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를 말할까. 당연히 간디를 이야기할 것이다. 간디야말로 폭력과 저항을 하지 않고서도 끝내 독립과 자유를 쟁취했으니, 그야말로 '인도 독립의 참된 아버지'라 부른다.

그러나 그 말이 결코 참일 수는 없다. 그가 해방을 쟁취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을지 몰라도 인도 내부에 깊이 뿌리내려 있던 악법 카스트 제도를 없애는 데에는 결코 마음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제도를 없애면 인도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 걱정했다.

▲ <암베드카르> 겉그림
ⓒ 에피스테메
그렇다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일과 인도 내부로부터 독립하는 두 가지 일을 함께 했던 사람은 없었을까? 그런 인도인이 있었다면 그야 말로 '진정한 인도 독립의 아버지'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놀랍게도 그런 인도인이 있었다. 바로 '암베드카르'가 그다.

그는 인도를 독립시키는데 폭력적인 방법으로 맞서 싸웠으며, 네루가 이끄는 내각에서는 초대 법무장관으로 헌법초안 전문을 만들었고, 인도 내에 오랜 관습헌법과도 같았던 악법 카스트 제도를 없애는데 온 생을 받친 인물이다. 그야말로 신분과 계층, 유식과 무식, 남자와 여자를 떠나,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떳떳한 인도인으로 살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든 사람이다.

"사람의 입맛이 변할 수는 있어도 독약을 양약으로 바꿀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 땅의 카스트 제도를 철폐하는 일은 마치 독약을 양약으로 바꾸는 일처럼 어렵습니다. 힌두교 사회의 뿌리깊은 차별의식이 뼛속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문둥이처럼 대하도록 가르치는 종교 체제 안에서 어떻게 평등과 자유라는 이상을 구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암베드카르>(디완 챤드 아히르 씀·이명권 옮김·에피스테메 펴냄)란 책에 나오는 말이다. 그만큼 그는 인도 내에 신분차별을 일삼아 왔던 카스트 사성제 제도를 뿌리 뽑는 데 삶을 다 바쳤다.

사성제란 힌두교 법전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모든 인도인들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네 가지 계급제도를 일컫는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자식 대에, 그리고 그 다음 세대까지 영원토록 이어지는 것이니, 그는 그것을 완전히 뿌리 뽑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출신으로 태어난 그에게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용저수지마저 맘대로 마실 수 없었던 불평등 사회를 겪으며 자란 그였기에 도무지 힘에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굴욕이 '불가촉'이라는 사회적 저주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고 난 후, 그것을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인도에 태어난 진정 어린 목적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고, 훗날 미국과 영국에서 경제와 정치, 법 전반에 걸쳐 여러 박사 학위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 뒤 1923년 봄베이 고등법원 변호사로 일하면서 '불가촉'이라는 사회적 저주를 끊기 위해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

그 기폭제가 된 것이 있으니, 그를 중심으로 만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마하드'에 몰려 불가촉천민에게는 '금지된 저수지'였던 '초다르 저수지'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던 일이다. 더욱이 맨 앞에서 거리 행진을 주도했던 그는 상위 카스트 주민들 앞에서 보란 듯 저수지 물을 떠 마셨고, 그것은 인도 사회에서 실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 제도를 뿌리 뽑는 데에는 아직은 힘이 미약했다. 그리하여 일만 오천여 명이나 되는 군중들과 함께 온 힘을 모아, 수차례에 걸친 '진리파지' 운동을 감행하게 된다. 그 투쟁 속에서 매를 맞고 잡혀 간 사람들이 엄청났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무려 5년 동안이나 그 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그런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그때까지도 그와 함께 인도 독립에 온 힘을 쏟아 부었던 간디였다. 비록 정치노선과 독립운동에 대한 방향은 폭력과 비폭력이란 차이가 있었지만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둘 다 똑같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인도 내부로부터 진정 해방시켜야 할 카스트 제도를 없애는 데에는 간디는 결코 달랐다.

"간디가 반(反) '불가촉' 정책의 시행에 그다지 열심을 내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1915년부터 1932년까지 여섯 차례의 단식을 결행하면서도 '불가촉'이라는 사회적 저주를 깨부수기 위한 단식은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정통파' 힌두교인들에게 불가촉천민들을 사랑과 긍휼로 대하라고 권면 했을 뿐이며, 불가촉천민들을 위한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114쪽)

그런 간디 때문에 암베드카르는 정통파 힌두교인들에게 숱한 회유와 압박과 고초를 겪게 된다. 더욱이 몇 차례에 걸친 원탁회의 석상에서 간디는 '피압박 계층'에게는 어떠한 정치 의석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피우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암베드카르는 갖은 노력들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 결과 1932년 8월 영국 정부가 발표한 '중재령'에 의해 불가촉천민들에게도 '지역 의회'에 독자적으로 대표를 선출하여 파견할 권리를 얻어내게 된다. 이른바 불가촉천민들도 다른 소수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집단으로 인정된 것이고, 독자적인 의석과 선거권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암베드카르에게 간디가 패한 꼴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중재령' 수정을 요구하면서 '죽음을 무릅 쓴 단식'에 들어갔지만 그 또한 얼마나 웃긴 꼴이었는지 알 수 있다.

1947년 8월 15일, 마침내 인도 독립이 선언됐을 때, 네루가 이끄는 내각에서 암베드카르는 초대법무장관직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무려 141일간에 걸친 헌법 초안 총 315개 조문과 8개 부칙을 작성하여, 8개월에 걸쳐 전 국민에게 공개하여 날카로운 질문과 명쾌한 대답, 그리고 7635건에 달하는 수정안 동의를 거친 후, 명실공히 인도 헌법으로 제정받게 된다.

그밖에도 그는 노동자 복지 대책을 수립하는 등 노동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민중교육협회'를 결성하여 여러 학교도 설립하는 등 교육자로도 손색이 없었고, 결혼과 상속과 입양과 재산권 등에 있어서 철저히 부인되었던 여성 권리도 평등하게 보장하는 법안까지 제출하는 등 인도 사회 여러 면에 걸쳐서 참다운 해방을 실현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살펴 본 것을 토대로 할 때, 영국으로부터 해방하는 일이든 인도 내부로부터 해방하는 일이든, 진정 어린 인도 독립의 아버지는 간디가 아니라 '암베드카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암베드카르 - 인도 불가촉천민 해방자.현대 인도불교의 중흥자

디완 챤드 아히르 지음, 이명권 옮김, 코나투스(2005)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