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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의 이라크 팔루자 공격 1주년에 맞춰 이탈리아 RAI 방송이 11월 8일 보도한 다큐멘터리 <팔루자: 숨겨진 학살>. 이 다큐멘터리는 미군이 이라크 팔루자에서 백린을 사용해 민간인을 포함한 이라크 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사진은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타 죽은 이라크 인들의 사진.
미군의 이라크 팔루자 공격 1주년에 맞춰 이탈리아 RAI 방송이 11월 8일 보도한 다큐멘터리 <팔루자: 숨겨진 학살>이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탈리아어, 영어, 아랍어로 제작된 30분짜리 이 다큐멘터리는 미군이 이라크 팔루자에서 백린을 사용해 민간인을 포함한 이라크 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다큐멘터리에는 백린사용 지시가 전달되는 것을 들었다는 팔루자 전투 참전 미군 병사의 증언과 타죽은 이라크 인들의 사진이 등장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주장대로라면 미국이 이라크 전에 내걸었던 명분과 도덕성은 치명타를 입게 된다. 이라크가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불법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게 미국의 이라크 침공명분이었기 때문. 특히 아직까지 이라크가 생화학무기를 지녔던 증거조차 제시하지 못한 미국이 도리어 이라크 인들을 향해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생화학무기를 썼다는 게 확인된다면 미국은 세계적 비난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

이 때문인지 다큐멘터리가 공개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파문이 확산되는 데 반해 유독 미국만은 조용했다. 왜 그럴까.

"미국, 팔루자 공격시 생화학무기 백린 사용했다"

지난해 11월, 팔루자 전투는 이라크 전에 관심이 없던 미국인들의 귀에도 들어갈 만큼 치열했다. 언론들은 매일 팔루자 전투를 대서특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팔루자 전투는 이라크전이 시작되고 바그다드가 함락된 이후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이 전투로 팔루자에 있는 3만9천 개의 건물 중 60%가 파괴되거나 손상됐고, 인구도 이라크 침공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2004년 11월18일 미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팔루자 전투로 이라크군 1200명, 미군 51명이 사망했다.

사실 팔루자 전투에서 백린을 사용했다는 의혹은 지난해부터 제기돼왔다. <워싱턴포스트>가 작년 11월 10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팔루자 전투 개시 직후부터 미국이 백린을 써서 민간인이 많이 사상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미 국방부는 이 의혹을 완강히 부인했다. 당시 미군은 백린을 조명탄으로만 썼다고 밝혔다.

그 후 백린에 관한 이야기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잠잠해졌다. 그런데 이번 이탈리아 RAI 방송이 <팔루자: 숨겨진 학살>을 방영하면서 다시 전 세계로 퍼진 것이다. 지구촌은 "뼈가 드러난 채 숨진 시체들이 인화성이 강한 백린이 존재했음을 증명하고 있다"며 미국이 이라크 인들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격분했다.

전 세계적으로 파문이 커지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린을 조명탄 이외의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았다던 펜타곤은 말을 바꿨다. 11월 16일, 펜타곤 대변인 배리 베너블은 <비비시(BBC)>와의 인터뷰에서 "작년 11월 팔루자 전투에서 백린을 방화성무기로 사용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이 말이 더 큰 의혹, 즉 미군이 백린을 화학무기로 사용했냐는 의혹을 '부인'하면서 나온 말이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다음의 대화를 보자.

▲ 11월 16일, 펜타곤 대변인 배리 베너블은 <비비시(BBC)>와의 인터뷰에서 "작년 11월 팔루자 전투에서 백린을 방화성무기로 사용했다"고 '시인'했다.
펜타곤 대변인 "백린은 방화성무기로 적군에게 사용될 수 있다."
BBC "그러면 팔루자 전투에서 이라크군을 상대로 백린을 방화성무기로 쓴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나?"
펜타곤 대변인 "그렇다. 백린은 방화성무기로 적군에게 사용됐다."
BBC "만일 백린을 방화성무기로 적군에게 사용했다면 국제협약 위반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펜타곤 대변인 "무슨 협약을 말하는 건가?"
BBC "화학무기금지협약."
펜타곤 대변인 "오케이. (잘 알아듣지 못한 듯 뜸을 들이며) 백린이 화학물질이라는 뜻으로?"
BBC "아니, 화학무기로. 살아있는 생물체에 상해, 즉 사망 혹은 일시적이거나 영구적인 해를 입히는 어떤 화학물질도 화학무기로 간주된다는 뜻에서."
펜타곤 대변인 "아니, 우리는 지금 백린을 화학무기가 아니라 방화성무기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펜타곤 대변인은 위 인터뷰에서 미군이 백린을 화학무기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적극 부인했다. 이는 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의심하는 바와 펜타곤간의 입장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방화성무기라고 말하는 걸까?

1980년 제정된 '재래식 무기에 관한 협약(CCW)' 제 3조는 방화성 물질을 민간인에게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런데 미국은 협약에는 조인했지만 제3조에는 사인하지 않았다. 미국이 백린을 방화성무기로 쓴 경우 국제협약의 제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

그러나 백린이 화학무기로 사용되었다고 증명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미국은 1997년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 조인한 회원국이기 때문에 화학무기를 사용하면 안 된다. 만일 미군이 백린을 화학무기로 사용했다고 판명나면 미국의 명예는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추될 수 있다.

이 가운데 이라크는 16일, 미군이 백린을 화학무기로 사용했는지 자체 조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전 세계가 시끄러운데 고요하기만 한 미 언론

▲ 이탈리아 방송 RAI가 보도한 다큐멘터리 <팔루자 : 숨겨진 학살> 소개글.
11월 8일, 이탈리아에서 문제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후 이탈리아의 반전 운동가들은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분노를 표출했다. 이어 이 다큐가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면서 전 세계로 파장이 확산됐다.

그러나 미국 언론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주류언론매체인 <뉴욕타임스> <엘에이타임스>를 비롯해 방송들도 이 사안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방송은 11월 16일까지 침묵을 지켰고, <뉴욕타임스>는 로이터 기사를 받아서 실을 뿐이었다. 자체적으로 방대하고 심도 깊은 연구기사를 생산해 내는 것으로 유명한 <뉴욕타임스>의 이러한 행보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다큐멘터리 방송 이후 영어권에서 가장 깊이 있게 이 문제를 파헤치고 있는 영국 BBC의 모습과도 대비된다.

미 언론의 침묵을 깨게 만든 것은 블로거들이었다. 블로거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가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펜타곤 대변인의 비비시 인터뷰가 보도된 11월 16일에는 블로거들 사이에서 백린이 6번째로 많이 검색된 이슈로 기록됐을 정도다.

이라크에서 쓰인 백린의 용도도 블로거들 사이에서 격론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일부 블로거들은 "작년 팔루자 전투 후 백린이 화학무기로 사용됐다는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때 미군은 백린을 조명탄으로만 썼다고 했지만 올해 나온 'Field Artillery'라는 군사잡지에서는 백린을 방화성무기인 연막탄으로 사용하는 게 얼마나 효과적인지 선전했다"며 미군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었다. 즉, 대외적으로는 백린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잡아떼면서도 내부적으로 백린의 전투무기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백린사용을 장려했다는 것.

반대로 이탈리아 방송의 다큐멘터리에 강한 의혹을 제기하는 블로거들도 있다. 마이클 모이니한은 다큐멘터리에 나와 미군이 팔루자에서 백린을 화학무기로 사용했다고 주장한 전 미군 병사 엥겔하트의 증언에 의혹을 제기했다.

"백린이 팔루자에서 사용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얼마나 빈번히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백린이 이탈리아 다큐멘터리가 주장하는 그런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는가? 2. 이탈리아 다큐멘터리는 왜 엥겔하트를 내세웠을까? 그의 기억은 완벽하기는커녕 때로 상상력을 동원하는데. 그는 자기가 하는 주장을 증명할 증거를 대지 못한다. 3. 다큐멘터리가 주장하듯이 백린이 인간 살상무기로 쓰였는가? 등이다. - '제프 엥겔하트는 얼마나 믿을만한가?'"

미국의 말바꿈 : 조명탄→방화성무기→ ?

상황이 이쯤 되니 미 언론들도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11월 16일 <엔비시(NBC)>뉴스가 이탈리아 방송의 다큐멘터리를 보도한 것을 시작으로 11월 18일에는 공영라디오방송이 군사전문가 존 파이크를 인터뷰했다.

존 파이크는 공영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다큐멘터리를 '프로파간다(선동)'로 규정, "백린이 화학무기로 사용됐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주검들은 백린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망 후 오래 방치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존 파이크를 비롯한 미 언론은 대체적으로 펜타곤과 국무성이 백린사용과 관련해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일제히 비판하고 있다. 존 파이크는 "(미군의 백린사용에 잘못된 점은 없지만) 문제는 전 세계에 미국의 말을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이번 백린 관련 주장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면서 미국의 이미지가 추락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오랜 침묵 끝에 11월 21일, 이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내용을 보도한 <뉴욕타임스>도 미국이 백린 사용을 꾸물대며 합리화하다가 대외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고 지적했다.

"미국 관료들과 군사전문가들은 이탈리아 다큐멘터리가 실수와 과장 범벅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무부와 펜타곤이 미군의 팔루자 활동에 대해 거짓말과 번복을 반복하는 동안 '미군이 금지무기를 쓰고 그 사실을 덮으려 한다'는 설이 외국 언론과 웹 사이트를 통해 퍼져버렸다."

이탈리아 다큐멘터리로 촉발된 이 사건은 일단 새로운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주장'으로 정리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상황만으로도 미국은 심한 타격을 받은 상태다. 백린을 조명탄으로만 썼다고 주장했다가 사실은 화학무기는 아니고 방화무기로 썼다고 말을 바꾼 것으로 이미 미국의 대외신뢰도는 추락했다.

백린이란? '방화성무기'와 '화학무기'의 차이

백린은 방화성이 높은 화학물질이다. 백린이 산소와 접촉하면 불이 붙으면서 고온의 흰 연기를 뿜어낸다. 백린을 쏘면 하늘에서 터지면서 강한 빛이 난다. 정점에 다다라 빛을 내며 터진 백린이 땅에 떨어질 때 입자 가루로 떨어지며 연기를 낸다. 문제는 백린이 생물체의 살갗에 닿았을 때다. 백린 가루가 인체에 닿으면 산소를 소진할 때까지 살을 녹이며 타들어간다.

백린은 주로 조명탄과 연막탄으로 쓰이는데, 하늘에 쏜 백린이 하늘에서 터지면서 강한 빛을 내기 때문에 밤에 조명탄으로 많이 쓴다. 또 하늘에서 떨어질 때 백린에서 매캐하고 자욱한 냄새와 연기가 나기 때문에 연막탄으로도 쓰인다. 연막탄을 터뜨리면 적군이 연기에 질식하고 심리적 공포감을 느껴 숨었던 곳에서 뛰쳐나오게 된다.

방화성무기는 화학작용을 통해 화재를 일으켜 목표물에 상해를 입히거나 화상을 입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기를 말한다. 수류탄, 지뢰, 폭탄, 로켓 등이 이에 속하며 백린의 경우도 방화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백린을 사용해 불을 내고 이 결과로 적군이 상해를 입은 경우는 방화성무기로 분류된다.

그러나 방화성무기는 재래식 무기다. 반면, 화학무기는 폭발이 근본 작용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재래식 무기와 구별된다. 화학무기는 화학물질 자체의 해독성을 사용해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백린이 상황별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가 무기 종류를 결정하는 것이다. / 윤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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