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원고는 '대추리 36.5℃'라는 제목으로 계간 <황해문화> 가을호에 실린 글과 사진입니다. 서점에 배포된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따끈한' 원고를 <오마이뉴스>에 전재하는 것은, 대추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의한 폭력의 문제를 더 널리 알리고,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황해문화> 편집진의 이해와 의지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130매 가량의 긴 원고인 까닭에 4편의 이어진 기사로 나누어 싣습니다. <편집자주>
▲ 작전명 '여명의 황새울'은 새벽 5시에 시작됐다. 구름처럼 몰려든 진압경찰과 미군기지 안에서 '작전상황'을 지켜보는 군경 지휘관들.
ⓒ 노순택
아직도 할 말이 남았다. 우릴, 그냥 내버려다오. 바라는 것은 이 뿐이다.

당신들이 빼앗아간 봄은 아직 대추리에 오지 않았다. 장맛비가 몰아치는 이 여름에도 우리는 지난 겨울의 칼바람에 몸서리를 친다.

관련
기사
②협상 테이블에 한국편은 없었다


1. 역사적 국책사업 앞에서

작전명 '여명의 황새울'은 새벽 5시에 전개됐다. 윤광웅 국방장관이 긴급기자회견을 자청해 "역사적 국책사업을 집행하는데, 더 이상의 기다림은 없을 것"이라는 단호한 의지를 밝힌 지 불과 스무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캠프 험프리 안에 집결한 경찰병력의 움직임이 빨라지는가 싶더니, 하늘에서 수십 대의 블랙호크(UH-60) 헬리콥터가 굉음을 울리며 대추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포크레인을 앞세운 용역깡패들은 방패와 몽둥이를 든 무장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마을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대나무 막대기를 든 청년들이 마을 진입로에서 이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채 1분도 버티지 못하고 물러서기 시작해 결국 대추분교 운동장으로 쫓겨 들어갔다. 대추리·도두리를 감싸고 있는 너른 들녘은 군인들에 의해 순식간에 장악됐다.

군 작전은 치밀했다. 경찰과 용역깡패들이 마을을 포위하는 사이, 군 병력은 트럭과 배를 이용해 들녘으로 진입했고, 공병대는 헬리콥터가 실어 나른 철조망을 사방에 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군 막사와 초소가 들어섰다. 이것이 이른바 '군사시설물'이었고, 국방부는 관계법령까지 어겨가며 기습적으로 이 지역을 '군사시설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푸른 보리밭이 짓이겨졌고, 볍씨를 뿌려두었던 논은 마구 파헤쳐졌다. 그 따위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정부는 이날의 작전을 위해 경찰 115개 중대 1만2000여명, 수도군단과 700특공연대 2800여명, 용역업체 직원 700여명을 동원했다. 작은 농촌마을은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대추분교 지붕 위로 올라가 농성하며 병력철수를 외쳤다. 대추분교를 포위한 경찰과 용역깡패들은 당장이라도 대추분교 안으로 진입할 태세였다. 마을주민·노동자·학생으로 구성된 '지킴이'들이 학교를 지키기 위해 죽봉을 들고 맞섰으나, 사방을 에워싸고 좁혀드는 공권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단 한 번의 '침탈'로 대추분교 운동장은 시커먼 무장경찰로 가득 찼다. 청년들은 학교건물 안으로 쫓겨 들어가며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다. 미처 건물 안으로 피하지지 못한 학생들의 머리 위로 몽둥이와 방패가 날아들었다.

피가 터지고, 살점이 튀었다. 욕지기가 난무하고, "위급한 부상자들을 응급후송하게 해 달라"는 호소와 절규도 이어졌다. 얼굴은 온통 피와 흙과 눈물의 뒤범벅이었다. 생지옥을 방불케 했던 '토끼몰이' 사냥은 성공적이었다.

▲ 강제집행은 문자 그대로 '토끼사냥'이었다. 미처 건물 안으로 피하지 못한 청년들은 경찰에 포위된 상태에서 방패와 몽둥이세례를 받아야 했다. "제발, 응급환자를 후송하게 해달라"는 절규도 이어졌다.
ⓒ 노순택
'지킴이'들을 무장해제시킨 경찰은 대추분교 2층 교실로 쫓긴 노동자 학생들을 모두 연행했다. "아이고, 이 썩을 놈들아, 저 젊은이들이 무슨 죄를 졌다고, 저렇게 죽도록 패고, 또 끌고 가느냐, 이놈들아, 이놈들아…" 늙은 농부들이 경찰을 붙들고 울며 하소연했지만, 아무도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대추분교 지붕 위에서 버티던 문정현 신부는 "연행자들을 모두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거듭 확인하고서야 오후 5시쯤 옥상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경찰의 약속은 거짓이었다. 이날을 전후해 600여명의 연행자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200여명이 입건, 40여명에게는 '특수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부상자만 200여명에 달했다.

끝까지 버티던 '최후의 13인'이 지붕에서 내려오자, 경찰은 곧바로 대추분교를 허물기 시작했다. 아름드리나무와 미끄럼틀과 그네가 단박에 뽑혀 나갔고, 콩과 보리와 쌀을 모아 주민 스스로 지었던 대추분교는 뿌연 먼지를 내뿜으며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뛰놀던 너른 마당, 그 아이들이 자라 듬직한 청년이 되는 걸 지켜봐왔던 작은 학교는 쓰린 추억만 남긴 채 돌무더기로 변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쟁같은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경찰과 국방부 간부들은 놀라움과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예상을 뛰어넘는 작전 성공에 서로를 치하했고, 느지막이 현장을 찾은 손학규 경기도지사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이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대추리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집 밖은 아비규환이었다. 대추리에, 어린이날은 없었다. '역사적 국책사업'이라는 성스러운 나랏일에 어린이날 따위가 무슨 걸림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두고도 있었다. 대추리에, 부처님의 자비는 스며들지 않았다.

2. 흙냄새가 그렇게 맡고 싶어? 이리와, 내가 묻어줄게

▲ 정든 대추분교가 어이없이 무너지고, 논밭이 파헤쳐지는 걸 보며 이호순 할머니는 길바닥에 누워 울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어,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천주님을 원망도 해 보았다.
ⓒ 노순택
내년이면 칠순이 되는 이호순 할머니는 대추리 144번지에 살고 있다. 경기도 광주 도척면 상임리 시오골에서 스물다섯살에 시집을 왔다. 대추리가 고향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아 오순도순 살아왔다. 할아버지는 2001년에 돌아가셨다.

대대로 가톨릭을 믿어왔던 터라 할머니의 신앙심도 깊다. 그 때문이었을까, 하나 있는 딸아이가 수녀가 되겠다고 했을 때, 할머니는 말리지 않았다. 천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기도하는 예쁜 수녀님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큰 아들은 출가해 대처에 나가 살고, 장가 안간 막내아들을 뒷바라지하며 살고 있다. 한 오백평 농사를 짓는다.

"사실은 딸이 하나 더 있었어. 시집 온 이듬해 아이를 낳았는데, 백일도 안돼 죽고 말았지 뭐야. 비행기 소리가 오죽 커야 말이지. 어른들도 매일 놀라는데. 그 어린 것이 깜짝깜짝 놀라더니, 시름시름 앓다가 죽더라고…. 막내는 둔포에서 직장을 다녀. 우리 아들이 어디 내놔도 빠지지는 않는데, 어서 결혼을 시켜야지."

조용한 성격의 할머니는 길바닥에서 열린 미사에서 울었다. 논바닥에서 열린 미사에서도 울었고, 비닐하우스에서 열린 미사에서도 울었다. 대추리를 접수하러 온 무장경찰을 붙들고도 울었다.

"왜 울긴, 너무 기가 막혀서 울었지. 너무 마음이 아파 울었지. 큰일이야, 나라에서 아무리 뭐라 해도 끝까지 함께 남아야 할 텐데, 벌써 절반은 나가고 절반만 남았으니. 앞으로 더 나가는 집이 없으면 좀 낫겠는데, 사람 마음이 어디 내 맘 같기만 한가. 지금은 누구하고 터놓고 말할 사람이 없어, 저놈들이 자꾸 이간질을 하니까 마음 한구석이 께름칙해. 우리 동네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촛불집회 나가면 나는 늘 앞에 앉거든. 그런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돼. 오늘은 누가 나왔나, 누가 안 나왔나. 큰일이여. 내가 통 욕할 줄 몰랐는데, 요즘은 자꾸 욕이 나와. 아주 입에 뱄어."

사람들이 나가면서 빈 땅이 늘었고, "어찌 됐건 땅을 놀려서는 안 된다"는 주민대책위의 뜻에 따라 할머니도 얼마간의 땅을 배정받았다. 바람부는 4월, 할머니는 몇날며칠을 들에 나가 불을 놓았다. 그리고 씨앗을 뿌렸다. 그 땅이 5월 4일, 군부대가 투입되면서 가장 먼저 파헤쳐졌다.

할머니는 전투경찰의 군홧발을 붙들고 울었다. "대체 무슨 원수를 졌기에, 우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죽이려 드느냐"며 길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너무 울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까지, 할머니는 울고 또 울었다. 할머니의 세례명은 막달레나다.

▲ 지난 1월, 이민강 이옥순 부부는 실로 몇 년 만에 다정하게 부부사진을 찍었다. 대추리 노인회 단체사진을 찍고 난 직후였다. 길 가던 노인들이 한마디씩을 빼놓지 않다. "아이고, 두 늙은이들이 다정하게도 찍는다." 이민강 할아버지는 마냥 좋았다.
ⓒ 노순택
예순여섯 살 이민강 할아버지는 대추리를 대표하는 노래꾼이다. 이웃동네 안중에서 8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던 그는 간신히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형제들 뒷바라지에 나서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개도 안 먹는 걸 먹으며" 8년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머슴살이 십년 하면, 장가도 못 간다'는 말을 듣고 스물일곱 나이에 논 스무 마지기를 마련해 결혼하면서 대추리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다가 사기를 당해 빚에 몰리고 아내마저 신장수술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잠시 환경미화원으로 나섰다. 일이 어찌나 고되던지, 그걸 잊어보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노래가 이제는 그의 장기가 됐다.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세 곡은 기본이요, 한 곡을 불러도 온 몸에서 우러나오는 열창으로 듣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다.

이민강 할아버지의 인사법은 구수하다. 누구를 만나건, 언제 만나건, 하루에 몇 번을 만나건, 밥을 먹었는지부터 묻는다. "밥 먹었어?"가 아예 입에 뱄다. 이것이 '이민강의 사람 챙기는 법'이다.

그는 700일이 넘도록 이어지는 촛불집회에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아들 둘, 딸 하나를 건강하게 키워준 고마운 땅이었다. 아내 몫까지 갖은 고생을 다하며 일군 땅이었다. 그의 피와 땀 냄새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땅이었다. 40년 인생을 모두 바쳐 옥답을 일궜다.

"이런 땅을 내가 어떻게 내줘. 50년간 우리 피를 빨아 먹고도 대체 뭐가 더 부족한 거여. 자다가도 나는 잠이 안 와. 개는 집이라도 지키잖아, 삶아서라도 먹잖아, 도둑이라도 잡잖아. 대체 이 나라 정부는 개보다 나은 게 뭐냔 말여."

지난 3월 15일, 강제집행에 나선 용역깡패들에 맞서 이민강 할아버지는 포크레인 바퀴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제발, 이 땅에서 죽게 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그에게 돌아온 대답이 이러했다. "흙냄새가 그렇게 맡고 싶어? 이리와, 내가 묻어줄게!" 이것이 이 나라의 역사적 국책사업을 집행하러온 자들이 늙은 농부에게 내뱉은 언어였다.

며칠 뒤, 그에게 우편물 하나가 날아왔다. 그의 '특수공무집행방해죄'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보낸 출석통지서였다.

▲ 미군기지반대운동의 지도자가 되어버린 '도두리 새마을 지도자' 한승철 씨 가족. 이번에도 이주하면 3대가 강제이주의 설움을 겪어야 할 판이다. "아버지가 고향을 잃고, 나도 고향을 잃었는데, 우리 새끼들마저 고향을 잃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냐"며 한승철 지도자는 한숨을 내쉰다.
ⓒ 노순택
쉰한 살 한승철씨는 도두리의 새마을 지도자다. 마을에서는 그를 '한승철 지도자'라고 부르지, 그냥 '한승철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는 것도 많은데다,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일벌레여서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다.

그의 집 마루에는 그의 농사꾼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증거'가 수두룩하다. 사방의 벽에 이 나라 농업정책자들이 그에게 수여한 상장이 빼곡하다 못해 아예 도배질 되어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새마을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다. 이 나라가 추진하는 농업정책에 어떻게든 발을 맞춰보려 했고, 성과를 달성하고자 밤낮없이 일했다. 그러한 노력이 그를 언제나 '으뜸 농민'이게 했다.

"나는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군말 없이 따랐던 사람이여. 불평하느니 차라리 일하자,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여. 여기 상장 좀 봐요. 나는 공짜로 받은 상이 하나도 없어요. 정말 죽어라 농사짓고, 그 성과를 이뤘다고, 모범 농사꾼이라고 받은 상장이란 말이지. 그런 나한테 정부가 이렇게 배신을 하면 되겠어요? 나라일 한 번도 거스르지 않고 살아온 내가 무슨 죄를 지어 하루아침에 정든 땅에서 쫓겨나야 한단 말이오.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없이, 나라에서 하는 일이면 무식한 농사꾼들은 다 들어줘야 하느냔 말이지.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땅을 비워줘야 한다, 하다못해 우리나라 군대를 위해 땅을 비워줘야 한다, 그러면 받아들일 용의도 있어요. 그런데 이거는 그게 아니잖아. 왜 남의 나라 전쟁기지를 짓는데, 농사꾼들이 정든 고향에서 쫓겨나야 하냔 말이여. 여기 땅은 그냥 땅이 아니에요, 지게지고 흙을 퍼다가 피땀을 바쳐서 일군 땅이란 말이오. 이제 겨우 살 만한데…."

스물일곱살에 이발소 주인의 중매로 아내 김영숙(49)씨를 만나 도두리에 둥지를 튼 한승철 지도자는 결혼 2년 만에 딸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그 딸아이는 지금 부모 곁에 없다.

"그 때는 모두가 힘들었어. 다들 죽을 똥, 살 똥 하면서 살았던겨. 애들을 돌 볼 틈이 있나. 힘있는 사람들은 모두 농사일에 매달려야 하는데. 어린애들은 논가 광주리에 넣어 두거나, 나무 아래 끈으로 묶어두거나 그랬다고. 사람 사는 게 아주 비참했어요. 하루는 모심기를 하고, 애를 돌아보는데 애가 안 보이는 거야. 그 녀석이 네 살배기였는데, 수로에 빠져 죽어 있습디다. 내가 그렇게 애를 잃었소. 그렇게 해서 일군 땅이오. 이 마을 사람들, 다들 이런 한을 가지고 살아왔어요."

한승철 지도자의 부친 한정선(78) 할아버지는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나 전쟁 통에 피난을 내려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북에 두고 온 아내와 1남4녀의 자식들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스물여덟살에 다시 결혼에 가정을 꾸리고 청주에 정착했지만, 대청댐이 들어서는 바람에 정든 정착지를 등지고 도두리로 이사했다.

"대청댐 수몰지역이 내 고향이오. 우리 아버지가 전쟁으로 고향을 잃었고, 나는 댐이 들어서는 바람에 고향을 잃었소. 그런데 이제 내 새끼들까지 고향을 잃어야 하겠냔 말이오. 무신 팔자가 이리도 억세서 3대에 걸쳐 고향을 잃어야 하느냔 말이지. 내 젊음을 다 바쳐 이 땅을 일궜고 새끼들 낳아 길렀으니, 이젠 여기가 내 고향인데."

한승철 새마을 지도자는 지금, 미군기지확장반대 주민대책위의 지도자가 되어 있다.

▲ 대추리의 큰 어른이자, 산 역사인 조선례 할머니. 할머니는 1952년의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그날의 소름끼치는 일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할머니의 옛집 위에서 지금은 미군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지금 대추리는 진짜 대추리가 아니다. 밀리고 밀려와 가까스로 터를 잡은 가짜 대추리다.
ⓒ 노순택
아흔을 바라보는 조선례 할머니는 대추리의 큰 어른이자 산 역사다. 어느새 노인이 되어버린 아들(민병대, 오정환 부부) 내외와 손주, 증손주와 함께 4대가 모여 살고 있다. 천안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933년 이곳 대추리로 시집왔다. 73년을 황새울 들녘에서 살았다.

일본군(302 해군시설대)이 비행장을 짓겠다고 "그 생지랄을 다 하던 것을" 할머니는 기억한다. 해방이 되어 이제 살았다 싶었는데, 전쟁이 터지고 갑자기 들이닥친 미군은 일본군보다 더 했다.

1952년 매섭던 겨울, 마을은 미군 불도저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세간을 챙길 틈도 없었다. 조상을 모셔둔 산소를 챙길 수도 없었다. 누구의 조상인지 알 수도 없는 봉분들이 미군 불도저에 떠밀려 이리저리 섞여 버렸다. 초가집이 부서지고, 애써 일군 논밭은 짓이겨졌다. "여러분의 나라를 구해주기 위해 왔다"는 미군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산 아래로 기어들어가 움막을 짓고,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했다. 노인들이 놀란 가슴에 멍이 들어 죽고, 아이들은 배가 고파 죽었다.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기만 했지, 한 마디 대꾸할 줄 몰랐다. 보상? 그런 건 생각도 못했다.

할머니의 옛집 위에서 지금은 미군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지금 대추리는 진짜 대추리가 아니다. 밀리고 밀려와 가까스로 터를 잡은 가짜 대추리다. 옛 대추리를 그리는 할머니의 꿈은 미군을 섬기는 이 땅에서 불온하다.

"내가 어서 죽어야 하는데, 큰일이야. 그런 꼴을 어찌 또 보누? 어서 죽어야지, 어서 죽어야지. 그런 꼴 안 보고 죽는 게 내 소원이야, 내 소원…."

대추리 도두리의 늙은 농부들이 품고 살아온, 오징어 먹물보다 새까맣게 타버린 가슴 속 사연들은 너나가 따로 없다.

덧붙이는 글 | 가옥 강제철거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대추리 도두리에는 애타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온 생애를 들녘에 바쳐 온 늙은 농부들의 삶이 이대로 파괴된다면, 우리사회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할 것입니다.

아직 '양심의 명령'을 지킬 시간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오는 9월 24일에는 '사람을 먹여 살려온 들녘을, 사람 죽이는 전쟁기지로 만들지 않기 위한' 4차 평화대행진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황새울의 평화를 위해 힘과 뜻을 모아주십시오.

여러분을 9.24 평화대행진 ‘10만 준비위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클릭)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