라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한국은 공산화를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스탈린이 집권하자 그는 1930년대에 그랬듯이 대규모의 民族移住政策(민족이주정책)을 강행하여 한국민들을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奧地(오지)로 移住시켜서마구 분산 수용하였을 것 같다.”고 한다. 듣고 보면 참으로 그럴 듯한 얘기이다. 그런데 참으로 연소한 내가 감히 한승조 노인의 학문적 자질을 의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이 구절에 따르면 러시아에 합방된 모든 나라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자동적으로 전부 공산화되어야 했다. 그 말은 곧 러시아의 합방국은 적색 식민지가 된다는 뜻이다. 한승조 노인 식의 논법을 좀 거들어주면, 러시아 혁명 이후 당시 전세계에 분포하고 있던 식민지 민족들은 러시아에는 얼씬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 반대였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이후 레닌을 지도자로 한 혁명 러시아는 전세계 피압박 민족의 횃불로 등장하였고, 모든 식민지 민족 운동의 지도자들은 어떤 경로로든 러시아의 지원을 얻으려고 애썼다. 한국의 경우도 바로 이 때 이동휘를 비롯한 비타협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주도로 시베리아에서 처음으로 고려공산당이 결성된다.

당시 한국에 산업 노동자가 몇이나 있어서 공산당이 조직되었겠는가? 그리고 무엇을 보고 당시 한국 민족 운동의 지도자들이 제정 러시아는 믿지 않았으면서도 공산주의를 추구한 혁명 러시아는 믿으려고 했는가?

문제는 핀란드였다.

1809년 이래 핀란드는 ‘만민감옥’(萬民監獄)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민족과 인종들을 정복하여 철권으로 통치하고 있던 차르 치하 러시아 제국의 한 공령(公領)이었다. 본래 18세기에 인근 스웨덴 왕국의 속령이었던 핀란드는 스웨덴 왕정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짜르의 힘을 빌었다. 제국 러시아의 핀란드 통치는 상당히 온정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제국주의 지배의 가혹한 비판자인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핀란드와 짜르 러시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880년대 러시아의 동화정책이 반러시아 감정을 조장할 때까지 핀란드인은 19세기 내내 짜르에게 충성했다. 로마노프가에 대한 기념물이 정작 러시아 안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반면, 해방자 짜르로 불리는 알렉산더 2세의 동상은 헬싱키의 주광장에 여전히 버티고 서 있다.” 에릭 홉스봄,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 강명세 옮김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3. 2., 초판6쇄/1994. 4., 초판1쇄), 118쪽.


그러나 19세기 말에 제정의 압박도가 심해진 상태에서 핀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러시아의 제국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번에는 또 다른 제국이었던 독일의 힘을 빌려 독립을 구하고자 했다. 바로 이 때 핀란드 독립의 절호의 찬스가 왔다. 그것은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이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성공하고서도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던 게렌스키 정권을 10월 혁명으로 타도한 레닌의 볼세비키 정권은 러시아 제국의 ‘만민감옥’에서 갇혀 있던 피압박 민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족문제담당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때 인민위원장이 스탈린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핀란드는 바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소련의 민족 문제를 다년간 취재했던 독일 언론인 에버하트 베크헤른에 따르면, “방금 장악한 권력과 충만한 이상으로 도취되어 있던” 당시 러시아의 젊은 소비에트 정부는 10월 혁명이 성공하여 정부 권력을 장악하고 딱 1주일 뒤인 1917년 11월 15일 최우선 혁명 정책 중의 하나로 「러시아 제민족 권리 선언」을 선포하였다. “볼세비키들은 처음부터 민족문제를 자기들 정책의 중점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볼세비키들은 비러시아계 민족들을 지원할 방도를 모색하였으며, 바로 자신들이 그 민족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볼세비키 권력 자체가 매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민족선언에 담긴 기본 원칙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 러시아 내의 모든 민족들의 평등과 주권
― 러시아의 모든 민족들은 자유로운 민족자결권을 갖는다. 러시아 내의 제 민족은 러시아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
― 특정 민족 또는 국가종교에 부여된 우월권 또는 침해조치는 폐기된다.(이 때 우월권을 부여받은 특정 민족은 러시아 민족이고, 특정 종교는 러시아 정교회였다.)
― 러시아 내의 모든 소수 민족과 종족집단들은 자유로이 자기 발전을 모색할 수 있다. Eberhard Beckherrn, Pulverfaß Sowjetunion. Der Nationalitatenkonflikt und seine Ursachen (Munchen Knaur, Sep. 1990), 19쪽.

따라서 볼세비키 혁명 정부는 핀란드가 독립을 선언하자 그 달을 넘기지 않고 지체 없이 핀란드의 독립을 승인했다. 레닌이 핀란드의 분리독립을 허용한 전후 사정에 대한 기술로는 홉스봄, 앞의 책, 212쪽 참조.
1917년 12월 31일 핀란드는 10월 혁명 성공 두 달을 갓 넘기면서 100년을 기다리던 독립을 선포하였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레닌의 동상도 아직 핀란드의 몇 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레닌은 핀란드 독립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한승조 노인이 마구 불지른 대로 역사를 놓고 마음껏 상상해 보자.

만약 한국이 당시 제정 러시아에 합병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제국주의 국가들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혁명 러시아는 당장의 위협이 되지 않는 한 통제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극동의 반도국 정도는 국제적 선전을 위해서도 풀어주지 않았을까? 핀란드 만을 사이에 두고 당시 러시아 수도였던 페테르스부르크와 빤히 바라보는 위치에 있으며 100년 이상 합병하고 있던 바로 건너편 핀란드도 풀어주는 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919년의 삼일독립운동이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필요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왜 필요 이상인가 하면, 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세계 제1차 대전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1902년 일본의 카쓰라 외상과 미국의 태프트 국무장관 사이의 밀약에 의해 미국의 우선권이 보장된 필리핀이 독립한 것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근 반 세기에 걸친 호세 리잘 이래의 오랜 독립 투쟁과 2차 대전 당시 대일 전쟁에 미국에 협력한 덕분이었다.) 따라서 제1차 세계 당시 승전국이었던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정말 바랄 수 없던 것을 바라면서 일본 헌병의 총칼 앞에 뛰어든 셈이었다.

그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베르사이유 회의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이 선언되기 이전에 이미 위와 같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실천’한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단지 사회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각종 방식의 적극적인 민족 독립 운동들이 다양하게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필요 이하로’ 잘 모르고 있다. 왜 필요 이하인가 하면, 바로 자기 식민지와 땅을 맞대고 있는 두만강 건너편 러시아에 독립운동 근거지가 형성되는 것을 두려워 한 제국 일본이 반공을 위한 각종 탄압 정책과 민족 분열 공작을 아주 본격적으로 실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족 분단의 씨앗을 본격적으로 배태시킨 것이 바로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라는 것이 바로 레닌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연합국측의 반응이었다는 점이다. 즉 주로 제국주의 국가들이었던 1차 대전 당시의 연합국들은 중부 및 동부 유럽에 걸친 거대한 다민족 제국들,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터키가 무너지자 이들 패전국의 민족들이 러시아 혁명으로 촉발된 사회혁명 및 국제적으로는 혁명 러시아 진영에 가담하는 것을 예방할 필요가 있었다. 위의 책, 172쪽.

따라서 한승조 노인이 설정해준 역사적 상상의 권리에 따라 1917년 러시아 혁명 상황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는 러시아에 병합당했던 것이 독립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아니면 말 일이다! 어차피 상상 게임 아닌가.)

그리고 이 때 독립을 얻었으면 그 독립이 영구적이었을 것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이번에 문제는 핀란드와 스탈린의 제2라운드 조우였다.

1939년 9월 히틀러와 독소 비밀조약을 근거로 폴란드를 양분한 스탈린은 독일에 대한 불안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레닌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핀란드에 카렐리안 섬의 해군기지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핀란드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과 독일에 대한 두려움 및 은근한 의존감에 그 요청을 거부했다.

격분한 스탈린이 바로 공격을 개시하면서 핀란드군이 무너지고 결국 핀란드의 요청으로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조약이 성사되었다. 그 결과 핀란드는 핀란드 동남부의 상당 지역을 할양하고 핀란드 최대 항구인 항코항을 30년간 소련에 임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 전면 공격이 개시되면서 상황을 근본적으로 오판한 핀란드 정부는 독일군 승전 상황에 편승하여 소련을 공격하는 데 가담하였다. 1941년에서 1944년까지 소련을 상대로 상당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핀란드 정부는 곧 실책을 깨달았다. 결국 핀란드 정부는 1940년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이행하고 상당한 영토적 양보를 하면서 2차 대전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서둘러 소련과의 관계를 재정리하였다.

결국 핀란드는 자체의 현명한 판단력 덕분에 제2차대전 패전국 반열에 끼는 운명을 간신히 모면하였다. 그리고 스탈린은 핀란드를 굴복시키기는 했지만, 핀란드의 독립을 완전히 몰수할 수는 없었으며, 공산화는 더더구나 추진하지 못하였다. 스탈린 때에 이르러 소련은 차르 시절에 확보했던 모든 민족과 영토를 다시 점거하긴 했지만 1920년대의 혁명기 동안 독립을 허용한 핀란드와 폴란드만큼은 다시 편입시킬 수 없었다. 핀란드와 폴란드의 경우에 대해서도 같은 쪽 참조,
즉 독립 선언의 기득권이 국제 정치에서 elk방면으로 실효적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만약 조선도 제1차대전 당시 러시아 식민지였다면 볼세비키 혁명기였던 1919년 이전에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독립을 허용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1차 대전 당시 볼세비키 혁명을 통해 연합국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조선이 승전국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에 입각해 독립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연합국의 영향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레닌의 독자적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이 즉각 독립할 확률이 훨씬 높았다.

따라서 러시아에 합병된 나라라면 1917년 이후 전부 공산화되었으리라는 한승조 노인의 역사적 상상력은 사실상 청년 시절부터 내면화한 공산당 공포증이 되살아난 반공 치매증의 발병임이 확실해졌다. 20세기 전반기에 일찌감치 독립한 핀란드는 그 짧은 기간 동안 축적한 국가적 역량으로 소련을 상대할 물리적, 지적 자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바로 소련의 코 앞에서 국가적 번영을 구가하였다고 현재에는 핀란드 모델이라고 불릴 만큼 지속적인 발전을 보이면서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는 강소국이 되었다.

100년 동안 러시아의 식민지 아니 속국이었던 핀란드의 현재 사정은 어느모로 보나 단 36년 동안 일본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보다 훨씬 낫다고 평가된다. 이 핀란드의 예를 보고도 한국이 러시아보다 일본에 병합된 것이 다행이었다고 계속 우길 것인가?

4.3. 스탈린의 ‘고려인 이주 정책’의 원흉은 누구인가? : 박두하는 일-소 전쟁의 희생자들

그렇다면 “스탈린이 집권하자 그는 1930년대에 그랬듯이 대규모의 民族移住政策(민족이주정책)을 강행하여 한국민들을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奧地(오지)로 移住시켜서마구 분산 수용하였을 것 같다.”는 한승조 노인의 또 다른 상상은 어떠할까?

이 구절을 쓸 때 한승조 노인은 스탈린 시대의 역사를 한 번쯤은 들춰보고 정확하게 연대를 확인하고 스탈린의 무지막지한 민족추방정책의 연원을 다시 한 번 짚어 봤어야 했다.

스탈린은 언제 한국인들을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의 오지로 분산 수용하였을까? 그 때 분산 수용된 한국인들은 어디에 살던 누구였을까? 무엇 때문에 그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그런 무지막지한 정책을 강행했을까?

스탈린이 고려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를 단행할 당시 소련 영내의 조선인 수는 약 47만으로 집계된다. 이 때 강제 이주의 대상이 된 고려인은 주로 두만강과 접경하고 있던 연해주 지방에 거주하던 15만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그야말로 한 밤중에 들이닥친 적군(赤軍)의 총칼에 떠밀려 세간도 챙기지 못한 채 제대로 옷도 입지 못하고 무리지어 기차에 태워진 채 며칠을 끝도 없이 가다가 중앙아시아 초원 한복판에 내동댕이처지는 모진 고초를 당한 연유가 기막히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만주를 석권하면서 소만(蘇滿)국경에 도달했다. 소련과의 전쟁은 거의 불가피하게 보였고, 의심 많은 스탈린으로서는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하여 전쟁 수행에 방해될 요인을 미리 제거하는 것이 상책으로 보였다. 이런 그의 눈에 연해주에 거주하는 15만 고려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 고려인은 1905년 러일 전쟁 때 조선 영내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점령지역을 벗어나 시베리아를 바라보고 이주한 피난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소련 당국으로서는 이들의 생김새가 일본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독일과의 전쟁을 예상하던 스탈린은 역시 독일과 협력할 가능성이 있던 민족들에 대해서도 대규모 추방정책을 실시하였다. 1941년 8월 볼가강 유역에 오랜 연고가 있던 독일인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38만이 역시 시베리아도 강제 이주당했다. 1944년 2월에는 40만의 체첸인들이 역시 독일군에 부역할 것이라는 혐의를 받고 고향에서 뿌리뽑혔다.

어쨌든 우랄 산맥 서쪽에서 약 120만 정도의 10개 소수민족들이 강제 이주 내지 분산을 당하는 동안 우랄 산맥 동쪽에서 이런 기막힌 고초를 겪은 민족은 오직 고려인뿐이었다. 이유는 바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소련이들에게 일본인으로 취급당했고, 일본의 스파이가 침투할 경우 은신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잠복지로 보였다. 즉 조선 주둔 일본군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소련군이 볼 때 소련 영내의 조선인은 자신들의 등뒤에 도사리고 있는 “위장 일본인”(verkappte Japaner)이었다. 그런데 정작 소련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시작한 것은 일본군이 연합국에 항복하기 겨우 보름 전이었다. 졸지에 연고지에서 추방당한 고려인들은 “일본-소련의 정치적 대결의 희생”이었다.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정책에 대한 서술 역시 Beckherrn, 앞의 책, 237~242쪽에 의거했다. 이 책은 러시아 내 각 민족 중에서 연해주 고려인뿐만 아니라 일제 시대 광부로 왔다 사할린에 잔류한 한국인에 대해서도 눈을 떼지 않았는데, 고려인 문제야말로 냉전기동안 그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을 비롯해 그 누구에 의해서도 기억되지 않은 “망각된 문제”였다고 단정하고 있다.


한승조 노인은 마치 스탈린이 농업 집단화 정책에서 보여준 학정의 연장선 위에서 고려인들을 추방한 것처럼 서술하는데, 고려인에 대한 강제 추방에 일본 제국주의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감쪽같이 은폐하고 있다. 알고 그랬다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을 상대로 마음놓고 사기를 친 것이고, 모르고 그랬다면 알지도 못하고 전문가 행세를 한 것이다.

4.4. 일제 폭정의 상대화: 스탈린의 숙청 정책과의 편향적 비교

또한 한승조 노인은 “일본은 과거 식민지 때 우리에게 그다지 큰 억압을 자행하지 않았으며, 식민지 시절 이후에도 한국인의 문명화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고 단언한다.

(1) 한승조 노인이 일제 식민지체제가 그다지 억압적이지 않았다고 보는 첫 번째 증거는 일본이 삼일운동 때 살상한 독립운동자들의 숫자가 스탈린이 농업 집단화를 추진하는 과정에 희생된 소련 국민들의 숫자보다 적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의 틀 안에서 생산력을 급증시키기 위해 조급하게 서둔 농업 집단화 정책이 러시아 농업의 인적 기반을 잠식해버릴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야기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비단 농업집단화뿐만 아니라 각종 정치적 숙청에 의한 강제노동수용소 운영, 정치적 테러, 내전에 준하는 분쟁, 그리고 독일과의 전쟁 등, 스탈린 시대에 각종 원인으로 사상된 소련 국민의 수는 최소 8백만에서 최대 2천만까지 엄청난 규모로 추정된다.

한승조 노인은 바로 그런 공산당의 작태와 비교해서 일제가 자행한 악행의 희생자 수가 “불행 중 다행”으로 훨씬 적으며, 바로 그 상태가 당시로서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바랄 수 없는 조건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최선의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그런데 이왕 일본에 대해 다행함을 느끼는 비교치로서 소련의 예를 댈 바에야 그 다행함의 크기를 더 키우려면 차라리 아메리카 인디언의 예를 드는 것이 더 낫다.

1492년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를 찾았을 당시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인디언 수는 5천만 정도로 추산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5백여년이 지난 현재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수는 50만이 넘지 않는 것으로 집계된다. 단 5백년 동안에 100분의 1로 줄어든 인디언에 비하면 우리 한민족을 2천만이나 남겨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보통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보다 통치의 질이 훨씬 나은 것으로 평가되는 미국의 질서 안에서 인디언 인구가 100분의 1로 줄어든 반면 일본 제국주의 통치 안에서 우리 민족의 인구가 어쨌든 증가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본의 두터운 호의와 제국 통치의 탁월함 덕분인가?

(2)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승조 노인이 일본이 “식민지 시절 이후에도 한국인의 문명화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고 단언하는 이유가 너무나 유치하다. 한 마디로 ‘신판 내선일체론’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논거는 “한일 양국의 인종적 또 문화적인 뿌리가 같았음”에서 찾아진다. 한 마디로 일본과 한국의 인종과 문화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일본 통치 기간 동안, 일본이 성취한 각종 발전성과를 아주 용이하게 전달받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발전이라는 것을 마치 ‘일본이라는 거대 실체’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한국의 발전을 위해 한국인에게 진심으로 실현시켜 주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가 논의의 끝에 아주 자연스럽게 튀어나는 것은 한승조 노인의 의식에 ‘일본이라는 것’(the Japan)이 전혀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인격적 자립성을 갖고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한승조 노인의 의식이 ‘일본이라는 것’과 고도로 자발적인 교감을 나누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정도로 자발적 교감이 가능한 상태라면 그 교감의 상대자에 대해 인격적 일체감과 의무감, 그리고 그런 것을 바탕으로 한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확신도 가능하다.

4.5. 친일 면죄부 북한?

친일을 옹호하는 자들이 끝까지 버티다가 논리적 기력이 다하면 마지막으로 빼드는 카드가 있다. 현재 북한이 처한 부정적 상황은 친일파에게 만능 면죄부이다. 한승조 노인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그는 친일파를 단죄해서 민족정기가 선 사회가 북한이라고 한다면 북한이 결과적으로 남한보다도 훨씬 더 크게 성장 발전하였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북한을 빌미로 하여 친일 청산 주장을 조롱하거나 상대화시키는 언변은 친일청산에 반대하는 이들의 상투적 논법이 되고 있는데 최근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2005년 2월 18일 한나라당 주요당직자 회의에서 광복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인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을 두고 한 다음의 발언이다.

“강만길 공동위원장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일본군이 정권을 잡아 과거 청산이 안됐다라고 했는데 뒤집어 말하자면 독립군 활동을 했던 사람이 정권을 잡아서 과거 청산을 잘했다는 북한은 지금 어떤 모습인지 반문하고 싶다. 또 강만길 공동위원장 말씀 중에 군사 구테타로 정권을 잡아서 역사적인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지금 정통성 수립을 위해서 경제 건설에 급급했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뒤집어서 보자면 정통성도 바로 되고 자주 노선을 외쳤다는 북한은 경제 건설에 급급하지 않아서 오늘날 국민의 삶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런 점들이 무조건 부정한다고 역사는 아니다. 올바른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손병관 기자, 「심재철 의원 "내가 언제 강만길 총장에게 막말했나" <한겨레>·<데일리서프> 보도에 강하게 항의 」, 『오마이뉴스』(2005. 2. 21 오후 12:13)에 실린 심 의원의 2월 18일 발언 전문 중에서

그런데 한승조 노인은 북한을 단지 친일 면죄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친일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단죄하는 증거로 삼는다. 그에 따르면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되지 못했다면 친일파 청산 주장이 “얼마나 부실하며 잘못된 기본전제 위에 서있음을 증명한 것”으로서 “결론적으로 '친일청산' 주장은 중대한 역사왜곡이며 억지주장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일의 면죄부나 반친일에 대한 단죄용으로 북한을 내걸기 이전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점이 몇 가지 있다.

무엇보다 이런 이들은 북한의 부정적 행태를 친일청산거부의 핑계로 남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이 마치 친일 잔재를 청산했기 때문에 발전을 하지 못한 것처럼 잘못된 인과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북한의 예를 오용한다. 남의 잘못을 합리화의 근거로 대는 것은 가장 야비한 도덕적 실책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서 친일 청산 문제에서 북한 논법을 쓰는 이들은 자기 역사의 부정적인 과거 행태를 척결함으로써 사회적 발전을 달성한 또다른 국가들의 사례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 아주 편향된 주장을 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나 독일이 나치즘을 척결함으로써 이들이 나치 체제에서라면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대륙적 차원의 통합을 선도할 도덕적, 정신적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도외시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독일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일본이 아시아 이웃 국가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된 자기 과거의 부정적 유산을 청산하기는커녕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면서 그 발전된 경제 역량을 가지고도 무엇을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숙고해 보지 않는다. 일본이 결코 아시아의 지도 국가가 되지 못하거나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청산을 하지 않을 경우 그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국가 행위의 일정 국면에서 그 국가의 발목을 잡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만약 과거 청산만 하고 발전을 위해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 북한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필자는 과연 북한의 적대자나 아니면 드물기는 하나 그 체제의 옹호자들이 상정하는 것만큼 북한이 철저하게 일제 청산을 수행했는지에 상당한 의문을 갖고 있다. 분명히 북한은 그 폐쇄된 공간 안에서 김일성 일인통치의 도전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서라도 일제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숙청하거나 적어도 재생불가능할 정도로 격멸 또는 억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북한이 정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제의 인적 청산’에 상응할 정도로 국가운영 차원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잔여구조 극복’에도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북한은 일제가 추진한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에서도 남아 있던 사회 많은 부분의 전근대적인 봉건적 유제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국가적으로 표방된 인민민주주의와는 정반대로 작동하는 정치의 비민주성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경제 운용은 소유 구조의 변화 빼고는 사실상 일제말의 전시국가경제체제의 방식을 그대로 준용하고 있으며, 사회적 위계구조에서 문화적 기풍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시대 남겨진 유습들이 거의 청산되지 않고 사람만 바꿔 그대로 통용되는 모습이 적지 않은 자료에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서 북한은 철저한 일제 청산의 예로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인적 차원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했다고 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을 근거로 설명할 수 있는 북한 특유의 현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이 저렇게 피폐하면서도 어떻게 여태껏 망하지 않고 그나마 지배층의 결속이 유지되고 있느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1991년 소련의 분해로 동유럽권의 붕괴가 급속하게 완료되었을 때 대두분의 사람들은 북한도 조만간 초우세츠쿠의 루마니아처럼 자멸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현재 가까운 시일 내에 북한이 동유럽식으로 붕괴할 것으로 단언하는 이는 거의 없다. 중국 북부에 떠도는 상당한 숫자의 탈북자에도 불구하고 그 탈북자들을 북한 체제의 의식적 이탈자 내지 전복자로 해석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탈북자 문제를 북한 체제의 붕괴 조짐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난민으로 보는 시각이 적잖이 설득력을 얻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현상 앞에서 북한에 관해, 북한은 언제 망할 것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참으로 공허하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오히려 북한에 관해 우리는, 북한은 왜 아직도 망하지 않는가를 물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북한 지배층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자체 해체나 해소 또는 분열의 징후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북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국이 북한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하지 않는 가운데 남한과 대치하는 상태에서 북한 지배층의 구성원들에게 남한 체제가 자기들의 대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북한 지배층이 남한에 순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적어도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문제였던 항일반제 투쟁에 있어서는 남한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명분상의 강한 자신감’이다.(이 자신감은 결코 드물지 않게 자만감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길게는 6.25 당시 북한이 아무 거리낌 없이 대남 정규전을 감행할 때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친일파가 장악한 남한에 대해 제2차 독립군 전투를 일으킨다는 생각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보인다.

라서 대한민국의 친일파 청산도가 북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북한 체제 유지의 가장 큰 명분을 제공하며, 북한 지배층으로 하여금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시킨 대한민국의 우위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어떤 형태로든 대한민국과의 체제경쟁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빌미가 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단언하건대, 대한민국의 친일파야말로, 역설적으로, 북한 체제 자체에 존립의 명분을 안겨주는 가장 친북적 세력이다.

5. 친일멘털리티의 재생산 구조: ‘친일-반공-국가주의’에 기반한 ‘권력숭배-물질만능-국민윤리’의 재생산 구조

그러면 어떻게 <식민지 소년 한승조>가 바로 일본 제국주의도 물러간 이 대한민국에서 그 노년에 이르러 일제 당국도 감히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친일지상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한승조 문건이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명문 고려대의 명예교수라는 것에 일차적으로 자극되었고, 자유시민연대의 공동대표라는 사실에 격앙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전두환 군부정권의 절정기였던 1980년 1월에서 1984년 1월에 이르기까지 '한국국민윤리학회'의 5, 6대 회장이었고, 현재에도 그 학회의 수석고문으로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가 5공 출범 당시 바로 이 국민윤리학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군의 정훈장교를 특별회원으로 받아들인 조치는 이 학회의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로 여전히 게시되고 있다. 한국국민윤리학회 홈페이지인 www.kethics.com 참조

‘국민윤리’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국민정신교육에 기여했다”는 명분으로 세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국가의 서훈을 받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민윤리’라는 것은 박정희 시대에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을 모태로 하여 전두환 시대에 대학에 독자적인 교과교육학으로 제도화 시켜 거기에서 양성된 인력들을 통해 국가지상주의를 국민정신으로 국민 개개인에게 내면화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였다.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도덕’ 및 ‘윤리’ 교과는 바로 이런 이데올로기 장치가 작동하던 현장이었고, 애초에 ‘국민윤리’라고 불려지던 바로 이 도덕 및 윤리 교과에서 가르치는 가장 큰 덕목으로 국민교육헌장에서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국민정신”의 핵심은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었으며, 이 정신으로 도달할 가장 큰 목표는 “민족중흥”이라는 비전으로 미회된 “국가 건설”이었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국민교육헌장 안에 반공, 경제만능, 그리고 국가지상주의를 이 나라 국민됨의 가장 중요한 요건인 ‘국민정신’으로 묶어내는 일관된 의식 메커니즘이 다름 아닌 ‘권력숭배 코드’라는 점이다.

권력숭배 코드란 남이나 나 자신에 대해 마음먹은 대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자원이나 세력이 당장에 확보되어 있지 않으면 나 또는 우리의 실존이 말살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대전제로 강제력을 보증하는 자원과 세력의 축적에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두는 정신태도(멘털리티)를 가리킨다.
박정희체제에서는 반공을 바로 이 권력숭배코드의 지상 목표로 설정하였으며, 민족사에서 치러 왔던 타민족과의 전쟁 사례들을 국민의식 안에 권력숭배 코드를 내면적으로 장착시키는 드라이버로 사용하였다. 이 때 권력숭배의 최상위 대상으로 설정된 것은 국가였다.

문제는 반공, 경제만능, 그리고 국가지상주의를 국민정신의 내용으로 묶어 이것을 국민에게 최고의 도덕적 가치 즉 ‘국민윤리’로 부각시키면서 국민 개개인의 개별적 의식 자체는 모두 이 최고권력체인 국가에 전적으로 순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지상주의는 단일체로서의 국가의 권력을 극대화시키면서,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 국민 구성원 개개인이 통어할 수 있는 권력은 극소화 또는 무화(無化)시키는 권력불균등의 메커니즘을 장착하고 있다. 이것은 국민교육헌장에서 민주 국가의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자기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 터전인 ‘사회’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는 데서 그대로 드러난다.

즉 박정희식 국민윤리는 대한민국 국가의 국민 개개인을 ‘사회의 매개 없이’ 바로 국가와 직접적으로 대면시키고 그 앞에서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을 다짐시킨다. 국민교육헌장 제정 과정에서 ‘사회’라는 단어 자체와 그와 관련된 윤리적 덕목들 즉 자유, 평화, 정의 등이 삭제되어 나가는 경위에 대한 자세한 추적으로는 홍윤기, 「한국 도덕?윤리 교육의 이념적 혼돈과 정체성 위기」, 한국철학교육자연대회의 펴냄, 『한국 도덕?윤리 교육 백서』(서울: 한울, 2001. 4.), 제9장, 310~338쪽 참조.

즉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길러진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한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나라 발전에 직접 이바지하기에 이르는 국민에게서 권력에 대한 비판적 저항을 기대하기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이렇게 권력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결여된 국민에게 동일한 차원의 권력체들과의 비교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쪽에 순응하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힘들 것이다.

비록 그 권력체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난을 안긴 외부 세력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권력에의 순응과 권력 숭배가 국민윤리 차원에서 내면화된 의식을 갖고는 우리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강자에 맞서 끝까지 우리 존재의 요구를 제기하기란 힘들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권력 숭배와 권력 순응을 내면화시킨 국민윤리의식으로는 우리보다 더 약한 존재를 능멸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자책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식의 권력숭배/순응 코드를 내장한 국민정신이 나보다 우월한 강자에의 복종을 축복으로 여기는 친일지상주의의 권력코드와 바로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승조 노인이 장년기에 4년씩이나 회장으로 재임한 이른바 국민윤리교육학회의 원로 멤버들은 모두 문교부와 교육부에 걸친 한국 교육 권력의 최고 부분에서 한국 도덕?윤리 교과서의 집필과 도덕윤리 교육과정의 지침 규정을 주도해 왔다. 그리고 바로 이런 교과체제를 거점으로 친일파에 친화적인 권력숭배/순응의 멘털리티가 국민정신을 명분으로 후세대에 직접 주입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권력행태에 무감각한 도덕윤리교육으로 고착되어 왔다.

대한민국 국민교육체계에서 도덕?윤리 교과는 애국애족의 명분을 내건 국가지상주의의 확립을 목표로 권력숭배코드를 체계적으로 주입하는 국민정신교육의 확고한 거점이었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되고 민주화되면서 다양화된 욕구들과 이해관계들을 시민들 사이에서 자율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고도로 발전된 도덕의식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도덕?윤리 교육이 발전된 도덕의식의 교육에 거의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너무도 당연하다.

현행 도덕 및 윤리 교과의 큰 틀은 아직도 한승조 노인 같은 사람이 주도했던 국민정신이라는 틀 안에서 배양된 국가지상주의에 의해 지배된다. 21세기에 이른 현재 상황에서도 국민공통기본교과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도덕윤리 교과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도덕 문제보다는 국가지상주의적 정신태도의 양성을 중요한 윤리적 덕목으로 부각시키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이 국가지상주의 정신태도는 어느 순간에도 친일멘털리티와 호환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입시 과목의 관점이 아니라 지금 우리사회에서 진정 요구되는 도덕 규범이 무엇인가를 자문하는 관점에서 현행 중고등학교 도덕 및 윤리 교과의 내용을 진지하게 검토해볼 것을 권한다. 그 안에는 시험에서 컨닝하면 안 된다든지, 내신 성적 조작은 경쟁의 룰을 훼손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근간을 위협한다든지 하는 등의 최소한의 교육윤리를 자각시키는 내용도 들어있지 않다.

나는 한승조 노인의 망언이 단지 일제 식민지 지배 때 받았던 청소년기의 교육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식민지 소년>에서 유래한다는 진단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아무리 청소년기 교육의 영향력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 교육에 친화적인 요인이 그의 생애 과정에 걸쳐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는다면 소년기 교육의 영향은 살아가면서 약화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한승조 노인은 일제 시대에 본격적인 친일파가 되었다기보다 일제 시대를 조금 걸치면서 독립 대한민국 체제 안에서 친일에의 성향을 온존, 반전시킨 <친일후속세대>에 속한다.

그런데 한승조 노인의 글을 보면 그의 친일 의식은 약화되기는커녕 세계화 시대를 맞아 바야흐로 친일이야말로 애국애족의 올바른 길로 입증될 것이라는 친일확신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생애 과정에 친일에의 확신을 배양시키는 요인들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 왔음을 방증한다.

당연히 <친일소년 한승조>의 일본 존경 의식을 강화시킨 첫 번째 요인은 제국체제를 해체 당한 후에도 제국정신과 제국에의 향수를 그대로 간직한 채 다시 강국으로 발돋움한 현대 일본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와 나란히 박정희에서 전두환, 그리고 약하게는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친일 인맥 속에서 우리 국가와 사회의 지배권을 장악했던 권력체계 안에서 <장년 한승조>가 국민윤리의 틀 안에서 국민정신을 직접 계도하는 위치를 오래 고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친일 지향적 멘탈리티에 정당성을 확신시켜 주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윤리 교과 안에서 가르치는 도덕적, 윤리적 덕목이라는 것들에 대해서는 사실 친일적이라는 지칭사만 빠졌지 그 개념적 내용들은 실질적으로 친일멘탈리티의 콘텐츠와 호화가능한 것들이었다.

국민정신교육이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국민에게 국가로 표상된 최고 권력에의 숭배, 즉 파시즘적 멘탈리티를 기준으로 그 앞에서 살아남는 태도를 배양시키는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도덕, 윤리 교육은 파시즘 교육이었고 소년 한승조는 대한민국 국민교육이 장치해준 이 메커니즘 안에서 자발적으로 친일에의 열망을 보존하고 심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즉 바로 이런 교육자적이고 계도적인 위치설정(topos) 자체가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과대망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한승조 노인이 내다보는 세계화 시대의 친일은 바로 이런 국민윤리의 교육 메커니즘 안에서 정신적인 인큐베이터를 찾는다. 그러나 그 인큐베이터는 위험하다. 그 안에서 의사소통적 자폐아가 보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친일멘털리티 청산을 위한 제언

한승조 사태를 보면서 나는 이 사회에서 내가 살아가기 위해 내 자신에게 다짐했던 준칙 하나가 시험대 위에 올라선 느낌을 받았다. 즉 나는 아무리 수구보수나 극우, 나아가 소아병적인 극좌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이 사회의 기본적인 민주적 합의를 심각하게 손상하지 않는 한 서로 더불어 사는 동반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한승조 노인의 아주 체계화된 무지, 선택적 유식함을 보면서 내가 그나마 쌓아 왔던 시민적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모든 도전을 개인적인 심정으로 환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불건전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친일과 결부된 그런 가치관들이 교육되고 보육되는 원천을 탐색하여 척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사 진상 규명을 통해 우리의 발목을 죄고 있는 과거의 족쇄를 정확하게 투시해야 한다.

우리가 1세대 친일파들을 인적으로 숙청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친일과 결부된, 친일친화적인 요인들을 투시하고 친일후속세대가 배양될 사회적, 교육적 토양을 척결하는 것은 가능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직접적 친일파가 아니라 세계화 시대의 친일을 내세우는 친일 후속 세대라는 점에서 더욱 절실하게 제기되는 요구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필자는 친일 현상의 항구적인 종식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에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한다.

첫째, 현재 국회에 계류되어 정쟁의 한가운데 있는 과거사법(진실규명과화해를위한기본법안)을 조속히 처리하되 그 조사시기의 범위를 개항까지 넓혀 조선과 대한제국을 상대로 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하도록 함.(대표적 조사 사건으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음)

둘째, 친일파재산환수법을 조속히 처리하여 친일파 재발에 대한 단호한 결의를 보일 것

셋째, 친일진상규명법을 조속히 실행함으로써 국내외에 친일파에 대한 국가의 단호한 의지를 천명할 것.

용해온 현행 중고등학교 도덕?윤리 교과를 전면 폐지함과 아울러 민주화와 선진화의 요구에 부응하는 도덕교육의 새로운 틀을 만들기 위한 시민사회 및 정치사회의 논의를 개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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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동안 한국과 미국서 기자생활을 한 뒤 지금은 제주에서 새 삶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닌 밝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실천하고 나누기 위해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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