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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1일자 1면 톱기사. 한·미 FTA를 둘러싼 논란을 '친노진영의 분열'로 묘사하고 있다.
ⓒ 조선 PDF

흥미로운가 보다. 1면과 종합면 머리를 할애해 한·미 FTA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FTA 자체가 아니다. FTA를 둘러싼 동향이다. <조선일보>의 보도가 그렇다.

<조선일보>의 보도태도는 '강 건너 불구경'이다. '친노 진영'과 '20년 동지'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는 게 보도의 뼈대다.

"이 정권 법조계 인맥의 뿌리"인 민변, "한명숙 총리 후보가 회장을 지낸" 여성민우회는 물론, 노사모 대표까지 한결같이 "FTA 반대"를 외친다고 전한 <조선일보>는 관전 포인트까지 제시했다. "FTA 추진을 둘러싼 범여권 내부의 균열은 특정 정책을 놓고 집권층이 둘로 쫙 갈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며 특히 협상 시한(내년 3월)이 정당의 대선후보 경선과 맞물리는 시점이라는 점에 주목하라고 했다.

<조선일보>의 이런 보도태도는 낯설지 않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합의 논란이 빚어졌을 때도 <조선일보>는 '강경 자주파'와 '온건 자주파'의 대립으로 묘사했다.

<조선일보>가 권력 게임, 또는 자중지란으로 묘사한 논란엔 공통점이 있다. 정책의 향배에 따라 국익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맞상대가 미국이라는 점이다.

<조선일보>는 유독 이런 경우에 논란 그 자체보다는 논란의 표피를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왜일까? 아니, '왜'를 묻기 전에 <조선일보>의 이런 보도태도가 옳은지를 가르자. 보도 여파가 안 좋게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조선>은 논란의 본질보다는 표피를 부각하는데 주력할까?

시시비비 결과가 권위를 가지려면 기준이 객관적이어야 한다. <조선일보> 스스로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이어야 한다. 마침 그런 게 있다. 김대중 고문이 자신의 기명 칼럼에서 일갈한 내용이다.

김 고문은 미국에 대한 '우리의 기본자세'를 강조했다. 미국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니까 우리가 선택을 잘 하면 된다고 했다. "생존의 기술"에 의거해 "미국을 필요로 하는 부분에서는 조금 양보해서라도 실리를 취할 것이고, 불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우리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를 것은 냉철하게 자르면 된다"고 했다. 이런 대명제 앞에서 감정적 반미도 맹목적 친미도 무가치하다고 했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기준 삼아 <조선일보>의 보도를 재면 된다. 그럼 어떤 결과가 나올까?

FTA 논란의 핵심은 "생존"이다. 논란에 불씨를 당긴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협상 시한 안에 FTA가 타결되면 "한국 경제가 날아갈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농림부 장관을 지낸 김성훈 상지대 총장은 FTA가 체결되면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극소수의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270개 시민사회단체가 FTA반대 범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게다가 <조선일보>의 규정을 그대로 따르면 이들은 "친노 진영"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거늘, 오죽했으면 "친노 진영"조차 반발할까란 생각이 안들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면 최소한 공론화 과정이라도 거치는 게 순리다. 물론 공론화 물길을 열어야 하는 곳은 언론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FTA 그 자체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김 고문의 일갈대로 "생존의 기술"을 심각히 검토해야 할 사안이 발생했고, 그 사안의 핵심이 "미국을 (불)필요로 하는 부분"인데도 <조선일보>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자가당착

김 고문이 내건 기준에 입각해 보더라도 <조선일보>의 보도는 부적절하다. 우선 이 점부터 확인하고 그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자. '왜?'다. <조선일보>는 왜 자가당착적인 보도를 크게 키웠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에 대한 해답도 김 고문의 주장에 녹아있다. 김 고문은 "반미만 외치면 자동적으로 진보가 되고 좌파가 되는 세상, 실리를 따지자고 하면 자동적으로 친미가 되는 세상"을 한탄했다. 이런 세상 탓에 반미와 친미의 틀을 뛰어넘어 '용미'를 해야 하는 우리의 앞길이 막혀있다는 취지다.

이해할 수 없다. 정태인 비서관도 FTA의 실리를 따지자고 했는데 김 고문은 그를 "미국의 덫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김 고문이 쓴 "미국의 덫에 갇혀있는 사람"이란 표현은 가치중립적이지만 문맥은 '반미'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내건 기준에 따르면 정 비서관을 "자동적으로 친미가 되는" 사람으로 분류해야 할텐데 김 고문은 왜 그를 사실상의 반미주의자로 규정했을까?

이유는 하나다. 정 비서관은 FTA는 실리가 없다고 했다. 이게 이유다.

김 고문은 '용미'의 일환으로 "생존의 기술"에 입각해 실리를 따지는 자세를 강조했지만 진정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김 고문이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실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정 비서관의 주장을 경청하고 찬반 입장을 내놓으면 될 일이지 그를 "미국의 덫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 규정할 이유가 없다.

<조선>의 믿음

그래서 이런 결론이 나온다. 김 고문, 더 나아가 <조선일보>에 중요한 건 실리를 따지는 자세가 아니다. 중요한 건 "실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측과 "실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측을 가르는 일이다. 입으로는 따지자고 하지만 실제로는 결론을 전제로 내걸고 있는 것이다.

무모하리만치 과감한 이런 뒤집기 시도는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 그래서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믿음 말이다. 이런 믿음이 강할수록 실리를 따지는 행위는 괜히 분란만 야기하는 소모적인 짓거리가 된다. <조선일보>가 FTA 논란 그 자체에 별 신경을 안쓰는 이유는 여기서 추론할 수 있다. 무가치하다는 얘기다.

마무리하기 전에 짤막하게 하나만 더 짚자. 김 고문의 논리와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을 중심으로 FTA를 추진하는 측은 최소한 용미, 넓게 보면 친미다. 그런데도 왜 <조선일보>는 "친노 진영"의 '반미'만 부각하고 노 대통령측의 '용미' 또는 '친미'는 평가하지 않는 걸까? 이른바 '강경 친미파'와 '온건 친미파'의 시각차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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