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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검의 '특별한 수사관'이 출입했던 1112호실. ⓒ 오마이뉴스 황방열

박노항의 '천적' 김대업

지난 2월까지만해도 서울지검 특수부가 위치한 1113호실에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출근했다. 그는 매일 오전 8시30분 두명의 교도관에 둘러싸인 채 호송버스를 타고 서울 구치소를 출발해 9시경 서울지검 청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곧바로 11층으로 올라온 그는 특수부를 지나 잠금장치가 설치된 복도의 문을 통과하고 1112호실로 들어온 뒤 안쪽에서 연결된 1113호실에서 하루종일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분류작업을 벌였다.

그의 존재는 완전히 베일에 가려졌다. 1112호실에 외부 방문객이 찾아오면 그는 평소 잠겨져있는 1113호실의 문을 안쪽에서 열고 복도를 지나 특수부로 향했다. 퇴근 시간은 대부분 새벽 2-3시. 새벽 6시에 서울구치소로 퇴근할 때에도 그의 '출근' 시간은 일정했다.


일명 '병역비리 전문 민간수사관' 김대업(41) 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박노항 씨가 병역비리의 대부라는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그의 '천적' 김대업 씨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또 박노항 씨가 이 분야에서 주가를 날리기 시작한 94년 이전에 소위 '병역비리업계'를 주름잡던 인물, 즉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치외법권 시절'의 대부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해 4월 구속됐던 김대업 씨가 1년여 동안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지난 3월 자유인의 몸으로 풀려나면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군 창설 이래 처음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군 검찰단에서 '수사관'으로 일한 바 있다.

또 최근 구속됐던 1년여의 기간중 절반 이상을 수감자 신분으로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병역비리를 조사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 자신이 직접 병역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전력이 있지만 그 경력을 토대로 이 분야에서는 '비리캐는 쪽집게'로서의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실제 그가 이번 8개월여의 수사과정에서 사법처리한 병역비리 관계자만도 100여 명에 달한다. 또 그는 지난 98년부터 2년여간 군 검찰과 함께 '민간 수사관'으로 활약했던 기간을 합치면 무려 1000여 명의 비리혐의자들을 쪽집게처럼 잡아냈다고 한다. 이같은 수치는 단일사건으로는 사법부 창설 이래 최대 규모다.

김대업 씨가 최근 수감자의 신분으로 병역비리 수사에 합류한 것은 지난해 6월말경부터이다. 그가 신촌의 한 PC방에서 체포돼 사기혐의로 구속된 것은 지난해 4월2일. 3달여 동안 수감자 생활을 하다가, 서울지검 병역비리 특별수사팀에 합류한 것이다. 지난해 4월30일경 박노항 씨를 검거하고도 병역비리 수사에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검찰이 내린 결단이다.

이와 관련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도 "그를 참고인 자격으로 여러 차례 부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간접적으로 김 씨의 '수사 참여' 사실을 인정했다.

"국가 위하는 마음으로 병역비리 수사 도와달라"

ⓒ 오마이뉴스 권우성


"당시 병무비리 합동수사반의 팀장인 노명선 부부장이 6월말경(2001년) 나를 불렀습니다. 노 부부장은 나에게 '국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김 씨는 곧바로 노 부부장의 요청을 수락했고, 그 뒤부터 수감자이자 병무비리 수사관으로서의 그의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그가 처음 병무비리를 수사했던 곳은 서울지검 1104호실. 그는 아침 8시30분경 2명의 교도관에 이끌려 호송버스를 타고 서울구치소를 출발해 서울지검에 '출근'했다.

"당시 서부지청에 병무비리합동수사반이 구성돼 있었습니다. 노 검사가 김대업 씨를 합류시키자고 제안했지만 국방부에서 난감해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지검에서 단독으로 조사를 벌여야했습니다."

김 씨의 작업은 주로 서부지청 병무비리합동수사반에서 날아온 팩스 자료를 분석하는 일. 경우에 따라서는 특수부 조사실에서 병역비리에 연루된 인사를 직접 만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1달여만에 서부지청의 합수부가 해체되고, 노 부부장이 서울지검 특수1부장실의 병무비리 전담 검사로 발령받으면서 그는 서울지검 1113호실로 자리를 옮겨 수사에 전념했다.

수감자 신분으로 서울지검 1113호실에서 병역비리 수사

바로 옆방인 1112호실은 노 부부장이 사용하던 방이었다. 두 방은 안쪽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돼 있으나, 복도쪽의 구조는 두 방의 문이 따로 나뉘어져 있고, 중간에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잠금문 장치가 설치돼있다.

"당시 특수 1부는 10층이었는데 수감자 신분으로 병역비리를 조사한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문제가 야기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노 부부장이 특별히 배려한 것입니다."

그는 1113호실에서는 서부지청에서 보내온 서류를 검토했고, 그 옆쪽에 위치한 특별조사실에서 병역비리 혐의자들과 만났다. 그가 양쪽 방을 옮길 때마다 교도관 2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밤샘작업을 할 때에도 교도관들은 번갈아 '보초'를 서야만했다.

김 씨가 다시 수감자의 신분으로 되돌아간 것은 지난 2월 노 부부장이 일본대사관에 파견되던 날부터다. 지난 3월31일 출소했던 것을 감안하면, 1년여의 구속기간 중 거의 8개월여에 걸쳐 '수사반원'으로 활동한 셈이다.

이 기간동안 병역비리 '쪽집게 수사반원'의 활약은 대단했다. 비록 수감자 신분이라는 제약이 따랐지만 박노항 씨 구속 이후에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던 병역비리 수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김길부 전 병무청장과 전 구미시장의 아들들의 뒤를 봐준 구미중앙병원 내과 과장을 구속시키는 데 기여했고, 군 전역한 뒤 보훈대상자 급수 판정을 조작하는 이른바 보훈신검 비리만 130여 건을 적발해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는 또 축구선수 이동국 씨의 비리 사실을 밝혀냈고, 자민련 전 사무부총장의 병역비리건도 색출해냈다. 이 밖에도 최종적으로 확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한 사립대 총장과 3명의 자치단체장의 병역비리 혐의를 파헤치기도 했다.

"병역비리를 잡기 위해서는 의학지식과 병무행정법, 신검기준 등의 분야에 통달해야 합니다. 일반 수사관들이 조사하기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죠. 저 같은 경우는 병적기록카드만으로도 80% 정도 감별할 수 있습니다. 병명과 판정기준, 출생지, 현거주지, 나이, 학력 등을 보면 눈에 드러나죠. 즉 신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허점있는 병명을 우선적으로 검토하고, 재검받으면서 면제됐을 경우 판정 과정을 들춰봅니다. 그외에 부수적으로 신검판정 서류를 보면 90-100%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가 이 기간동안 검토한 자료는 고급공무원, 의사 등 100여 명의 병역비리 혐의자 병적기록. 그는 이중 10여 명을 구속시켰다.

박노항 씨 "김 형에게는 믿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김 씨는 그간 말로만 듣던 박노항 씨와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조우하기도 했다.

"박 씨는 나를 만나면서 '김 형에게는 믿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 김 씨는 박노항 씨를 만나지 못했다.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박노항 씨를 여러 차례 불렀어요. 하지만 국방부측은 직접 (국방부로) 들어와서 심문하라고 했습니다. 국방부가 내 존재를 알아챈 것 같았습니다. 국방부에서 심문하면 내가 갈 수 없잖아요."

그가 병역비리 수사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둔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98년 12월 제1차 군검합동수사본부가 발족한 6개월전부터 민간인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군검찰과 함께 그의 '전과 기술'을 병역비리 수사에 쏟아부으면서 사전작업을 벌였다.

"당시 원용수 준위와 관련된 수사가 난항을 거듭하면서 거의 중단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박노항 씨는 수배된 상태였고요. 그 와중에 김대업 씨가 자발적 참여의사를 밝혔습니다. 우린 엄청난 원군을 얻은 겁니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의 말이다.

김대업 씨는 그해 7월말경부터 자비를 들여 서울 캐피탈 호텔 7층에 방을 마련한 뒤 공식 기구가 출범하기 전까지 4개월여 동안 서울병무청의 병적기록카드를 들춰가면서 소위 병무비리 냄새가 나는 400여 건의 분석자료를 만들었다. 그가 이 기간동안 검토한 병적기록카드만도 5-6만 건에 달했다. 거의 밤을 새워가면서 3-4차례 정도밖에 집에 가지 못하고 얻은 개가였다.

그의 진가는 이후 군의관 심문에서 큰 빛을 발했다. 다음은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의 말이다.

"병무비리 근절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거의 밤샘작업을 하면서 희생적으로 일했습니다. 합수부에 불려온 군의관들은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죠. 하지만 김대업 씨는 군의관들에게 '당시 의뢰인이 반팔을 입었나' '여름이었나' '부모 특징은 없었나'라면서 한 가지의 특징만이라도 말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군의관이 긴가민가 하면서 특징을 말하면 그는 불과 1-2시간만에 후암동 창고에 박스 채 쌓여있는 10만 장이 넘는 병적기록카드 복사본 속에서 귀신같이 한 장의 카드를 찾아왔어요. 그는 이 모든 일을 무료봉사로 해냈습니다."

10만 장의 병적기록카드 속에서 쪽집게 수사

김대업 씨의 전과


김대업 씨는 3번에 걸쳐 실형을 선고받았다. 첫 번 째는 군 복무중의 병역비리 연루 사건. 그는 당시 신검 부서이기도 한 대구병원 외래과에 파견 근무할 때 병역비리건으로 남한산성에서 8개월간 복역했다. 그는 제대 후 택시회사를 운영했고, 의정부 시민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96년 병원 인수시킨 뒤 미국 LA토렌스에 컴퓨터 자수 공장설립해 많은 돈을 벌었다는 그는 97년 7월에 '협박' 혐의로 구속돼 1년동안 복역했다.

그는 그 이듬해인 98년부터 2년여간 군 검찰과 함께 병역비리 수사팀에 합류해 자료 분석 작업 등을 벌였다. 하지만 수사팀에서 나온 직후인 2001년 3월 또다시 사기혐의로 체포돼 1년여 동안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뒤 8개월에 걸쳐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아직도 두 번째와 세 번째 구속은 "병역비리 수사와 연관된 음해"라면서 억울해 하고 있다.

특히 그는 "세 번째 구속 과정이 석연치 않다"면서 지난해 3월30일 한 PC방에서 체포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날 오후 3시경 신촌로터리의 한 PC방에서 박노항 씨의 행적과 관련해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달전인 2월 제4차 병무비리합동수사반이 해체된 뒤 박노항 씨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미국에 다녀온 뒤 대충 위치가 파악돼 그와 관련 문건을 정리하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마포경찰서 소속의 한 경사가 사진과 주민등록번호가 찍혀있는 A4용지를 꺼내보이면서 서초경찰서로 인계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한 50대 남자가 PC방 옆을 지나는 순찰차를 잡아세우고, 수배자 한 사람이 PC방에 있으니 잡아가라고 했다는 겁니다."

김 씨는 당시 한 경사가 보여주었던 A4용지의 전단은 병역비리 수사 때 작성된 것으로 군 기관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군 기관이 불법적으로 민간인 사찰을 했고, 특정인 명의의 사기혐의 고발장에도 군 기관의 문서가 첨부돼 있었다"면서 "한 사람에게 돈을 빌린 적은 있지만 채무상환시기가 도래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나를 옭죄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억울해 하고 있다.
당시 지지부진하던 병역비리 수사는 김대업 씨가 합류한 뒤 활기를 띠었다. 1년여에 걸친 1차 수사가 끝난 뒤 구속자만도 137명. 이 와중에 서울병무청의 직원의 3분의 2가 사법처리됐다. 총 66명의 직원 중 무려 40여 명. 그만큼 비리가 만연됐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이를 잡아낸 '쪽집게 수사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당시 수사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특히 병역비리는 주로 현찰거래이다. 주고받은 사람중 한 명이라도 입을 다물면 구속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 이전까지의 병역비리 수사가 알맹이 없이 끝났던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김 씨의 전문성 앞에 비리 군의관들은 차츰 무릎을 꿇었다.

이후 그는 99년 7월에 구성된 제3차 수사팀에서 2달여 동안 활동했고, 2000년 1월부터 2001년 2월까지 지속된 제4차 병무비리합동수사반에서도 활약했다.

특히 4차 수사 때에는 서울 S병원, 부산 S병원 방사선과 등 전국의 병무비리 1차 커넥션 기관이기도 한 '허위 진단서' 발급 병원들을 뿌리뽑기도 했다.

김대업 씨는 4차 수사반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불과 1달여 뒤인 2001년 3월 사기혐의로 체포됐지만, 그해 6월부터 수감자 신분으로 병역비리를 수사했다.

병역비리에 대한 그의 '특별한 조사'는 노 부부장이 일본대사관으로 파견을 가면서 멈췄다. 김 씨에 따르면 노 부부장은 출국 바로 전날 밤늦게까지 그간의 수사사건에 매달리면서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범죄 사실이 거의 확실시되는 병역비리 서류도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 속에 김대업 씨의 '병역비리 X파일'이 숨어 있다. 또 박노항 씨가 본격적으로 활약했던 지난 94년 이전 그의 전임자이자 '스승'이기도 한 병역비리의 대부, 군의관들 사이에서 일명 'P 빨대'라고도 불렸던 P 씨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P 씨의 화려한 이력 속에 감춰진 인화성 강한 '병역 면제자'들의 리스트가 숨어있다. P 씨는 준위로 제대했으며, 현역에 있을 때에도 여러 개의 골프장 회원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의병전역, 보훈, 병무비리, 군 인사비리 등에서 암약했던 '전천후 인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그는 '민간 수사관'으로 활동하던 기간에 주위로부터 '요구 조건이 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았다고 한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98년 7월7일 출소해서 자식들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병무비리 수사팀을 맡고 있는 이명현 소령에게 전화했습니다. 자식들 앞에 떳떳한 아버지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면서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전부 고백했고, 수사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거창하게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저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거 좋지 않았던 일에 대한 빚을 갚고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자 했습니다."


김 씨가 활약하던 시기 군 내부에서는 "김 씨가 자신의 과거 행적을 덮기 위해 수사팀에 자원했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당시 수사팀에서 함께 활동했던 한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없었다면 병무비리 수사는 '꽝'이었습니다. 수사관들의 한계가 분명했고, 어떤 군의관도 잘모른다고 하면 더 이상 다그칠 수 있는 '전문성'도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김 씨가 수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일부에서 말하는 자신의 죄과를 덮을 수 있는 길이었지요.

그런데 그는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 잘못을 모두 솔직히 고백한 상태에서 수사팀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한푼도 받지 않으면서 거의 매일 밤을 새면서 병무비리를 근절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습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집니까. 혹시 그의 수사를 못마땅하게 느끼는 사람들 아닐까요. 병역비리를 파헤칠 경우 손해보는 사람 아닐까요."


'병역비리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김 씨는 요즘 참담한 심정이라고 한다.

"수사가 끝난 뒤 지금 나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법처리된 1000여 명의 사람들과 병역비리를 저지른 뒤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적입니다. 내 희생의 대가치곤 너무한 것 아닙니까. 내 주위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아요."

그는 이제부터 '병역비리를 덮으려는 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할 예정이다. 우리사회 판도라의 상자이기도 한 병역비리를 덮으려는 자가 여전히 득세하는 현실에서 병역비리를 수사한다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 싸움에서 고등학교 3학년의 딸과 중학교 1학년의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설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늘(21일) 발간된 주간 제3호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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