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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대리석 벽과 천정으로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연회장 내부.
ⓒ 정용국
나는 연회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내내 대회 마지막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 대표 세 명이 함께 외쳤던 만세 소리는 오래도록 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6.15 공동선언 만세!
민족작가대회 만세!
조국통일 만세!"

특히 '조국통일 만세!'는 영화 <쉬리>나 <실미도>에서 적지로 향하는 유격대원들이 죽음을 걸고 마지막으로 외치던 외마디 소리로 각인되어 있어서 섬뜩했지만 사실 이 말이야말로 남과 북 어느 곳에서 외치더라도 좋은 말이 아니었던가. 왜 이 말이 불경스럽고 요즘말로 쌩뚱맞게 들렸을까.

그러고 보니 우리는 분단으로 말미암아 언어뿐만 아니라 참 많은 것들이 매카시즘의 위력에 눌려 살고 있다. 더구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생명으로 하는 문학이 보이지 않는 생각의 통제력 아래서 끙끙대고 있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지 자문해 본다. 이젠 더 이상 서로의 실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경스럽고 위법이지 않게 실제와 형식을 바꿔야 할 것이다.

▲ 연회장의 남자 접대원들은 짧은 머리에 흰 정장을 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 신속한 서비스가 일품이었다.
ⓒ 정용국
이러한 무거운 생각들은 연회장으로 들어서면서 뜨거운 박수 소리에 말끔히 가셔졌다. 하얀 대리석 벽과 흰색 천정, 그리고 흰 정장으로 멋을 낸 남자 접대원 동무들의(우리 일행들은 남에서 금기시 되어 있는 '동무'라는 말과 북의 말투를 흉내 내어 북에 머무는 동안 자연스럽고 다정하게 부르고 사용했다) 모습 등 연회장은 밝고 깨끗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 조선작가동맹이 환영연에 초대한 초대장
ⓒ 정용국
크고 둥근 원탁이 삼십여 개 놓여져 있었고 각 원탁에는 번호표가 있어서 우리는 이미 받은 안내장의 번호에 앉으면 됐다. 만세 삼창을 끝내고 대회의장을 나설 때 우리들은 흰 봉투 하나씩을 받았는데 그것은 우리를 조선작가동맹이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리는 환영연회에 초대한다는 정중한 초대장이었다. 몇 걸음 걸어서 가면 되는 연회장에 가는데 이런 별도의 초대장이 필요할까 생각했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고 또 우리를 최고의 예우로 맞아준다는 의미로 해석하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나는 21번 원탁으로 안내되었는데 우리 6조 조원 일부와 북의 문인 두 명이 합석하도록 미리 짜여져 있었다. 김성수 교수, 오인태 시인, 남송우 교수 그리고 북의 리철식 시인과 조정흡 소설가가 같은 원탁에 자리하여 반갑게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 기본요리와 음료, 술이 미리 준비된 원탁.
ⓒ 정용국
이미 탁자에는 기본 요리 네 가지와 여러 가지의 음료와 술이 놓여져 있었는데 평양소주, 백두산 들쭉술, 룡성맥주, 배단물, 탄산수, 흰포도주 등 한꺼번에 너무 많은 종류의 술 때문에 어떤 것으로 마셔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건배할 요량으로 작은 잔에 벌써 소주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소주를 많이 마시는 문화는 남과 북이 같은 모양이었다.

나의 주특기인 호기심은 탁자 위에 놓인 차림표를 살펴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리향구이, 낙지깨장무침, 청포랭채, 쉬움지짐말이와 송편, 숭어단즙튀기, 고기다짐구이, 메추리알국, 과줄 등 이 얼마나 재미있고 다정한 우리의 말인가.

열네 가지의 음식이 나오는데 영어는 단 한 가지가 있었으니 옥의 티 '크림'이 그것이었다. 나중에 나오는 것을 보니 아이스크림이었는데 고것도 아예 그 재미난 '얼음보숭이'로 썼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남에서는 얼음보숭이가 하도 신기하고 재미난 표현이어서 북에서 그렇게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실은 북에서는 만들어 놓고 잘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재료와 방법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이치인데 나는 '쉬움지짐말이'를 이 차림표에서 가장 우수한 이름으로 기억한다. 이 이름은 너무 번거롭고 어려운 것을 피해서 송편을 만들 때처럼 손으로 테두리를 봉하는 과정을 줄여 버렸대서 붙인 이름이다. 송편을 하나하나 만들자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는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방식대로 하면 지짐판에 반죽을 지지다가 속을 넣고 반으로 접은 후 눌러버리면 끝나는 이 방법을 '쉬움지짐말이'로 표현한 것이니 얼마나 뛰어난 재치인가. 남쪽에서는 그냥 '메밀전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음식이 이것일 것이다.

'단즙튀기'도 재미난 이름인데 남쪽에서는 '튀김'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사전에는 '튀기다'는 동사가 있을 뿐인데 '뻥튀기'에는 뒤에 붙어서 명사로 쓰이고 있으니 북쪽의 표현도 일리가 있는 좋은 이름인 것이다. 단즙도 남쪽에서는 무슨 무슨 소스로 바뀌었을 것이 분명하다. 과줄 또한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

나는 내가 이러다가 국가보안법 '고무찬양' 죄에 걸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스운 자문을 해본다. 더구나 보수우익의 무리들이 '그렇게 좋으면 그리로 가라'고 하는 판에 박힌 비아냥거림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아서 등골이 오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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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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