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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년 4월8일 '인혁당 사건' 대법원 판결에 참가한 대법원 판사들(생존자).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민복기 대법원장, 민문기, 안병수, 양병호, 한환진, 주재황, 임항준, 이일규 대법원 판사. 이중 이일규 판사만이 소수의견을 낸 가운데 '사형 확정' 판결 다음날 사형수 8인에 대한 처형이 이뤄져 '사법살인' 논란을 빚고 있다.
75년 '인혁당사건'의 고문조작을 확인한 의문사위원회의 발표로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당시 법무부가 대법원 선고가 내려지는 시점에 이미 이 시건 관계자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같은 주장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당시 상고를 기각, 비상고등군법회의의 원심을 확정한 대법원 판결은 피의자들의 '고문조작' 주장을 묵살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 판사들중 생존자들은 팔순 나이에 노환을 앓고 있거나 "기억이 없다"며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는 등 재심이나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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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청문회 이념검증·정치공방

'인혁당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8년간 옥고를 치렀던 통일운동가 전창일(민족화합운동연합 상임공동대표, 80)씨는 19일 <오마이뉴스> 기자에게 "대법원 판결이 있던 75년 4월8일 오후 평소 알고 지내던 일반죄수 한 명이 '오전 일찍 육군대령과 보안과장이 교수형장을 둘러보고 간 후 교도관이 자신을 데려다가 청소를 시켰다. 아무래도 내일 사형집행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전씨는 대법원 판결이 있던 날 서대문구치소(현 서대문 독립공원)에 수감돼 있어 판결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당시 형장은 1년에 한 두 차례 정도 사형집행이 이뤄졌기 때문에 일반수들이 집행 하루 전에 먼지에 덮여있는 형장을 청소하는 게 관례였다는 것.

전씨는 "나중에 인혁당 사형수 8인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되고 형장 청소시간(오전10시)을 헤아려보니 그 시간에 대법원 판결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는 대법원이 정권 차원의 '사법살인'을 묵인한 판결 내용이 법무부에 사전 유출됐거나 법무부가 대법원의 상고기각 판결을 미리 짐작하고 신속한 형 집행을 준비했으리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ADTOP6@
당시 이 사건을 놓고 7개월 간 진행된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재판에 참석한 판사들은 모두 13명. 이중 김영세, 김윤행, 이병호, 이영섭, 홍순엽 등 5명은 이미 사망했고, 8명이 생존해 있다.

생존한 '75년 대법원 판사'는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이었던 민복기(89)씨를 비롯, 한환진(88), 민문기(86), 양병호(84), 주재황(84), 임항준(83), 안병수(82), 이일규(82)씨 등이다.

다음은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생존 대법관들의 행적과 근황이다.

민복기: 일제치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을 시작으로 경성지법 판사,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 법무부 차관, 서울지검장, 검찰총장, 대법원장(5-6대)을 역임. 64년 1차 인혁당 사건때도 법무부 장관으로 인혁당 관련자들과 악연을 맺은 그는 78년 대법원장 직에서 물러난 후 변호사로 활동해오다가 은퇴. 민씨의 측근은 "노환이 있어서 보통 집에 계신다. '인혁당 관련' 신문기사는 보신 것 같은데, 그런가 보다 하고 별 신경을 안 쓰시는 것 같다"며 인터뷰 고사.

민문기: 42년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법조계 진출. 법무부 검찰과장, 광주고등법원장, 서울고등법원장을 거쳐 69년부터 80년까지 대법원 판사 역임. 80년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사건 대법원 상고심에서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정태원, 서윤홍 판사 등과 함께 "김의 행위를 내란 목적 살인으로 볼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가 신군부의 미움을 받아 법복을 벗었다. 84년부터 인천의 합동법률사무소에서 공증업무를 봤으나 금년 초부터 노환으로 자택에 칩거중.

주재황: 42년 고등문관시험 합격한 후 서울지검 검사(50년)로 법조계 진출. 초대 서울형사지법원장(63년)에 이어 68년부터 81년까지 13년2개월동안 최장수 중앙선거관리 위원장을 지냄. 82년 동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활동을 했으나 최근에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공증업무를 보는 것 이외에는 자택에 칩거중. 주씨의 부인은 "의문사위원회의 인혁당 사건 발표 내용은 모르는 것같다. 몸이 많이 불편하고, 옛날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일을 기억할 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 대법원의 '인혁당 사건' 원심 확정을 보도한 조선일보 75년 4월9일자 사회면. 왼쪽으로 군인들의 고려대 진입을 보도해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보여준다.
임항준: 1948년 서울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전주지법원장, 대구지법원장, 서울형사지법원장, 대구고법원장을 지냈다. 73년 대법원 판사에 임용돼 80년 김재규 시해사건 재판에서 소수의견을 낸 것이 문제가 돼 사표를 제출했다. 81년부터 법무법인 대양의 변호사로 활동해오다가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

안병수: 1948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후 서울지법 판사, 동국대 교수, 서울고법 판사 등을 지냈다. 1971년 서울고법 판사로 재직중 "문공부가 '씨알의 소리' 등록을 취소한 것은 부당하다"고 전향적인 판결을 내리기도. 81년부터 한남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올해초 일신상의 이유로 대표직을 정기승 변호사(전 대법관)에게 물려주고 칩거중인 상황.

이일규: 1943년 일본 관서대 법학과 졸업. 48년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전주지법원장, 대전지법원장, 대구지법원장을 거쳐 73년부터 12년간 대법관 역임. 당초 대법원 판사 4명이 참여하는 소부(小部)사건에 이의를 제기해 13인 전원합의체를 이끌어냈고, 대법 판결때도 유일한 소수의견을 냄.

88년부터 2년간 대법원장을 지낸 후 변호사 업무를 보는 이씨는 지난 9월1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하급심 재판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냈지만 나머지 판사들이 모두 동의해 유죄가 확정됐다. 그러니 27년 전 사건을 지금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반응을 보임.


양병호 판사(법무법인 제일서울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몇 차례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기도 했는데, 그렇게 크게 관여한 사건이 아니어서 기억이 별로 없다"며 "사건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재심이나 의문사위원회 조사가 있어도 별로 해줄 말이 없다"고 밝혔다. 양 판사는 "주심판사가 잘 알지 않겠냐? 주심에게 물어 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당시 주심을 본 이병호 판사는 이미 작고했다.

양 판사는 김윤행 판사(작고)와 함께 판결문에 첨부한 보충의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부분에 대해 "비록 '목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민주공화체제를 부인하고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의 기본조직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20일 <오마이뉴스>의 인터뷰에 응한 한환진 변호사. 한 변호사는 그러나 정면사진 촬영은 거절했다.
ⓒ 오마이뉴스 손병관
최근 <오마이뉴스>가 만난 한환진 판사(법부법인 광화문 대표변호사)는 "사건에 대해 별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대법원 심리는 순탄하게(smooth) 진행됐던 것 같다. 대법원 판사들이 사건을 대충대충 보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한 판사는 "유신시절 판결 과정에서 외압을 느끼지 않고 소신껏 판결에 임했다. 다만 외압이 들어왔다면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한 판사는 '고문조작' 의혹에 대해서는 "일제시대부터 고문이 있었는데, 유신시절이라고 고문이 없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그 시절 검토한 공판 기록에는 뚜렷하게 문제를 발견할 수 없어서 별다른 이견 없이 판결이 나왔을 것이다. 판결 이튿날 사형이 집행된 것에는 나중에 듣고 무척 놀랐다"고 말했다. 한 판사는 "필요하다면 의문사위원회의 조사에 응할 수도 있지만, 사건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도움은 안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판사는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당시 대법원 판결문(164페이지 분량)을 보고 "주심판사가 재판을 주도했는데, 판결문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 재판은 95년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315명의 판사들이 진보당 사건, 민족일보 사건 등과 함께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을 정도로 법조계 내부에도 많은 후유증을 남긴 재판이었다.

▲ 대법원의 상고심 기각 이튿날 전격적으로 처형된 인혁당 사건 사형수들. (가나다순)
한편, 의문사위원회 발표를 통해 힘을 얻은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이하 인혁당 대책위)는 이번 달 중에 변호인단 구성을 마무리하고 내달 10일(세계인권선언기념일)경 법원에 재심을 청구할 계획.

인혁당 대책위의 한 관계자는 20일 "의문사위원회 발표 이후 '이 정도면 명예회복이 충분히 되지 않았나' '재심청구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라는 내부의견도 있었지만, 유족들이 '법원에서 무죄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해 결국 재심 청구까지 가게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신직수 중정부장, 황산덕 법무장관 등 상당수 관련자들이 사망하고 유실된 기록이 많은 상황에서 '고문'과 '조서 조작'에 대한 수사관과 교도관들의 법정 진술을 받아내야 하는 등 난관이 만만치 않다"며 "당사자들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재심이 받아들여지면 생존 대법원 판사들도 진상규명 작업에 동참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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