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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면서

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보수 세력들이 시청 앞 광장에서 퍼주기 외교를 규탄하며 인공기를 불태우는 이 시점에 북을 방문하여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작가대회를 치르고 온 나의 글쓰기가 얼마나 많은 걸림돌과 이데올로기의 딴지에 걸려 넘어져야 할지를 자문해 보면, 보고 들은 말꼭지 하나 찍어온 사진 한 장도 부담되지 않는 것이 없음을 고백한다.

▲ 방북허가증, 항공권, 대회참가 이름표
ⓒ 정용국
또한 남북작가대회가 상호간의 존중과 체제인정을 전제로 한 만남이었으므로 우리를 높이거나 상대를 낮추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지난한 고민과 넓은 인식의 폭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남북관계에 바로 불상사가 될 수 있는 현실 문제를 고려해 볼 때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던 처음의 막연한 기대는 차츰 심각한 우울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번 대회가 고무적이고 아주 발전적 방향에서 치러졌듯이 모국어를 통해 민족의 미래를 열고 화해를 도모하는 새롭고 튼튼한 마당이 될 것임을 자부한다.

회갑에의 만남

남측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북측의 조선작가동맹의 합의에 의해 2004년 8월 23일 평양에서 열리기로 했던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작가대회'가 김일성 주석 조문 문제와 집단 탈북자 입국 등 남북간의 냉기류에 밀려 표류하다가 드디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방북으로 시작된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와 더불어 7월 20일부터 25일까지 당초의 계획대로 평양에서 열리게 되었다. 행사를 알리는 안내책자 서문에는 '마침내 그리움이여'라는 제목의 글이 그 아픔을 말해주고 있다.

▲ 남북작가대회 대표단이 출국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 정용국

"이번 대회는 60년 전, 남과 북의 문학인들이 꿈꾸었던 전국문학자대회가 무산된 이후 최초로 대표성을 띠는 의미있는 사건이다. 남북의 문인들이 마지막으로 헤어진 것은 1945년 12월 13일이었다. 당시 이기영 등은 서울에 내려와 남북을 포함한 통일적인 민족문학자 조직을 위한 총회를 열고 전국문학자대회의 개최를 결정한 다음 다시 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60년이 흐른 것이다.

하나의 모국어로 똑같은 민족의 삶을 노래하던 문학인들의 헤어짐은 곧장 문학사의 파행과 질곡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분단의 역사를 슬퍼하며 가장 먼저 그리움의 노래를 터뜨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문인들이었다. 1956년 박봉우의 시 '휴전선'으로 시작된 문학인들의 통일 열정은 분단과 냉전 이데올로기와 충돌해가면서, 신동엽, 고은, 김지하 등의 시와 남정현 등의 필화사건을 낳으며 당국의 탄압 속에서도 치열하게 그리움을 토해냈다.

1998년 7월 2일, 드디어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입을 열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문학인들은 헤어짐의 역사가 이대로 계속되게 할 수는 없다며 '남북작가회담'의 개최를 북의 조선작가동맹에 전격적으로 제안했다. 이듬해 3월 27일 남측 대표단(5인 대표: 고은, 백낙청, 신경림, 현기영, 김진경) 일행이 판문점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파주군 운천리 여우고개 부근에서 대표단을 비롯한 26명의 문인들이 전원 당국에 연행되었다.

남북문인들이 실로 60년 만에 만나게 될 이 대회에는 남북 문학인 200여명이 한 자리에 앉게 되며, 양측의 문인들은 이 대회를 통해 평양, 묘향산, 삼지연, 백두산으로이어지는 5박6일 일정의 뜨거운 상봉을 나누게 된다. 행사는 평양에서 개막된 후 백두산 천지에서 일출시각에 맞춰 '통일문학의 새벽'을 여는 것으로 절정에 오른다.

이는 분단 이후 최초로 이뤄지는 양쪽작가들의 공식적 만남이자 절름발이 상태로 남아 있던 분단문학사를 극복하는 뜨겁고 중대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어서 평양으로 돌아와 묘향산에서 등반을 함께 하는 등 열정을 나눌 것이다.

이 대회는 남과 북, 해외의 문학인들이 집단적으로 만나 서로가 다르게 살아온 세월을 뒤섞으면서 모국어권 문화의 온전한 크기를 회복하려는 문학자대회이다. 남과 북의 작가들은 이 행사가 각자의 내면 깊숙이에 자리한 무의식의 공간까지 무너뜨리는 만남의 광장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바야흐로 '문학의 통일' 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남측의 작가들은 2004년 8월 17일 통일교육원에서 방북교육까지 다 끝내고 숨을 죽이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드디어 2005년 7월 19일 북에서 초청장이 나왔고 전국에서 모인 문인들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주의사항을 듣고 새벽의 출정을 위해 근처 친구의 집으로, 여관으로 헤어졌다.

7월 20일 아침 8시까지 인천국제공항으로 모이라는 지시에 거의 모든 회원들이 잠을 설치고 뒤척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모여드는 대표단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었다. 안개로 고려항공기가 늦는다는 말 한 마디에도 "혹시"를 연발하며 마지막까지의 긴장감이 참가자들이 모인 인천공항 A지역에 팽팽하게 감돌았다. 워낙 명망가급 문인들이 총동원된 행사인지라 언론사 카메라가 바쁘게 돌아다닌다.

정도상 상황실장이 8시 50분에 발표한 내용은 아직도 평양에서 항공기가 뜨지 못하고 있어서 일정이 순연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향지 시인이 그 동안 서로 너무 많이 연막을 피워서 참으로 오랜만에 어렵게 만나는 날도 안개가 낀다고 말하여 다 웃고 말았다.

출발이 지연되자 아침을 거른 사람들이 요기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하여 김해화, 김창규, 오인태, 김용락, 손세실리아 시인 등과 공항의 비싼 설렁탕을 말아 먹었다. 지난 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지난 밤에 과하게 마신 듯 북어해장국을 시켰다. 말에 의하면 삼합에 막걸리가 지나친 것 같다고 투덜대는 인사가 있었다.

▲ 출국장 벽에 걸린 깃발.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가 보인다
ⓒ 정용국

오전 10시 장백폭포 그림이 시원하게 걸린 국내선 출국장 앞에서 출발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염무웅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은 결연한 목소리로 출국성명을 읽었고 대표단들도 숙연한 분위기와 결의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워지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준비해서 걸어둔 깃발에는 김남주의 시 한 귀절이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남과 북의 끊어진 철길 위에도 쓴다 조국은 하나다' 아, 늘 끓는 목소리로 조국은 하나다라고 외쳤던 고인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또 한 깃발에는 기차표를 끊어다오! 라고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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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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