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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뉴욕에 있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하는 날 나는 집에서 텔레비전 리모콘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머리를 쓰게 되면 머리가 더 아파지고 힘이 하나도 없어서 일도 할 수 없는 처지라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어도 되는 텔레비전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가수 비가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비슷한 화면에 비슷한 표현의 거의 카피 수준의 뉴스를 못 봐도 5번은 봤다. 이리 돌려도 저리 돌려도 이 시간에도 다른 시간에도 뉴스 때마다 모든 채널에서 비에 관한 보도를 했다.

아나운서들은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들었음을 알릴 때 냈던 그 목소리로 ‘아시아 가수로는 처음으로 스퀘어 가든에서 단독 공연을 가졌습니다’라고 운을 떼며 비가 미국에서 거의 성공적인 공연을 펼쳤다는 보도였다.

무대에서 화려한 춤 솜씨를 보여주는 비와 함께 객석에서 열광하는 군중들을 보여줬고, 또 비가 공연을 한 스퀘어 가든은 미국 대중음악의 심장부라는 것과 마이클 잭슨 등이 공연한 그런 무대라고 설명도 덧붙였다.

이어 비는 무대에서 공연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기분이었다고 했고, 비가 스퀘어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프로듀서인 박진영의 치밀한 전략이 주효했고, 비가 노래와 춤을 매일 오랜 시간 연습했고, 미국 진출을 위해 매일 영어를 공부하는 등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고 보충했다. 전반적으로 이 날 뉴스는 비가 성공적으로 미국에 진출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뉴스였다.

뉴스를 보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나라 가수 비가 아시아의 스타를 넘어 이제 세계의 가수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랑스러움과 애국심을 느끼게 하는 하루였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다음날이다. 칭찬 일색의 뉴스에서 다음날은 완전히 돌변했다. 비의 미국 진출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정말 하룻밤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지난 3일과 4일에는 인터넷에서도 어떤 뉴스를 검색해도 비의 성공적인 스퀘어가든 공연에 관한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5일 기사는 대부분 비의 미국 진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기사 내용이 돌변하게 된 배경은, <뉴욕타임즈> 비평기사에서 비롯됐다. 뉴욕 타임즈에서 비평을 하니까 우리나라 언론은 어제까지 성공에 초점을 맞춘 기사에서 뉴욕의 비평기사를 그대로 내보냄으로써 <뉴욕타임즈> 존 파를리스 기자의 생각처럼 비가 비국에서 성공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느낌을 갖게 했다. 우리나라 기자들이 그런 판단을 한 것이 아니라 그건 <뉴욕타임즈>의 존 파를리스 기자의 견해였고, 우리나라 언론은 <뉴욕타임즈>의 생각을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었다.

"비가 마이클 잭슨과 같은 카리스마도, 어셔와 같은 성적매력도, 팀버레이크의 빠른 팝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그를 보는 것이 마치 한국말로 더빙 된 오래된 MTV 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NYT보도

전날의 비의 스퀘어 가든 입성을 흥분한 기사에다 찬물을 끼얹는 기사였다. 이 기사로 인해 하루아침에 비는 세계적인 가수에서 앵무새로 전락했다.

<뉴욕타임즈>는 여러 요인에 의해 비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본다. 자기 생각을 표현한 것이니까. 문제는 바로 우리나라 언론에 있다. <뉴욕타임즈>의 생각이 절대적인 것처럼 무조건 추종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신문은 생각이 없이 그저 남이 말한 것을 전달하는 기능만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보도 태도였다.

<뉴욕타임즈>가 그렇게 말했다고 <뉴욕타임즈>의 견해만 내보내지 말고 비의 미국음악시장 진출을 긍정적으로 보는 전문가의 생각도 함께 내보내거나 자체의 진단도 더불어 내보내는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독자나 시청자는 양면을 보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가 있는데 한 생각만 내보내게 되면 뉴욕 타임즈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인식되고, 사대주의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보도 태도였다.

물론 <뉴욕타임즈>가 미국의 권위 있는 신문이고 그 신문의 비평기사가 나름대로 일리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 언론에서 많은 국민이 관심을 보이는 비의 미국 진출에 대한 <뉴욕타임즈>의 생각을 전달할 필요성은 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나 부적절했다.

성공적인 공연이었다는 기사를 내보낸 바로 다음 날 <뉴욕타임즈>의 생각을 전달하는 건 지나쳤다. 우리나라 언론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신문이고, 우리나라에는 전문가가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우리나라의 생각은 하나도 없다는 건 좀 지나친 태도였다. 먼저 우리나라 언론이나 전문가의 평가를 표현한 후 뉴욕의 생각도 보여 줬으면 훨씬 바람직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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