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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의 장녀 첫돌에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1949년 7월)
ⓒ 김태문
"선생님! 익산에서 전교조 선생님들이 교사대회를 준비한답니다. 꼭 선생님을 모셔서 좋은 말씀을 듣고 싶다는데 어떡할까요?"
"당연히 가야지. 내가 아무리 바빠도 전교조 선생님들의 고생에 비할 수 있겠느냐, 빨리 합법화되어야 할 텐데..."


선생님은 늘 이러셨다. 당신을 필요로 하시고 기다리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가셨다. 특히 전교조 선생님들의 초청에는 다른 일정을 취소하더라도 반드시 참석하셨다.

89년 그 해 정부는 전교조에 대해 이른바 색깔 입히기에 모든 힘을 기울인다. 전교조 교사들이 행하는 참교육의 내용을 좌경 의식화 교육이라 몰아 부치고, 전교조에 대한 의식화 매도는 이후 전교조가 합법화되는 현시점에 이르기까지 전교조를 자유롭지 못하게 할 정도로 국민들의 뇌리에 박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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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나의 스승을 회상합니다

정부는 조선, 동아, 중앙 등 보수 언론은 물론 구청, 동사무소 직원, 관변단체, 육성회 등 일부 학부모 등을 동원해 관제 데모, 반상회에 이르기까지 전교조에 대한 붉은색 옷 입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교육대학살이라 불리는 조치로 1519명의 교사들이 파면, 해임되었다.

선생님은 늘 마음의 짐이 크셨다.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해직교사들이 부르는 자리에는 항상 선생님이 계셨다. 대학 총장의 자리를 수락하시면서 선생님께서는 '내가 배우고 익힌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철학을 대학 현장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학 총장직을 수락했다' 말하고 '이 꿈을 반드시 이루어서 지금까지의 부끄럽지 않는 삶을 교육행정가로서도 잘 마무리하고 싶다'고 얘기하셨다.

대학 총장의 신분으로 전교조 해직교사들의 후원회비를 꼬박꼬박 챙기셨고, 바쁜 와중에서도 시간을 쪼개고 쪼개 당시 구속된 전교조 윤영규, 고진형 선생을 면회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항상 시낭송으로 해직 교사들의 아픔을 함께 나눴다.

▲ 오른쪽은 삶의 진실과 교육적 진실(1989, 민족교육실천협의회) 테잎의 커버이고 왼쪽은 민중문화운동연합 1집, '분단시대의 민족혼과 민족시 낭송'테잎 커버
ⓒ 김태문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중략>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선생님의 시낭송이 끝나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고, 우뢰와 같은 박수도 쏟아졌다.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힘을 주기도 하고, 분노케 하기도 했다.

행사가 끝나고 뒷풀이를 위해 모인 막걸리 집에서도 선생님의 시낭송은 이어졌다. 답답한 현실에 희망을, 독재에 저항을, 없는 자에게 가짐을, 억눌린 자에게 튼튼한 버팀목을, 좌절하여 힘 빠진 이에게 용기를 한 아름씩 안겨주었다.

▲ 89년 대학 학장으로서 4.19기념식을 치루고 시낭송을 하고 있는 선생님
ⓒ 김태문
76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재임용에서 탈락한 선생님은 해직 교수로 떠돌며 궂은 곳마다 얼굴을 내미셨다. 그때마다 많은 이들은 좋은 말씀을 부탁하셨고, 말 대신 시를 낭송하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암울했던 시기에 선생님의 시낭송은 그 어떤 문화 운동보다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82년, 공부중이던 아들 초청으로 미국에 갔었다. 그곳에서도 관광은커녕, 60여 차례의 초청 강연을 하셨다고 한다. 강연 때마다 나라 사정을 시낭송으로 알렸고, 조국의 사정에 목말라 했던 교포들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그 당시 미국에 망명 중이셨던 윤한봉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도 했다.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문익환, 신동엽, 고은, 신경림, 김지하, 양성우, 조태일, 정희성, 김정환 시인 등의 약 300여 편의 시를 완벽하게 암송하는 선생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그의 암기력에 놀랐고, 시에 대한 애착과 정성에 또 한번 놀랐다.

선생님은 시를 쓰지 않으셨지만, 누구보다 더 시를 사랑했고, 누구보다 더 철저하게 시를 생활화했으며, 치열하게 시를 실천했던 우리의 영원한 시인이셨다.

오늘같은 날에는 성내운의 시낭송을 들어야 한다./노래 박치음
<시낭송-1> 겨울공화국 (양성우 지음) / 시낭송 성내운
<시낭송-2>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지음) / 시낭송 성내운
<시낭송-3> 고등학교 직원회의 시간(고광헌 지음) / 시낭송 성내운
<시낭송-4> 내 무거운 책가방(김대영 지음) / 시낭송 성내운


성내운 선생님이 살아오신 길

1926년 3월 29일 충남 공주군 신풍면 산정리에서 출생

1939년 일본인 학생이 절대다수인 경성사범학교 예과에 입학, 1940년 여름에 일본인 담임 교사로부터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도록 비밀리에 권유 받고, 학교 자퇴 절차를 밟았으나 실패.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2학년에 편입하여 1949년 7월에 졸업.

1946년(21세) 12월 이우영 여사와 결혼.

1947년 서울 사대에 재학중 '조선교육" 3월호에 최초의 논문 <미국의 교육사조와 조선 교육>을 발표.

1949년(24세)부터 1950년 6.25까지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전임 조교, 부설 중등 교원 양성소에서 중등 교육론을 강의, 서울 성신중 고등학교(사회에서는 신부를 양성하는 이 학교를 소신학교라 불렀다)에서 국어 및 영어 수업 담당.

1950년(25세) 교육학 관계 첫 저서 <새교육개론> 발행.

1950년 피난하여 대구에서의 전시 연합대학과 부산에서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가교실에서 교육학 강의.

1953년(28세) 1960년까지 중앙교육연구소 연구원 및 조사 연구부장 역임.

1954년(29세) 미국 교육계 시찰, <숙희에게-미국과 그 학교> 발간.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겸직교수로 교육학 강의.

1954년 William Heard Kilpatrick의 저서 <민주주의를 위한 집단 교육-도의적 새 교육의 원리> 발행.

1960년(35세)부터 1961년까지, 4.19혁명으로 출범한 제2공화국 정부의 문교부에서 수석 장학관 역임. 교원노조운동에 대해 4.19직후의 과도정부와는 달리 이를 양성화 주장.

1961년 5.16 직후부터 1963년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회 교육정책 담당 전문위원 역임. 정부의 사립학교법 개악을 통한 사학에 대한 전면 통제를 반대하고 그 직을 사퇴.

1963년(38세)부터 1976년까지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역임.

1963년 Philip H. Phenix 의 책 <교육철학> 번역 발행.

1964년 교육학 관계 저서 <성인 후보생의 항변> 발행.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 병원 소아 재활원 부속국민학교 교장 역임.

1965년 교육학 관계 저서 <한국교육의 증언> 발행.

1968년 William M. Cruickshank가 엮은 심리학 관계 저서 <체격 심리학> <심리학적 종합평가> <보기-장애 아동의 심리학> 번역 발행.

1968년(43세) 11월 3일(학생의 날) 연세대학교 교정에 민족시인 윤동주 동문의 시비를 세움.

1974년 교육학 관계 번역서 <민중교육의 본질>(Harold Benjamin 지음) 발행.

1974년 (50세)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교수 및 학생들의 석방을 위한 '교수 기도회'를 고 서암동 교수와 함께 발기하여 6일간 계속 진행.

1976년(51세) 교수 기도회 사건과 그간의 비판적 발언 기고를 빌미로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 해직.

1976년 교육 서간집 <선생님께> 발행.

1977년(52세) 해직교수 협의회 회장 및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부회장으로 일하다가, 1978년 말 '우리의 교육지표' 필화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 광주 교도소에 수감.

1977년 교육학 관계 저서 <스승은 없는가> 발행.

1979년 5개 민주화운동 단체에 의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공동 선언을 주도하고 계엄 정부에 의해 수배.

1980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복직.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직에서 다시 해직.

1981년(56세) 교육 수상집 <제자여, 사랑하는 제자여> 발행.

1982년 교육학 관계 저서 <인간 회복의 교육> 발행.

1983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이사 역임.

1984년(59세)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고문 역임.

1984년 9월 1일 연세대학교 교수로 두 번째 복직.

1985년(60세) 자신의 교육학 연구 40년을 정리한 <분단시대의 민족교육> 발행.

1985년 교육 소설집 <사랑을 위한 반역> 발행.

1985년 겨울 민중교육지 필화사건 변호인 측 증인으로 출두, 위 책에 실린 교육 논문에 대한 정당성 증언.

1986년 5월 15일(스승의 날)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공동대표 역임.

1986년 화갑기념 논문집 <민족 교육의 반성> 발간.

1987년 고 이한열 민주국민장 장례위원장 역임.

1989년 고 이한열 추모사업회 초대 이사장 역임.

1989년 광주경상대학교 학장 역임, 후에 광주대학교로 승역 후 초대 총장 역임, 의문사 한 고 이철규 열사 진상규명 활동 전개, 광주시내 대학 총·학장들의 핵발전소 반대 성명서 발표 주도.

1989년 12월 25일 혈액암으로 별세. / 김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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