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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인사동에서 <레닌이 있는 풍경> 전시회가 열렸다. 콘셉트는 '386세대가 추억하는 러시아'였다. 솔직이 그 화두가 내게 대뜸 다가왔던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를 전공하는 나는, 생각해보면, 소련 체제에 대한 환상은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면 처음 모스크바에서 생활했던 1990년대에 이미 깨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전시회는 좋았고 운좋게 만나게 된 작가와의 수다도 즐거웠다.

 

전시회장에는 책도 있었다. 사진작가 이상엽이 직접 쓴 기행문이었다. 책 제목은 전시회 제목과 같았다. <레닌이 있는 풍경>. 사실 전시회는 책 출판을 기념한 것이었다. 책을 들춰보았더니 사진들이 많다. 아담한 규모의 전시회가 제목에 걸맞는 레닌 동상 사진들로만 채워진 것과는 달리 책에는 사람과 자연, 건축물 등 다양한 사진이 있었고 잠깐 들춰본 것만으로도 책은 꽤 실해 보였다.

 

'철의 실크로드' 그 길 위에서

 

이 기행문은 작가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러시아를 여행하며 모은 사진과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다. 80년대를 거리에서 독재 타도를 외쳤던 작가는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가졌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그가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레닌의 대륙을 찾았을 때, 그는 고백한다. 처음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실망을 금치 못 했다고. 그 곳에 더이상 레닌의 정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베트남인들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시장에서 환전상을 하며 중국 돈과 러시아 돈을 바꿔준다.

 

"유럽과 동북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사회주의 맹주들이 모여 자본주의 시장을 열고 있는" (218쪽) 곳, 그 곳이 바로 작금의 러시아다.

 

작가는 그래도 몇 십년된 소비에트제 카메라까지 메고 길을 떠난다. (이 책 뒷편에는 부록으로 소련이 배출한 훌륭한 카메라들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길 위에서 한국인의 눈으로 러시아를 본다. 그의 사진은 현재를 보여 주고 그의 글은 변화의 풍경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함께 사유한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우리의 지평은 대륙으로 확장되고 거기서 바로 러시아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블라디보스톡, 하바로프스크, 울란우데, 바이칼 호수, 이르쿠츠크 등등. 그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시베리아 횡단열차 : 마음이 낸 길을 따라

 

이상엽의 책은 실제 여행담이 짜임새 있게 녹아들어 맛갈스럽다. 전세계 민물의 20퍼센트가 담겨 있다는 바이칼 호수에서 그는 그 지역의 설화가 우리네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와 빼닮았음을 발견한다. 부랴트 족의 '백조와 사냥꾼' 설화는 우리 설화와 섞여들고 곧이어 그 위로 여행자의 경험담이 살포시 포개진다.

 

세상 끝에서 만난 젊은이들을 작가는 "추레한 배낭족으로 위장한 선녀들"이 아닐까 공상해본다. 보름 동안 씻지 못했다는 그 처자들에게 샤워실 딸린 자신의 방을 빌려준 착한 여행자-작가가 "물론 옷은 훔치지 않았다"라고 이야기를 맺을 때는 절로 웃음이 터진다.

 

인문학적 사유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여행 경험이 경계를 허물며 넘나드는 경우는 이뿐만이 아니다. 또 이상엽의 사진과 글에는 두고온 고향의 기억이 짙게 배어 있다. 이승을 떠난 영혼들이 내려 앉을 것 같은 알혼 섬, 불한 곶에서 그는 세상을 뜬 후배를 추억하며 임사체험을 겪는다. 그 곳은 그의 <솔라리스>다. 먼 타역의 길 위에서 그는 아물지 않은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렇게 새로운 길은 과거의 기억과 얽히며 미래를 열어간다. 이상엽에게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러시아 여행이자 동시에 마음의 길을 따라가는 여행이다.

 

 

떠나는 길, 돌아오는 길

 

러시아를 말할 때 흔히 통하는 상투적 표현이 있다. '유럽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닌 나라, 러시아.' 러시아의 거대한 땅덩이는 유럽과도 어깨를 맞대고 있고 우리와도 이웃이다. 그럼에도 북한에 가로막혀서인지, 아니면 러시아의 뿌리가 유럽에 더 가까와서인지 우리는 러시아를 주로 이국적인 먼 외국으로 대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그 무게 중심을 우리 쪽으로 한참 끌어당겼다. 당장 목차로만 훑어봐도 전체 8장 중 반 이상이 시베리아 쪽으로 넘어와 있다. 1장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2장이 모스크바고, 그 다음부터는 시베리아로 훌쩍 넘어와 점점 한반도로 다가온다. 지리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작가의 생각도 점점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 얼굴, 우리 역사, 우리 민족. 그렇다고 그가 막무가내로 우리 민족만을 외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다. 그는 작금에 횡행하는 민족주의 열기를 경계한다. 그가 바라는 바는 우리의 시야를 대륙으로 넓히고 그 광활한 대륙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러려면 우선 알아야 하고 체험해야 하리니, 작가는 21세기 초반 직접 그 길을 간 것이다. 

 

그가 굳이 사할린을 찾아간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으리라. 사할린은 사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지나가는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곳을 찾아가 역사 속에 버려졌던 우리 동포, 카레이츠(고려인)들을 찾는다. 일제 시대에 강제 징용돼 부역 노동을 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부터도, 조국으로부터도 버림받았던 동포들. 이제 3세대, 4세대가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장래에 우리는 그들을 알아볼까? 그들은 우리를 알아볼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려는 여행자들에게

 

이상엽 사진 작가에게는 미안한 말이 될 수도 있겠는데 나는 그의 사진보다 글이 더 마음에 든다. 그렇다고 그의 사진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기대치 때문일 것이다. 인정 받는 사진 작가이니 사진은 당연히 좋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대를 안 했는데 기행문을 읽다보니, 웬걸, 보통 솜씨가 아니다. 사진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정갈하면서도 내용이 꽉찬 글. 여행을 위해 많이 공부했구나,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진심이 깃든 글.

 

나도 언젠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게 될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기회가 오면 바이칼 호수에서, 연해주에서, 그리고 드넓은 시베리아의 광야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상엽의 기행문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경험을 대어보리라.

덧붙이는 글 | 이상엽 작가가 운영하는 블로그는 blog.naver.com/inpho로 거기 가면 그의 멋진 사진과 글을 만날 수 있다. 


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산책자(2007)


태그:#<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시베리아 횡단열차, #러시아,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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