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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의원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으로서 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받았던 사실이 최근 네티즌 사이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바로 강준만 교수를 통해서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 교수는 지난 해 펴낸 <한국 현대사 산책>의 '1980년대 편-'깃발사건'과 김근태 고문사건'에서 1985년 12월 법정에서 있었던 김근태 의원의 진술을 소개하며 "5공 치하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시국사건이 그랬듯이 이 사건(깃발사건) 역시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며 "이 진술(김 의원의 진술)은 5공의 야만성에 대한 생생한 증언인 바, 길게 인용하겠다"고 밝혔다.

강 교수가 책을 통해 자세히 인용한 김 의원의 법정 진술 내용은 인터넷의 바다를 타고 금세 네티즌 사이에 퍼졌다. 네티즌들은 자신들의 블로그나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이 내용을 '퍼다 나르며' 당시 정권의 야만성에 혀를 내둘렀다.

또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김 의원이 잔혹한 고문을 당했던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이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라는 점이다. 지난 99년에는 검찰 조사에 의해 김 의원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던 당시 정 의원이 직접 남영동을 방문해 '혼을 내서라도 밝혀내라'고 지시했다는 진술이 나와 파문이 일기도 했다.

강준만 교수는 그의 책에서 김 의원의 법정 진술 내용을 소개하면서 <세계일보>의 보도내용(99년 12월17일치)을 인용해 '김근태 고문사건'과 정형근 의원의 연루 의혹도 함께 다뤘다. 강 교수가 인용한 세계일보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검찰은 85년 9월5일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이던 한나라당 정 의원이 김근태씨를 조사하던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로 찾아가 "혼을 내서라도 철저히 밝혀내라"고 박처원 단장에게 발한 뒤 이근안씨가 이날 오후 즉시 김씨 고문수사에 투입됐다고 밝혔다. 박 단장의 진술이라는 전제를 두었지만 검찰은 이씨의 투입이 정 의원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정 의원은 그러나 "당시 박 단장에게 수사를 지시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며 "검찰이 오락가락하는 박 단장의 진술만으로 혐의내용을 발표하는 것은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김 의원 고문사건에 대한 정 의원 연루 여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두 의원은 여당과 야당의 중진 의원으로서 10년째 국회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다음은 <한국 현대사 산책(강준만)>을 통해 소개된 김근태 의원의 법정 진술이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 13일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 그 다음에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방청석의 통곡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의 주범, 옥사했음)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너가 복수를 해라" 이러한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 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 따위야!" 이렇게, 말하자면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방청석 통곡).

고문 기술자들도 가족은 사랑하는가?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사람은 -이름은 밝히진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 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로라도 다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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