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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하다는 말로는 충분치 않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정도가 그 사회의 정의와 인권 보호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임을 강조하고 있는 포스터. 국제 앰네스티 오스트리아가 만든 이 포스터는 지난 5일 한국여성대회 행사장에 전시됐다.
ⓒ 오마이뉴스 조은미
내가 열일곱살 때다. 그러니까 고 1때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토요일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가을 날씨가 좋았다. 책가방을 덜렁덜렁 메고 아무 생각없이 걷고 있었다. 큰 길가였다. 집이 멀지 않았다. 앞에서 한 무리 남학생들이 오고 있었다. 서너명 되는 남자애들이 지네끼리 뭐라고 시시덕대며 걸어왔다.

별 생각 없이 걷다가 그들과 부딪힐라 살짝 비켜서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한 남자애가 손을 쭈욱 뻗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가슴을 쓰윽 더듬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난 자리에 딱 멈춰 섰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그냥 눈 앞도 머릿속도 하얬다. 남자애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갔다. 얼굴이 시뻘개졌다. 돌아보기도 무서웠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황소 열댓 마리가 마구 짓밟는 소리가 났다.

난 딱 멈춰 서서 주먹을 꽈악 쥔 채 그저 부들부들 떨었다. 부들부들 떨며 생각했다. 이대로 있을 순 없어. 이대로 있을 순 없어. 억지로 입을 열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이었다. 어떻게 말은 했지만, 무서웠다.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돌아보지도 못했다. 머릿속으론 무력한 나 자신을 저주했다. 콩알만 한데다 힘도 없고 태권도 같은 것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을 저주했다.

거리는 환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내 욕을 듣고 한 할아버지가 도리어 나더러 눈을 부릅뜨며 삿대질을 했다. "기집애가 길거리에서…."

나는 아무소리 못하고 그냥 뛰었다. 마구 뛰었다. 집에 어떻게 들어간 지도 몰랐다. 가슴이 뻐근했다. 그리고 분했다. 너무 분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다행히 집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한테 말도 못했다. 길을 지나가는데 어떤 남자애들이 가슴을 쓰윽 더듬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을 하기 싫었다. 여자란 게 싫었다. 가슴같은 게 있는 여자란 게 싫었다.

그 뒤로 앞에서 남자애들이나 남자가 다가오면 주머니에 있던 손도 얼른 뺐다. 언제 어디서 손이 뻗어올지 몰라서 긴장했다. 팔짱끼길 좋아하는 버릇도 생겼다.

사람들은 도리어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밥을 지을 때 물을 얼마나 부어야 하는지, 국수삶을 때 어찌 해야 국숫발이 쫄깃쫄깃해지는 지까지 가르치고 외우라 시키면서, 정작 이런 문제에 어찌해야 하는지는 학교는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되레 비오는 체육시간이면, 떡대좋은 체육 선생님은 교실에서 요상한 소릴 늘어놓았다. 여름에 한 남자 선생님은 팔을 쓰윽 쓰다듬었다. 친구들 사이에 소문만 돌았다. "그 선생님하고 말할 땐 10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해."

대학 때였다. 밤늦게 탄 택시는 멀쩡히 큰 길을 두고 골목길로 쓰윽 들어갔다. 처음 들어가 본 골목길이었다. 집집마다 환하게 불을 켜놓은 유리상자가 있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여자였다. 진한 화장에 벌거벗다시피 한 여자들이 있었다. 마네킹 같았다. 말로만 듣던 매매춘 거리였다. 신기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변했다. '혹시 이 아저씨가 날 여기 팔아넘기려고?'

새하얘진 얼굴로 아무 소리 못하고 덜덜덜 떨었다. 택시 문고리를 가만히 부여잡았다. 뛰어내릴까 생각하는데 그 택시 기사가 말했다. "학생, 이런 데 안 와봤지? 이런 데도 보고 그래야 해." 그는 씨익 웃으며 매매춘 거리를 지나 큰 도로로 나갔다.

뛰는 가슴은 멈출 줄 몰랐다.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도 몰랐다. 무서웠다. 살았다는 한숨과 함께 무서움은 가시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리자 다리가 탁 풀렸다.

화초처럼 키우고 싶어 하던 엄마의 소망과 달리, 딸은 세상과 부딪히며 잡초처럼 자랐다. 험난하긴 했지만, 인생이 끝장날 만치 험난하진 않았다.

사회적으로 높으신 어른께서도 20년은 어린 여기자와 악수하면서, 그 기름낀 손가락 하날 오무려 내 손바닥을 살살 긁는 건 별 일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는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토할 거 같았지만 참았다. 그 인간 아닌 낫살먹은 짐승이 기대하는 재미난 반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늙은 사타구니를 확 걷어차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를 악물고 웃었다. '세상이 대체 왜 이러니'라는 생각은 '세상에 저런 놈이 왜 이리 많을까'로 바뀌었다.

시간이 지나도 새 살이 아닌 새 상처만 돋아난다

▲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당원들은 지난 8일 오전 최연희 의원의 서울 평창동 자택앞에서 의원직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연 뒤 현관에 '성추행 국회의원 최연희 공개수배` 포스터 수십장을 붙였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런 기억들은 차곡차곡 가슴 속에 쌓였다. 아프고 쓰린 기억도, 수치스럽고 토할 것 같던 기분도 쌓였다. 할 수만 있다면, 앙칼지게 후려갈겨주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이런 기억은 나이먹는다고 뭉개지지 않았다. 다만 '참지 않겠다'는 용기가 조금 생겼을 뿐이다. 그들의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하여, 원만한 내 사생활을 망치지 않겠단 용기가 생겼을 뿐이다.

성추행이란 그런 거다. 성폭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추행 자체로도 작은 상처가 아니다. 겉으론 피를 흘리지 않지만 속에선 피가 뚝뚝 떨어진다. 시간이 지나면 새살이 돋아나는 게 아니라 새 상처가 돋아난다.

정작 성추행한 놈은 멀쩡히 잘 사는데, 피해자만 스스로 자책하고 또 자책한다. 내가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내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그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성추행이 아무 일 아닌 듯이 넘어갈 때마다, 여자들은 배운다. 입을 다물고, 속으로 곪아터지는 수밖에 없다고 배운다. 성추행을 '그까짓' 것으로 말하는 인간들을 볼 때마다 배운다. 저렇게 설치는 놈들은 계속 설치겠구나. 그리고 절망한다.

성추행한 뒤에도 냉큼 잘못을 사죄하긴 커녕 "음식점 주인인 줄 알았다"는 말이 뜻하는 건 하나다. 지금까지 많은 성추행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기자가 아니면 얼마든지 성추행하겠다는 뜻이다. 내 귀엔 그렇게 들린다. 그리고 그는 버젓이 돌아다닌다.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최연희 사태를 보며 상처받은 내가 말한다 "놀고 앉았네"

나는 최연희 의원 사태가 왜 스스로 의원직 사퇴를 하라고 가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안다. 그도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껏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어떤 치료나 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는 성추행이 자연스러운 최연희 의원 그대로다. 도리어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호소할 뿐이다. '사표'를 요구하는 소리뿐이다. 친고죄 때문에? 피해자가 친히 고소하지 않으면, 아무 일 없다고 보는 그 법 때문에?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누군가를 때리거나 죽인 사람한테도 단지 "다니는 직장만 그만두라"고 말하지 그러나? 죽거나 맞은 사람이 스스로 고소하지 않으면 내버려두지 그러나?

무슨 법이 이러나? 무슨 법이 범인에게 회사에 사표내나 안 내나 구경하나? 무슨 법이 어린 여자앨 성추행한 놈을 두 달 만에 풀어주나? 무슨 법을 이따위로 만들었나? 그따위로 만들었더라도 왜 뜯어고치질 않나? 여자들이 다 죽어나가도 무슨 법이 구경만 하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언제까지 가해자가 관용처럼 베풀어주실 '사퇴'를 기다리나? 나는 그게 궁금하다.

내 속에 상처받은 내가 속삭인다. 놀고 앉았네. 그렇다면, 얼마 전 어린 여자아일 성폭행하려다 죽인 그 신발가게 주인도 그저 신발가게만 그만 두면 되는 거 아니었나? 그도 그저 신발이 죄지, 사람이 무슨 죄냐고 말하지 그러나? 그 여자애가 공짜 신발에 눈멀어서 신발가게에 들어간 게 문제라고 말하지 그러나?

지금 진행되는 이 꼴이 나는 무섭고 우습다. 대한민국 성폭행의 앞날을 밝히는 이 짓거리가 우습다. 성폭행범의 천국에서 여자로 살기가 무섭다. 지금 진행되는 꼴은 내게 이렇게 들린다.

"성폭력범이여, 지퍼 밖으로 행군하라. 대한민국 여자들이 다 네 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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