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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 오마이뉴스 권우성

2002년 현대차 대선자금에 대한 관계자의 증언을 전하며 글로비스 비자금과의 관련성에 의문을 제기한 <경향신문> 12일자 보도.
2002년 현대차 대선자금에 대한 관계자의 증언을 전하며 글로비스 비자금과의 관련성에 의문을 제기한 <경향신문> 12일자 보도. ⓒ <경향신문> PDF

현대차가 죽은 유령을 부르고 있다. 대선자금 유령이다. 현대차 계열사인 글로비스 비밀금고에서 나온 60여억원의 비자금이 2002년 대선자금으로 쓰고 남은 돈이라는 의혹이다.

주목할 점이 있다. 이 의혹이 불거진 곳이 바로 한나라당이란 점이다. 2002년 대선 때 현대차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접선'해 100억원을 차떼기한 곳이 바로 한나라당이다. 그런 한나라당이 글로비스 비자금과 대선자금 관련 가능성을 제기했다.

발단은 지난 10일. '김재록 게이트 진상조사단'이 A4용지 두 장 분량의 내부보고서를 당 지도부에 전달했는데, 핵심 내용은 글로비스 금고가 대선자금 관리를 위해 비자금을 만들었으며 당시 조성한 전체 비자금 규모가 트럭 두 대 분량이었다는 것.

한나라당 진상조사단은 검찰이 이런 정황을 잡고 조사 중이며 이 내용이 언론에 공개될 경우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진상조사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언론에 의해 공개됐다. 어제 <한겨레>가 보고서 내용을 보도한 데 이어 <경향신문>은 오늘 현대차 관계자의 증언을 1면과 사회면에 큼지막하게 실었다.

증언 내용은 한나라당 진상조사단이 파악한 것과 대동소이하다. 2002년 대선 당시 계열사에서 거둬들인 현금 뭉치를 인쇄용지 박스 40개에 담아 실어날랐다는 내용이다.

검찰은 대선자금 관련성에 대해 "금시초문"이라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규명을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다. 물론 규명 주체는 검찰이다. 하지만 검찰이 적극적으로 규명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의혹에 대한 검찰의 대답은 단답형이었다. "금시초문"이란 말이었다.

하지만 흘려버릴 수 없는 말도 했다. 검찰은 이전에 글로비스 금고에서 찾아낸 비자금은 전체 비자금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로써 현대차에 대한 검찰 수사의 관전 포인트 하나가 잡혔다. 비자금 규모와 출처·용처에 대한 수사는 당위다. 중요한 점은 대선자금 관련성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몇가지 이유가 있다.

비자금의 성격을 불법 대선자금으로 단순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동아일보>는 현대차가 2001년 이후 투자회사를 앞세워 계열사 수를 늘리는 과정에서 비자금을 사용한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뭘 뜻하는가? 비자금의 성격이 어느 하나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복잡하다. 전체 비자금 중에서 몇%가 불법 대선자금용이었다고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한 문제가 있다. 검찰이 지금에 와서 현대차의 불법 대선자금을 전면적으로 캐면 2002년 대선자금 수사결과를 뒤집게 된다. 더구나 검찰은 2002년 대선자금 수사는 정치권의 압력을 뿌리치고 독립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고 자평해왔다. 그런 마당에 이제 와서 제 발등을 찍을 수 있을까?

이뿐이 아니다. 다 끝난 일로 여겨졌던 2002년 대선자금 문제를 다시 들추면 정치적 의도를 둘러싸고 정치권과 공방을 벌일 게 뻔하다.

그래서 쉬워보이지 않는다. "글로비스 비자금은 전체 비자금 중 극히 일부"라는 말보다 "금시초문"이란 말의 여운이 더 길다.

대선자금 건드리지 않으면 '분식 수사'

지난 2003년 11월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가 현대캐피탈 본사 사무실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수사관들이 압수한 회계장부가 담긴 박스를 차로 옮기고 있다.
지난 2003년 11월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가 현대캐피탈 본사 사무실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수사관들이 압수한 회계장부가 담긴 박스를 차로 옮기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렇다고 해서 검찰의 처지와 논리를 마냥 이해할 수만도 없다.

글로비스 비자금의 일부가 2002년 대선자금에 관련돼있다면 비자금 전체에 대한 수사가 왜곡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검찰이 2002년 대선자금을 건드릴 의지가 없다면 전체 비자금 규모와 출처, 용처에 대한 수사는 애초부터 뒤뚱거릴 수밖에 없다. 수사결과의 '분식'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한나라당 진상조사단의 보고, 그리고 <경향신문>에 보도된 현대차 관계자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2002년 대선자금 수사는 완결되지 못한 부실 수사였다는 추정이 나온다.

<한겨레>는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당시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차떼기로 건네진 100억원의 출처가 정주영 명예회장 개인 돈 80억과 현대캐피탈 비자금 20억이라고 정리됐지만 여전히 의혹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그 근거로 불법 대선자금의 모든 책임을 지고 기소된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의 재판 내용을 들었다.

당시 "80억 원이 정주영 명예회장의 개인 돈이라면, 상속인인 정몽구 회장이 이 돈의 존재를 모르고 김 부회장이 이 돈을 사용할 때 정 회장에게 보고도 안 했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재판장의 추궁에 김 부회장은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한 <한겨레>는 당시 검찰이 재벌 총수들의 불기소를 조건으로 기업과 협상을 했다는 분석을 전했다.

재벌 총수 불기소를 조건으로 협상했나

<한겨레>의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당시 검찰은 재벌 총수들에 대한 수사를 배제했으며, 이에 따라 불법 대선자금의 전체 규모와 출처를 제대로 캐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정치권으로부터 독립해 수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완결된 수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는 규명대상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범죄자에게 감형을 조건으로 범죄사실의 진술을 요구하는 '플리바게닝 제도'가 법제화되지 않았다. 설령 법제화돼 있다 해도 '플리바게닝 제도'의 본래 취지와는 어긋나 있다. 검찰의 거래 내역은 범죄의 '일부'이지 '전모'가 아니다. 그래서 부적절하다.

정몽구 회장이 다음 주에 검찰에 소환된다. 아마도 현대차에 대한 수사의 정점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검찰이 수사결과를 어떻게 내놓을지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물론 점검 항목은 비자금과 불법 대선자금과의 관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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