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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개 인권단체로 이뤄진 인권단체연석회의와 민주노동당 인권위원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은 15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군대 내 동성애자 인권침해 규탄과 군 당국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회견을 열었다.
ⓒ 오마이뉴스 김덕련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성관계 사진과 성관계 횟수가 필요하다니…, 과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인가."

수십년간 가려져온 군대 내 인권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군 복무 중인 동성애자가 성관계 사진을 제출해 성 정체성 입증을 요구받는 등 군대 내 동성애자 인권침해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해당 부대에서 성 정체성과 억압적인 군 문화의 부조화로 군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한 병사를 보호하기는커녕 개인정보 관리를 소홀히 해 당사자가 자살 결심을 할 만큼 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인권운동사랑방 등 35개 단체로 구성된 인권단체연석회의와 민주노동당 인권위원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은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느티나무 카페에서 회견을 열고 군대 내 동성애자 인권문제에 대한 군 전반의 인식 개선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한 사실이 알려져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동성애자 A씨 사례를 공개한 뒤 "A씨를 조속히 전역시키고 성적 소수자들이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인권교육 지침과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A씨의 신상정보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일절 공개되지 않았다.

"성관계 횟수 말하고 사진까지 제출해야 했다"

인권단체들에 따르면, 동성애자 A씨는 지난해 6월 신병교육대에 입대했다. 그러나 남성중심주의적이고 마초적인 군 문화와 피부를 거의 맞대고 지내야 하는 병사들의 열악한 상황으로 성 정체성이 침해되는 일이 반복되자 A씨는 고민 끝에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담당간부에게 고충을 토로했다.

그러나 A씨는 더 큰 시련과 맞닥뜨려야 했다. 비밀보장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아들이 동성애자이니 잘 부탁드린다'는 A씨 아버지의 의견서마저 군 당국의 관리소홀로 유출되면서 편견에서 비롯된 간부, 동료들의 언행으로 인간적 수치심과 성적 모욕감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동성애자는 에이즈 감염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의무대에서 원치 않는 에이즈 검사는 물론 성관계 횟수 등을 묻는 질문까지 받아야 했다는 것.

고통에 시달리던 A씨에게는 '현역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아 군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긴 했지만 이도 선뜻 신청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A씨에 따르면 해당 부대에서 심사를 위해 동성애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성관계 사진 제출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자살까지 염두에 두고 고민하던 A씨는 결국 100일 휴가 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성관계를 맺고 이를 찍은 사진을 부대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다시 부대원들에게 알려지면서 더 심한 모욕적 언행에 맞닥뜨렸고, A씨는 결국 자살을 결심한 뒤 이달 초 휴가를 나왔다.

이후 A씨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지난 8일 동성애자인권연대에 상담을 요청했다. 이에 동성애자인권연대는 A씨의 동의를 얻어 10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긴급구제조치를 요청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4일 조사단을 꾸려 해당 부대를 방문, 조사를 벌이고 있다.

A씨는 현재 "심한 우울감, 자기비하감, 불안·초조 등 증상을 동반한 주요 우울증 증상을 앓고 있으며 환경적 스트레스가 계속될 경우 증상 악화로 자·타해 시도가 이뤄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 입원치료를 통한 약물·상담치료가 병행돼야 하고 향후 복귀 및 군 생활이 불가하다"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을 받은 상태로 자택에서 요양 중이다.

해당 사단장은 국가인권위원회 조사단에 우선 A씨 휴가를 10일 연장하며 그 기간 중에 조기 전역 문제를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인권단체 "차별 부추기는 군 형법 92조 등 폐지해야"

인권단체들은 이번 사건을 군 당국의 저급한 인권의식과 무책임한 자세에서 비롯된 심각한 인권침해로 규정했다. 따라서 군 당국은 A씨를 조속히 전역시키는 한편 그간 받은 정신적 피해에 대해 보상하고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성실히 임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면서 시급히 보호 조치를 취했어야 함에도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묵살한 점 ▲성 정체성을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아니라 '단순한 성적 이상행동'으로 치부한 점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으로 에이즈 검사를 강제한 점 ▲법적 근거도 없는 성관계 사진까지 요구한 점 등에서 군 당국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군대 내에서 성추행·폭력(가벼운 추행부터 항문성교까지) 당한 비율이 15.4%에 이른다는 결과가 나올 정도로 군대 내 성폭력이 심각하다"며 "성적 소수자에게 성관계 사진 제출을 요구한 것도 명백한 성폭력"이라고 규정했다. 또 그는 "A씨에게 군대로 복귀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인권단체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 정체성을 숨긴 채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는 수많은 군대내 동성애자들의 차별과 인권침해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 및 대책마련이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더불어 '계간(동성애 행위)'을 금지한 군 형법 92조(위반시 1년 이하 징역형)와 동성애를 '질병 및 심신장애'로 규정한 징병신체검사 규칙(국방부령 제 556호)이 동성애 혐오, 차별을 제도화하고 있다며 이를 즉각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달 발표한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NAP)에서 "성적소수자의 생존권, 안전권, 노동권, 편견과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군 형법 92조 삭제를 권고한 바 있다.

군대 내 동성애자 문제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공론화' 필요엔 일치... 전역여부 판정절차 등은 이견

A씨 사례에 대해 인권침해를 구제하고 군대 내 동성애자 문제 공론화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는 인권단체 관계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유독 병역문제에 민감한 한국에서 전역여부 판정절차 등 구체적인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 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석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은 이날 "군대 내 동성애자 문제가 최근 서구에선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제 전역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항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군 상황은 다르다"면서 "군 전체적으로 실태 파악도 안돼 있고 일관된 방침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동성애자라고 해서 모두 곧바로 전역시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합의가 없다"고 전제한 뒤 "동성애자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전제 아래 인우보증서와 전문가의 심리 진단 등을 검토해 판정하는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경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는 "동성애자임을 보증하라는 요구 자체가 인권침해"라며 당사자 고백만으로 현역복무 부적합 판정 등이 충분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징병제가 바뀌지 않으면 성적 소수자의 인권침해는 계속될 것"이라면서 "위계에 의한 성폭력 방지를 위한 병사의 처우개선도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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