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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혁당 희생자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는 실제 사형집행때 사용되었던 끈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인혁당 사건이란?] 유신시절 대표적 고문조작 사건
반유신 세력 탄압 및 혁신계 제거 목적

▲ 75년 4월 8일 대법원 선고 이튿날 처형된 8인의 인혁당 사형수들. 왼쪽부터 김용원·도예종·서도원·송상진·여정남·우홍선·이수병·하재완 (가나다순)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은 두번에 걸쳐 일어났다. 그 중 8명을 하루아침에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 2차 인혁당 사건이다.

1차 인혁당 사건(1964)은 굴욕적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조작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혁신계 인사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배후조종하고 공산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증거가 없어서 기소할 수 없다며 사표를 제출할 정도로 조작의 흔적이 역력해 기소된 50여명 중 13명에게만 유죄가 선고됐다.

10년 뒤(1974) 박 정권은 유신 독재에 항거하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 불리는 2차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냈다. 박 정권은 학생운동가 180여명을 체포해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만들어낸 뒤 그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 내 지하조직인 인혁당 재건위가 있다고 발표했다.

23명의 인혁당 관련 구속자들은 내란예비음모 및 내란선동 혐의로 기소된 뒤 비상보통군법회의(1974. 7. 11)에서 사형(8명), 무기징역(7명), 15년 이상의 징역형(8명)을 선고받았다. 사형 선고자 8명은 9개월 뒤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았고, 놀랍게도 그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사형 선고 후 적어도 3~4년은 집행을 미루는 관행에 비춰볼 때 극히 이례적이었던 이날 사형은 반유신 세력에게 철퇴를 가하려는 박 정권의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일이던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발표하며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 박 정권에게 4.19를 전후해 통일운동, 민족자주운동을 펼쳤던 이들 혁신계 인사들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 인혁당 사형수들이 숨져간 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앞에 추모객들이 '진상규명, 명예회복, 민주투쟁' 이 적힌 종이를 국화꽃과 함께 꽂아두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재심 기회도 없이 사형시킨 판결은 무효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나.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정부가 나서 진상규명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 (유족대표 이영교씨, 인혁당 희생자 고 하재완씨 부인)

"사형장 옆 미루나무는 이분들의 피를 먹고 자랐다. 고귀한 자양분을 먹고 자란 그 미루나무가 큰 만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도 조금 더 자라났다." (민중가수 이지상씨, 사형이 집행됐던 옛 서대문형무소 앞 추모공연에서)


서도원, 하재완, 도예종,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이수병, 여정남.

유신독재 시절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휘말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이들은 선고된 지 채 20시간도 지나기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어디 이들 뿐인가. 복역 중 운명한 장석구, 고문후유증으로 떠난 전재권·유진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들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강산이 세번 변해도 이들을 변함없이 기억하고 진실을 알려온 사람들이 있다. 4월 8일, 그 사람들이 30년 전 사형이 집행됐던 서대문 독립공원(옛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서 오후 4시부터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식' 식전 행사를 연 뒤 오후 6시경 명동성당 문화관 코스트홀로 모였다.

피를 먹고 자란 사형장 옆 미루나무

▲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가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천주교인권위, 민청학련·인혁당진상규명위 등의 주최로 8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가운데 한 참석자가 사형장앞에 국화꽃을 꽃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분들의 죽음은 2000년 전 예수의 외로운 죽음과 같다."

30년 동안 유족들과 함께 아파하며 진실을 알려온 함세웅 신부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억울한 죽음, 그러나 그 고귀한 정신은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기에 헛되지 않은 희생이라는 뜻이리라. 그래서일까. 함 신부는 "희생자들의 열매요 꽃인 우리들이 그들의 숭고한 뜻을 (인간을 파괴한 유신독재를 겪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법살인'이 아니라 반민족·반민주·반통일적인 박정희 정권이 '정치살인'을 한 것이다."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 연대회의 의장은 이들이 4.19를 거치며 간직한 민족자주·민주주의·평화통일 신념을 버리지 않았기에 군부정권에 의해 희생됐음을 강조했다. 박 의장은 중앙정보부가 사건 초기에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조작했던 이른바 '5인 지도부' 중 한 사람이지만 당시 그는 수감 중이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학생운동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를 받은 셈이었다.

살아남았다는 죄스러움 때문일까. 추도사를 낭독하는 동안 박 의장은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혔고 목소리도 심하게 떨렸다. 박 의장은 "누구보다 뜨겁게 조국을 사랑했기 때문에 희생당한 선생들이여, 이제라도 편히 눈감으시오"라는 말로 추도사를 마쳤다.

떠난 이들이 고이 잠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 자리를 찾은 모든 이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편히 쉬지 못하고 있다.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의문사위에서 '중정 조작 사건' 판정했지만... 지체되는 명예회복

▲ 8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 참가자들이 사형장앞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사건 당시부터 터져나온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지난 1998년 '소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구성되면서 힘을 받기 시작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발표한 뒤 대책위는 2002년 12월 10일 서울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심 여부에 대한 결정은 내려지지 않은 상태다.

김형태 변호사는 경과 보고에서 "의문사위 발표까지 있었기 때문에 재심이 결정되면 국가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뒤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재심 여부 결정을 늦추는 것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유족과 대책위는 재심 청구 외에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이하 명예회복위원회)에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신청했지만 난항을 겪고 있는 상태다.

김 변호사는 "명예회복위원회에서는 특별한 활동을 하다 잡혀간 게 아닌 만큼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이분들이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이 없었다면 박 정권이 잡아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관련 자료를 명예회복위원회에 제출해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국가정보원은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활동에 인혁당 사건을 포함한다고 발표한 뒤 조사 중이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 8일 저녁 명동성당 문화관 2층 코스트홀에서 열린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식'에서 문정현 신부와 유가족 여상화씨(여정남 선생 조카), 이영교씨(하재완 선생 미망인), 유승옥씨(김용원 선생 미망인), 신동숙씨(도예종 선생 미망인), 김진생씨(송상진 선생 미망인)가 무대에 올라와있다.
ⓒ 오마이뉴스 김덕련
30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보상, 고문·조작자에 대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인지라 이날 추모제에서도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휘말렸던 이철 전 의원은 추도사에서 "정권이 수없이 바뀌고 민주정부임을 주장하는 정권이 집권했는데도 이분들의 명예회복이 안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정부가 나서서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치꾼들 도대체 뭐하는 거야. (진상규명·명예회복이) 그렇게 힘들어? 그거 못해? 그럼 물러나!"

유족대표 이영교씨의 손에 이끌려 무대에 오른 문정현 신부는 30년이 지나도록 인혁당 사건을 방치하고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 정치권을 강하게 질타했다. 문 신부가 소리 높여 정치권을, 아니 인혁당의 희생을 발판삼아 이뤄진 민주화의 과실을 누리면서도 인혁당에 눈감은 세상을 질타하자, 추모식장은 박수 소리로 가득찼고 "노무현은 책임져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추모식은 참석자들이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 꽃 한송이씩 올리면서 2시간만에 끝났다. 내년 추모식 때는 세상이 빚을 갚아 인혁당 희생자들이 편히 잠들고 유족들이 조금은 덜 죄스러운 마음으로 영령들을 대면할 수 있게 될까.

"가해자들, 이제라도 고백하길"
[인터뷰] 여정남 선생 조카 여상화씨

여상화(46. 사진)씨는 추모식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쉽게 뜨지 못했다. 헌화를 마친 사람들이 대부분 추모식장 밖으로 나간 후에도 남아있던 여씨는 다시 무대에 올라 한동안 영정 주변을 가지런히 한 뒤에야 아쉬운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삼촌이 여름에 공사장에 가서 노동한 돈을 어려운 사람에게 건네준 뒤 새까맣게 탄 얼굴로 돌아오던 모습이 생생하다"는 여씨는 "가해자들이 이제라도 진상을 고백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자유기고가인 여씨는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에서 홍보실장 일을 맡아 하고 있다. 다음은 여씨와의 일문일답.

- 유족으로서 감회가 어떤가.
"30년을 살았던 삼촌이 떠난 지 30년 됐다(여정남 선생은 1945년생). 그동안 많이 고통스러웠지만 이제는 고통보다는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 아직도 명예회복이 안 됐는데.
"국가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최근 가해자들이 당시 사건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를 본 적이 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 사람들이 이제라도 고백하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라고 본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떳떳하게 고백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 여정남 선생은 어떤 분이셨나.
"정의감이 강하고 소외된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생이던 삼촌이 여름에 공사장에 가서 노동한 돈을 어려운 사람에게 건네준 뒤 까맣게 탄 얼굴로 돌아오던 모습이 생생하다.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 최근 '민주화의 기초를 닦은 건 산업화를 이룬 박정희'라며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그런 분들께는 인간이 왜 사는지, 인간의 존재의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시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일하게 된 것과 인혁당 사건이 관련 있나.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여운형 선생이 혁신계의 효시라는 점이 작용한 건 사실이다. 삼촌도 민족자주와 민주통일을 지향한 혁신계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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