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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 부모님이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로 나와 남순이·현주·순덕이, 그리고 정화는 가방 하나 달랑 챙겨서 동네 언니들이 그랬듯이 미순이 언니의 소개로 봉제공장에 취직을 했다.

중학교 졸업식도 하기 전에 언니에게 취직을 부탁해 놓은 터라 졸업을 하자마자 우린 바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고,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종일 공장에서 지내게 되었다.

퇴근 후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꼭 경비 아저씨에게 허락을 받고 나갔고, 시간 엄수해서 기숙사로 들어와야 했다. 야근은 기본이었고 밤을 새워서 이틀씩 밤샘을 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꼴에 뮤지컬은... 미싱이나 잘 돌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밤을 새워서 일을 하다 배가 고프면 미리 사다두었던 식빵을 반장언니 몰래 먹었다. 그냥 먹으면 맛이 없으니, 미싱(재봉)사 보조를 하던 우리는 다리미 밑에 식빵을 놓고 눌러서 식빵이 노릇노릇해지면 먹었다. 다리미가 더럽다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배가 고팠다. 우리들은 그 식빵을 먹으며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게 먹었고 행복해했다.

공장에서는 1년 정도 보조로 일을 하게 하고 미싱을 가르쳤다. 그리고 '제일 못하는 사람은 C급, 그 위를 B급, 제일 잘하는 사람은 A급'이라고 등급을 매겼다.

"A급이 되려면 바늘에 손을 수도 없이 찔려봐야 한다"며 과장님은 우리에게 조회 시간마다 겁을 줬고, 난 정말로 바늘에 손가락을 수도 없이 찔리면서 그들이 정해 놓은 A급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기술이 오른 만큼 월급이 오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생활하니 지겨웠다. 날마다 돌려야 하는 재봉틀을 보는 것도 지겨웠고, 재봉틀 소리 때문에 귀도 먹먹해지고, 서로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는 것도 지겨웠고, 날마다 공장이나 공장 주위에서만 맴도는 우리의 생활이 지겨웠다.

난 머리도 식힐 겸 바깥세상 구경을 좀 하자고 친구들을 꼬드겼다. 친구들도 좋다고 하기에 내가 제안했다.

"요즘 신애라가 주연하는 뮤지컬이 재미있다고 텔레비전에서 난리더라. 그거 꼭 보고 싶은데 우리 돈 모아서 갈래?"

생전 뮤지컬이란 건 구경도 못해본 '촌년'이라 불리던 친구들도 좋다고 손뼉을 쳤다. 그 때까지 우린 너무나 행복했다. 더 이상 '촌년'이라 불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서울 생활을 몇 년 했기에 도시 여성이라도 된 듯 행복했다. 뮤지컬 가격이 얼만지 어떻게 예매하는지도 모르고 우린 벌써 뮤지컬을 본 것처럼 떠들었다.

너무나 행복한 우리 뒤에서 비수를 꽂는 소리가 들렸다. 과장님이었다.

"야, 공순이들아 니넨 미싱이나 잘 돌려. 꼴에 무슨 뮤지컬이냐? 텔레비전이나 잘 봐라, 참 내…."

들떠 있는 우리에게 주제 파악하라는 듯,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쳐다보며 그가 한 말이었다. 왜 그 말에 우린 바보같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을까. 왜 우린 또 바보같이 뮤지컬을 보러 가지 못했을까.

원래도 싫었지만 그 후론 과장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죽어라 일하는 우리를 '촌년'이라고 부르며 무시하고, '공순이'라고 부르며 또 무시하는 관리자들이 싫었다. 회사를 옮겨다녀 봐도 마찬가지였다.

눈 딱 감고, 가자~ 바다로!

▲ 경포대해수욕장
ⓒ 김대갑
우린 어느 날 밤, 잠을 자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린 끝에 관리자들도 골려주고 우리도 즐기자며 무작정 바다로 떠나자고 약속을 했다. 3일에 걸쳐 가방에 짐을 하나씩 챙겼다. 재봉틀을 밟으면서도 바다로 떠날 생각에 마음은 벌써 바다에 가 있었고, 관리자한테 혼날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스스로 위안을 했다.

드디어 3일이 지나고 경비아저씨에게 "슈퍼에 잠깐 나갔다 오겠다" 하고 나와 남순이·현주·순덕이, 그리고 정화는 기숙사를 나왔다. 가방은 당연히 담 너머에 던져두고 나왔기에 경비실을 순순히 통과할 수 있었고, 회사를 나오자마자 세상은 다 우리 것이었다.

"야, 그런데 기차 타려면 어디로 가야하냐?"
"어디 바다로 갈 건데?"
"막상 나오니까 무섭다. 가슴도 두근거리고…. 그냥 들어가자."


의견이 분분했지만 기왕 나온 거 눈 딱 감고 바다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아무 대책도 없이 나온 우린 청량리에 가면 경포대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어물어 청량리역까지 가서 경포대로 가는 완행열차를 탔다.

기차 차창 밖으로 지나는 세상은 참 넓기도 넓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공장이란 틀 안에 박혀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된 신세를 한탄도 하다가 누군가 내뱉는 말 한마디에도 까르르 웃어 제치는 우린 '공순이'라고만 불리기엔 너무 억울한 스무살 꽃다운 나이였던 것이다.

삶은 계란을 사서 사이다와 먹으며 웃다가, 또 회사에 가면 혼날 일이 무서워서 두려워도 하며, 우린 경포대로 덜컹대며 가는 완행열차 안에서 왁자지껄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갔을까 열차는 경포대에 도착했고, 사람들에게 물으니 "택시를 타고 조금만 가면 경포대 해수욕장이 나오고 민박집도 있다" 하기에 우린 택시를 잡아타고 꿈의 궁전일 것 같은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바닷가에 있는 민박집에 내려주기에 우린 그곳에 짐을 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바다로 나갔다. 겨울이라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좋았다. 우린 두꺼운 점퍼를 입은 채로 두 팔을 벌리고 바닷가를 뛰어다녔다. 모래 속에 신발이 빠져도 좋았다.

철없는 우리만큼 철없이 파도도 뛰었고 바닷가에 서 있는 앙상한 나무들도 우리와 함께 뛰어노는 듯했다. 우린 그 곳에서 공순이가 아니라 바닷가의 아름다운 인어공주가 되어있었다.

횟집에 가서 회도 먹고 노래방에도 가고 오징어도 사서 가방에 꾹꾹 넣었다. 한없이 바닷길을 걷기도 했으며, 지나가는 군인들이 보내는 휘파람 소리에도 까르르 웃으며 화답했다. 정박해 놓은 폐선 위에서 사진도 찍고,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빙빙 돌다가 달리다가 넘어져도 좋았다.

"우리 서울 가지 말고 그냥 이 곳에서 회사 취직하고 살까?"하는 순덕이 말에 우린 그러자고 농담을 하고 또 깔깔대며 배꼽 잡고 얼마나 웃었던가.

경포대 가는 열차는 '행복행', 서울 가는 기차는 '지옥행'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3일째 되는 날, 우린 짐을 싸서 서울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다. 지금까지의 자유는 벌써 달아난 지 오래고, 우린 이제 감옥에 곧 끌려갈 죄수처럼 굳어 있었다.

"우리 이제 공장에서 잘리는 거 아냐?"
"잘리면 다른데 가지 뭐."
"무서워 죽겠다. 반장이랑 과장이 지랄할 텐데."


경포대로 가는 열차는 '행복행'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같은 열차인데도 서울로 가는 기차는 '지옥행'이었다. 우린 계란도 사먹지 않았고 사이다도 먹지 않았다. 가방에 넣어 두었던 오징어만 잘근잘근 씹어 먹으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서울에 도착하니 아직 근무시간이었고 우린 한참을 공장 주위를 맴돌다가 두려운 마음 가득 안고 공장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우린 사무실로 불려갔고 죄인처럼 과장 앞에 일렬로 서서 고개를 숙였다.

반장과 과장은 번갈아가며 우릴 야단쳤고 남순이와 현주는 훌쩍거렸다. 다행히 해고를 당하진 않았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일 잘하는 미싱사들이 다 빠져서 반장하고 과장이 엄청 애를 먹었다고 했다.

우린 또 고소해서 웃고 "거봐라, 공순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하고 또 키득거렸다. 18년 전, '무식한 공순이'라 불리던 우리들의 스무 살의 열차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


태그:#경포대해수욕장, #공순이, #봉제공장, #제봉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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