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파부 외도우항에 도착한 최부일행은 18일 동안 1500리길을 달려와 1448년 2월 6일 항주에 도착했다. 항주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최부일행을 맞은 것은 전단강이었다. 최부의 눈에 비친 전단강은 어떠했을까? “강물은 산을 따라 꾸불꾸불 흐르고 있는데 산에 부딪친 물결이 되돌아오는 기세가 있어 절강이라고 하는 듯 했다“며 묘사하고 있다.

또 “강변에는 화려하게 채색한 선박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 바다로 착각할 정도로 강폭이 넓은 전단강은 절강성에서 가장 큰 강으로 100톤급이 넘는 산만한 배들이 숨 가쁘게 드나들고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용선(龍船)들까지 어우러져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겼다. 최부가 보았던 것처럼 전단강 조수는 밀물이 높고 변화가 많아 밀물의 용솟음이 아슬아슬한 것으로 이름나 있다.

버스 유리창 밖으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전단강 너머로 항주의 화려한 신시가지와 함께 아직도 역사에 찌든 삶의 터전들이 눈에 들어왔다. 답사팀은 고려사(高麗寺)로 향하고 있다. 항주에 6일째 머무르던 날 최부에게 중국사신 고벽이 고려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항주성 서쪽 팔반령(八般嶺)에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 이름이 고려사요. 절 앞에 서 있는 두 개의 비석은 옛 일을 적고 있소.”

▲ 고려사 터에 호텔이 지어져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신광재
고벽의 말에 최부는 “고려사람이 건축한 절이라 하였소? 그러나 지금 조선은 불교를 이단시하고 유학을 존중하고 있소. … 만약 중이 되려는 자가 있으면 군대로 보내 버린다오”라며 당시 조선이 불교를 숭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내비치고 있다.

대각국사 의천이 지은 고려사

고려사에 도착한 답사팀은 ‘표해록’의 기사에 나온 두 개의 비석을 찾으려 했지만 고려사 터에는 호텔이 지어지고 호수가 있는 작은 공원으로 조성돼 세월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1994년 최부선생 기념사업회가 이곳에 최부선생 기념비를 세우려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무산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 대우그룹이 이곳에 휴양지를 지으면서 최부 기념비도 세울 계획이었으나 그룹이 파산돼 기념비 건축도 백지화됐다. 뒤에 최부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는 우여곡절을 소개하겠지만 이때부터 최부 기념비의 첫 단초가 잘못 뀌어지게 된 것이다.

중국 정부가 한국인 관광객을 겨냥해 오는 10월 고려사를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그나마 답사팀을 위로했다. 고려사는 중국에서 해인사로 불리며 927년 오월국 국왕 전류가 지은 것으로 중국 정부는 소개하고 있지만, 표해록에는 고려의 사신이 와서 지은 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최부에게 고려사를 소개한 고벽은 “조나라와 송나라 때 고려의 사신이 와서 세운 것이오. 이렇게 국경을 넘어서까지 절을 지었던 것으로 보아 귀국 사람들이 얼마나 불교룰 숭상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겠소”라고 말하고 있다. 당

시 절을 지었던 승려에 대해 학계에서는 의천대각국사로 추정하고 있다. 혜인사에서 고려 승려들과 불교 문화교류가 자주 열리자 ‘고려사’라고도 불렸다. 지금 고려사에는 동파정(東坡亭)이 세워져 있는데 안에는 고려사 터에서 출토된 송나라때 소동파 호법석상만 진열되어 있었다.

그림 같은 서호 500년 전에는 작은 고랑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답사팀은 비례봉으로 발길을 돌렸다.
비례봉은 최부일행이 항주를 떠나면서 담배 한 대 태울 정도의 시간을 내 잠시 눈길을 돌렸던 곳으로 비례봉의 어원이 흥미롭다. 인도의 혜리스님이 이곳 봉우리를 보고 “인도의 영치산 봉우리와 어찌 똑같을 수 있느냐”며 “이는 분명 영취산 봉우리가 날아온 것”이라고 해서 비례봉이 되었다고 한다.

첫날 최부 일행의 흔적을 따라 나선 답사팀은 저녁 늦은 시간 항주를 떠나 최부 일행이 표착했던 영파부로 향했다. 항주를 떠나면서 유리창 밖으로 항주시내 서쪽에 위치한 그 유명한 서호를 볼 수 있었다. 서호의 아름다움이 수려한 자연적인 산야와 조화를 이뤄 한 폭의 그림처럼 서로 어울리며 빛나고 있었다. 서호는 항주 한복판에 있는 인공호수로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지만 최부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작은 고랑에 불과했었다. 최부가 본 서호는 “작은 고랑을 파서 서호의 물을 성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최부 일행이 항주에 도착해 7일 동안 머물렀던 이유는 북경으로부터 회신을 받기 위해서였다. 관리를 북경으로 보내 최부 일행과 관계된 일을 보고한 뒤 최부 일행을 북경으로 이송할 것인지에 대한 답변을 듣기 위해 항주에서 7일 동안 머물렀던 것이다. 답사팀은 항주를 떠나 1500리 길을 역으로 흔적을 찾아 나서기 위해 2시간 동안 차를 달려 영파부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광주매일신문에서 역사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관심분야는 사회, 정치, 스포츠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