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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화화해위는 12일 오송회 사건이 독재정권의 불법연행과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78년 여름 조성용(뒷줄 가운데)씨가 군산제일고 교사로 재직할 당시 이광웅(뒷줄 오른쪽) 박정석(앉은 사람)교사 등과 함께 고창 선운사를 방문했다.

가끔 술자리 같은 데서 좌중으로부터 노래 한 곡조 부르라는 강압을 받으면, 내가 즐겨부르는 노래가 '금강선녀'이다. 속칭 '십팔번'인 셈이다.

우리 전래 가요인 이 노래를 나에게 가르쳐주었던 분이 바로 돌아가신 이광웅 선생이다. 이광웅 선생은 본래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교사이자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었는데, 1982년에 있었던 조작공안사건인 이른바 '오송회'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서 몇년 동안 옥고를 치른 후, 그 때 얻은 병으로 1992년에 세상을 뜨셨다.

1982년 겨울, 전북 군산의 제일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던 이광웅 선생을 비롯한 여덟 명과 교사 출신으로 당시 KBS 남원방송국에 근무하던 조성용 선생 등 도합 아홉 명의 선생님들이 전북도경 대공분실에 불법연행되어 20여일 동안의 모진 고문 끝에 '교사간첩단'으로 둔갑한 것이 바로 오송회 사건이다.

"월북한 오장환 시인의 <병든 서울>이라는 시집을 돌려봤다는 이유로 문학을 함께 논하던 교사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어요. 월북 시인의 글을 읽었다고 '빨갱이'라는 거예요. 잡혀간 교사들은 하나같이 발가벗긴 채 탁자에 통닭처럼 매달아놓고, 얼굴에 수건을 씌운 후 코에 물을 쏟아 붓기 시작했어요. 물고문은 그야말로 몸 풀기에 불과했죠."

월북시인의 시를 읽고 평소에 마음이 맞는 동료들끼리 문학과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는 죄 아닌 죄로 교사들이 하루아침에 간첩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성회'가 '오송회'로... 전형적인 조작 간첩사건

조직의 이름인 '오송회'(五松會)는 학교 뒷산 소나무 아래서 다섯 명이 처음 모여서 모임을 결성했다면서 경찰이 자기들 멋대로 갖다 붙인 이름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이 다섯 분의 선생님들이 전북 익산시에 있는 남성(南星)고등학교 출신들이라는 이유로 '오성회'라고 지었다가, 알고 보니 이 중 한 명은 그 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경찰이 부랴부랴 남성고의 '성'을 소나무 '송'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직의 이름이 붙은 유래만으로도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전형적인 고문조작 간첩사건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미 이 사건이 있기 전부터 이광웅 선생과 알고 지내는 처지이기도 하였지만, 나와 오송회 사건의 인연은 특히 남다르다.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982년 10월 무렵에 나도 후배들에게 의식화교육을 시켰다는 혐의로 군 보안부대에 끌려가서 1984년 봄의 이른바 '유화국면'까지 1년 5개월여 동안 징역을 살았다.

그런데 오송회 사건을 조작했던 경찰과 내가 잡혀갔던 군 보안부대 사이에 대형공안사건을 조작하는 실적경쟁을 벌인 끝에, 당시 교단에서 일기 시작한 교육민주화운동의 싹을 잘라야 한다는 정권의 판단에 따라서 오송회 사건이 더 부풀려지고 나의 사건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송회 사건이 없었더라면, 하마터면 나와 후배들이 '간첩단'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말 그대로 잡아다 족치면 간첩단이 만들어지던, 백색테러가 판치는 암흑시절이었다.

지난 12일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오송회 사건이 독재정권의 불법연행과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이 5공 시절 현실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교사들에 대하여 불법적인 장기구금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은 전형적인 조작사건으로 규정하였다.

아울러 불법감금과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한 경찰,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는 피해자들의 호소를 묵살하고 무리하게 기소한 검찰, 증거재판주의에 위반한 유죄판결를 내린 법원 등은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과 재심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하였다.

뒤늦게 무려 25년 만에 국가기구가 이 사건이 얼토당토 않는 조작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사필귀정이고 반가운 일이겠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가신 이광웅 선생, 차마 이 나라에 마음 붙이지 못하고 이국땅으로 떠나버린 전성원 선생, 문학에 대한 열정과 교육밖에 모르고 살다가 사반세기 동안 간첩이라는 무시무시한 누명을 쓰고 살아 백발이 성성해진 선생님들과 그 가족들.

▲ 오송회 사건으로 강제해직됐다 24년 만에 복직한 조성용씨.
ⓒ 박주현

그들의 청춘, 누가 되돌려 줄 수 있나

그들의 아름다웠던 삶과 팔팔했던 청춘을 누가, 무슨 수로 되돌려드릴 수 있을까? 이광웅 선생의 부인 김문자 화백은 말한다.

"살아있는 아름다운 것을 접할 때마다 아름다웠던 남편의 모습이 그리워 그림으로 그를 남기며 산다."

전북 군산의 금강하구둑 들머리에 서있는 이광웅 선생의 시비에는 그의 시 '목숨을 걸고'가 새겨져 있다.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그렇다. 이 땅에서 제대로 사람노릇하고 살려면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사람이 살면서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 원래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기며 산다.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좋은 세상이 될수록, 그 '당연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시대와 대결했던 사람들이 자꾸 잊혀져 간다.

덧붙이는 글 | 이광철 기자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입니다.


태그:#오송회, #의식화교육, #간첩단,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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