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마리의 모습

로즈마리의 모습 ⓒ 로만 폴란스키


상암동엔 국내 유일의 시네마테크가 있다. 그곳엔 국내외의 영화들이 DVD, 비디오 자료로 소장이 되어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최근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두 편을 관람했다. 그 중 하나가 <악마의 씨>다.

로만 폴란스키는 1933년 프랑스 생으로 <물 속의 칼>, <비터문>, <테스>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고 최근에는 2002년작 <피아니스트>로 소개되었다. <악마의 씨>는 1968년작으로 미국작가 아이라 레빈의 소설 <로지마리의 아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69년에 폴란스키 감독의 아내이자 유명한 여배우였던 샤론 테이트가 만삭이었을 때 자칭 악마 숭배자인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했는데, 그들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악마의 씨>를 신봉했다고 한다.

1966년 6월 적 그리스도의 어머니, 로즈마리

영화는 대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로즈마리가 악마의 아기를 배고 낳을 때까지 발생하는 일을 보여준다. 원작에서는 로즈마리가 1966년 6월(666)에 태어나는 적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끔찍한 사실로 등장한다.

영화에는 잔혹한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최근의 공포영화가 잔혹한 장면으로 승부를 하는 것과는 달리 <악마의 씨>는 관객을 계속 흡수하는 트릭과 미스터리로 승부한다. <악마의 씨>에서 관심을 끄는 것 중의 하나는 '속임수'다.

이교도들이 로즈마리를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기 위해서 하는 속임수와 거기에 대항하는 로즈마리. 이 대립적 구도는 정말 볼 만하다. 특히 통속적 영화와 다른 점은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는 다는 점이다. 영화 보는 동안 자신이 이해한 것과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정말 일치하는가 의심을 하게 된다. 

벽 넘어 들리는 소음, 불연듯 나타난 이웃, 전화박스 박으로 들리는 차 경적 등. 영화를 고도의 심리적 게임으로 만드는 장치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감독은 확인을 거부한다. 어쩌면 로즈마리가 틀렸을지 모른다. 아니면 로즈마리의 심리궤적을 경험하는(동일시) 내가 틀렸을지 모른다.

비가시성의 게임과 불가역적인 공포

영화의 라스트 시퀸스는 칼을 든 로즈마리가 이교도의 공간에 침입을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로즈마리는 출산을 하였다. 통속적인 할리우드 공포영화라면 악마를 불러내는 의식이 집행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아니다.

영화의 공간은 마치 사교클럽과 같다. 이교도의 사교행사라는 형용모순이 등장할 차례다. <악마의 씨>의 공포는 절대 가시적이지 않다는 것은 라스트 시퀸스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그렇다고, <엑소시스트> 류의 음산함도 아니다.

관객에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꺼림직함을 밀어넣는 방법을 사용한다. 정상사회와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그들의 지독한 비정상성. 약간 틀어져서 제시되는 비정상성이 그들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라스트 시퀸스의 공포감은 '로즈마리의 아기'를 묘사하는 언어와 관계있다. 그러나, 언어가 지칭하는 참조(reference)는 비가시성의 세계에 존재한다. 영화가 끝나도록 관객의 호기심은 결국 충족되지 않는다.

공포는 심연과 같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알 수 없고 호기심이 작동한다는 그 상태는 다른 종류의 공포심을 가져온다. 그런 종류의 공포는 사람을 대상화하는 공포와는 조금 다르다. 공포를 통해서 불가역성을 경험해 보는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