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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나무
라캉이란 이름을 글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약 5년 전이었다. 그 영향력에 비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너무 늦은 것 같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 때문에 5년 전 공들여 읽은 라캉에 대한 지식을 그 맥을 잇지 못하고 끊어 두고 있었다.

그러다 역시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알게 된 철학자가 지젝이며, 지젝의 최대 관심사가 라캉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쯤 되어서야 라캉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이해의 폭을 넓혀 놓으면 책읽기나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라캉은 프로이트나 니체, 마르크스만큼이나 현대의 중요한 이론가자 사상가다. 시기적으로는 다른 세 명에 비해서 이후의 인물이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인물이지만 현대의 인문학 일반, 문화이론, 영화비평 등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물론, 그의 사상의 본령인 정신분석학 분야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최근의 문화이론과 영화이론 등지에서는 라캉이 인용되지 않는 경우를 못 찾을 정도라고 한다. 최근 국내의 C영화지에서 시행한 평론상 수상에서 "라캉을 인용하지 않고는 영화비평을 할 수 없는가?"라고 말했을 정도이며, 세계적인 S영화잡지에서는 라캉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적 영화비평가 그룹이 있을 정도다.

라캉 이론의 에센스들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다

@BRI@라캉은 생전에 딱 한 권의 책만을 남겼고, 그의 이론의 대부분은 생애 내내 동료 연구자, 제자들과 진행한 세미나기록, 임상연구기록에 남아있다. '에크리'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아직 영문으로도 완역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워낙에 방대하고 난해한 그의 이론과 글쓰기의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연구자와 저자들이 라캉에 관한 개설서나 읽기 형식의 책을 대단히 많이 내놓았다. 숀 호머의 <라캉읽기>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라캉읽기를 읽기 위한 라캉읽기'라는 점이다. 즉, 아직 초보자들에게 라캉의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한국어 번역본이 드물기도 하지만 워낙에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여타의 라캉 개론이나 라캉읽기를 읽는 것이 초보자에게는 적당하고, 그전에 '에피타이저'로 읽을 만한 책이 숀 호머의 <라캉읽기>다.

그러나 숀 호머의 <라캉읽기>를 얇고 작은 책이라서 얕봐서는 안 된다. 이 책에는 라캉 이론의 구조가 잘 설명되어 있고, 주요 용어를 중심으로 그의 이론의 에센스가 잘 저며져 있다. 더구나 번역자 김서영이 일반번역자가 아닌 국내에서는 제법 알려진 라캉 전공자라서 번역이 굉장히 충실하고 좋다는 점도 이 책의 미덕이다.

숀 호머의 <라캉일기>는 꼭 라캉의 이론을 교조적으로 다룬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라캉을 가운데 둔 의미망의 그물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여러 인물들, 예를 들면, 지젝, 크리에스테바, 아리가리, 버틀러 등의 이론도 작은 분량이지만 소개되어 있다.

그 외 특이할 만한 점은 라캉이 직접 취급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론의 신봉자들이 취급하는 분야인 문화이론과 영화비평도 상당한 부분 소개되어 있어서 책읽기의 즐거움을 배가된다.

한 가지 흠이자 천만다행 한 점은 그의 생애 후기에 소개되는 수학이론을 사용한 여러 설명들이 이 책에는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난삽한 부분이 생략된 이유는 숀 호머의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이 라캉읽기의 맛보기이고, 실용목적상 문화이론이나 영화비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더 진보된 라캉읽기를 원한다면 책 뒤에 소개된 목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라캉이론의 에센스 몇 가지 소개

라캉이론은 사실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생애에 걸쳐 진화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리고 워낙 난해하고 요약을 거부하는 그의 이론의 특성, 원래 정신분석학의 임상소견에서 출발했다는 특성 탓에, 재차 그의 이론을 옮겨적는 사람은 굉장히 임의적(?)으로 요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캉의 이론은 보통 상상계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한다. 어린이가 거울을 보면서 파편화된 것으로서의 자아의 이미지를 확보한다. 그러나 그 자아라는 것은 굉장히 파편화되고 비조직화된 것이다. 우리가 통상, 자아를 통일된 실체로 알고 있는 데에 반하여 라캉의 자아란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자아는 유아기 내내 상상계라고 부르는 동화적인 세계 속을 산다.

그러나 언어를 습득하고,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징계라고 불리는 단계에 진입을 한다. 거칠게 말하면, '언어=상징계'라고 까지 할 수 있는데, 구조주의 사유의 영향을 받은 라캉에게 언어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아다시피 언어는 구조화되어 있는데, 라캉에 따르면,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그의 이론과 프로이트의 이론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또 등장하는 것이 실재계와 대상a의 개념이다. 실재계란 상징계 바깥에서 심연처럼 상징계를 지탱하기도 하며, 또는 실재계의 잔여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개념이다. 이렇게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라캉이론의 기본개념이다.

그리고 추가되는 것이 팔루스와 성차의 개념인데, 이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팔루스는 프로이트 이론의 '남근'과는 의미상 차이를 가진다.

아이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미워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아버지에 의한 거세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럴 수가 없고 아이는 성인이 되고 다른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공포증에 대한 이론이다. 그런데 라캉에 의하면, 이 팔루스(또는 남근)은 의미가 발전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버지가 존재하며, 팔루스는 의미가 확대되어 해석된다. 팔루스는 일종의 욕망의 대상이다. 팔루스는 단지, 남근으로서만 이해하면 곤란하고, 욕망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베일'이라고 불리는 것 뒤에 팔루스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 욕망의 본질이 숨어 있다. 아이가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사회에서 욕망의 실현은 무한정 지연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지젝같은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와 연관시켜 자본주의적 모순을 설명하는 데에도 응용한다.

팔루스와 성차에 관한 이론 때문에 라캉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당하기도 하는데, 숀 호머에 의하면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라캉의 이론은 이외에도 아주 다양한 내용들이 많고, 특히 영화비평이나 문화이론으로 응용을 하면 정말 재미있는 글들이 많다. 관심 있는 분들의 독서를 권한다.

라캉 읽기

숀 호머 지음, 김서영 옮김, 은행나무(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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