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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단술을 담갔다. 74년 4월 아버지 생신 하루 전이었다. 아침에 세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정중하게 같이 가자고 했다. 아버지는 그들을 따라 나섰다. 동네를 벗어나자 아버지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고 한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년 뒤 아버지는 만신창이 주검으로 돌아왔다.

75년 4월 9일 생물시간인데 담임선생님이 대신 들어오셨다. 담임선생님은 창 밖을 내다보며 담배만 피우고 계셨다. 20분쯤 지났을까? 내 이름을 불렀다. 복도로 나갔다. 선생님은 또 한참동안 말없이 담배를 피우셨다. "가방 싸서 집에 가라." 난 왜냐고 묻지 않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서도원(당시 51세)씨 장남(43)의 기억이다. 그는 "광복절 아침 태극기를 다는 초등학교 5학년 아들에게 '태극기는 달아라, 그러나 미국 때문에 우리나라는 아직 완전히 해방된 게 아니다'라고 말할 만큼 아버지는 반미주의자였다"고 한다.

서씨는 인혁당이란 조직의 실체는 없었다고 단언한다. 모두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었고, 당시 법으로 처벌받을 일은 북한방송을 받아 적은 문건을 갖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고 한다. "함께 사형당한 분들과는 가끔 모여 세상 걱정하는 정도였으며, 요즘으로 치면 시민운동가쯤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당시 정부의 발표는 이러했다.

인혁당은 '남한에 강력한 지하당을 건설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간첩 김상한이 재남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1962년 1월에 조직한 지하당이다.

인혁당은 그후 거의 지하에 잠복해있는 상태이다가 1972년 7월 4일 남북대화의 시작을 틈타 지하활동을 강화, 1973년 10월 이후의 학원소요와 유류파동, 개헌청원서명운동 등이 일어나자 제2의 사일구로 사회혼란을 조성, 민중봉기로 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적화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라고 속단, 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들을 선동,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기도하다가 검거된 것이다.


조사과정에서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문이 가해졌다. 재판과정에서도 피고인측 증인 신청은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혐의사실을 부인하는 진술은 시인하는 것으로 기록되는 등 공판조서조차 허위로 작성되었다.

대법원 판결 후 20시간도 지나지 않은 4월 9일 새벽 5시,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김용원·우홍선·여정남씨 등 8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다. 서도원씨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렇게 죽는 것이 부끄럽다', '막내가 보고 싶다'는 등의 몇마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시신처리도 가족들의 의사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장례미사를 위해 응암동 성당으로 가던 송상진씨의 시신을 실은 차를 경찰 수백명이 막아섰다. 유족과 문규현신부 등은 시신을 뺏기지 않으려고 차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경찰은 크레인으로 차를 견인해 벽제화장터로 끌고가 화장을 해버렸다.

4월 8일 사법사상 암흑의 날

국제법학자회의는 이 사건 최종판결을 한 75년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으며, 엠네스티는 '야만적 살인행위'로 규정한 바 있다. 또 지난 1995년 4월 문화방송이 판사 315명을 대상으로한 설문조사에서 이 사건 재판이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고 응답했다.

그 동안 희생자 가족들은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집안은 풍비박산나고 경찰이 집앞에 상주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사형집행 후 희생자들의 친구가 곁에 간직하고 싶다며 내복 셔츠 등을 받아간 적이 있었다. 79년 남민전 관련자들이 이 옷을 이용해 깃발을 만든 일로 사형수의 아내들이 경북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서씨는 "우리집을 감시하던 형사가 인삼 두통을 사들고 와서는 온몸에 피멍이 들어 누워있는 어머니 앞에서 펑펑 울고 갔었다"며 "아직도 어머니는 사람 만나기를 극히 꺼린다"고 했다.

90년대들어 이들을 재조명하려는 각계 노력이 이어졌다. 96년에는 이들을 위한 추모비가 경북대·영남대 교정에 세워졌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주도한 학생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하고, 추모비를 탈취하기까지 했다.

"중정이 고문을 통해 조작한 사건"

지난해 9월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중앙정보부가 고문을 통해 조작한 사건'이라 규정하고 13가지 이유를 들어 이 사건의 수사·재판·사형집행은 위법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 정부에 대해 전면적이 추가조사를 권고했다.

정부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정부의 공식입장은 "인혁당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정 6국장으로서 수사 지휘선상에 있었던 이용택(73)씨는 의문사위의 발표 이후 <오마이뉴스>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인혁당이라는 반국가단체는 실존했다. 그러나 나 몰래 (부하들이) 고문을 하지 않았겠나 하는 의심은 있다"고 말했다. 고문 자체를 부인해온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난 것이다.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침묵하고 있다. 사법적으로는 아직도 지난 28년간 유지돼온 판단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대한 법조계의 비판이 거세다. 대한변협신문도 지난해 10월 발간된 제66호 1면에 "대법원 인혁당재판 사과해야"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천주교 인권위 인혁당대책위는 지난해 12월 우선 사형당한 8명에 대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유족들과 관계자들은 이번에야말로 재심을 통한 명예회복이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사건이 사법제도를 악용해 독재권력이 저지른 '살인사건'이라면, 사법제도를 통해 바로 잡는 것은 사법부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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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에서 사회부 문화부 편집부 등을 거쳤습니다.오마이뉴스 대구/경북지역 운영위원회의 제안으로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대구경북지역 뉴스를 취재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마이 뉴스가 이 지역에서도 인정받는 언론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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