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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이 내용 가운데는 '을사오적' 등 익히 알려진 유명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물론 조선·동아의 사주를 비롯해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발굴 친일파' 등 40명 가량의 친일파들의 행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에 대한 우리사회의 본격적인 논의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주2회 이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일본군함 '운양호' 1875년 9월 해안측량을 구실로 강화도 앞바다에 무단침범한 운양호.
1876년 2월 4일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앞바다에 일본 군함 한 척이 출현했다. 1월 6일 일본 시나가와만(品川灣)을 출발, 부산을 거쳐 이 날 이곳에 도착한 이 배에는 일본정부의 특명전권변리공사(特命全權辨理公使)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일행이 타고 있었다.

구로다 일행은 6개월 전에 발생한 ‘운양호(雲揚號)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강제로 수교(修交)조약을 맺으러 오는 길이었다. 구로다를 포함해 무려 8백여 명에 달하는 일행 가운데는 일본인 복장을 한 조선인 한 명이 끼여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인승(金麟昇. 생몰연대 미상).

그는 ‘운양호사건’ 이전부터 일본측과 내통하면서 일본을 도와오다가 이제 그 마무리 작업인 조약(강화도조약)체결을 돕기 위해 동행한 통역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일본을 도운 ‘친일파’는 있었지만 근대적 의미에서 김인승보다 앞서는 친일파는 없다.

구양근 교수 논문 통해 김인승 친일행각 첫 파악돼

친일파연구가 고(故) 임종국(林鍾國)씨 역시 그를 ‘친일파 1호’로 꼽았다. 조선조 말기 양반계층의 지식인이었던 그가 친일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은 이후에 등장하는 친일파들의 행태와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그의 친일행적 연구는 일제하 친일파 연구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인승의 친일행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는 해외에서 일제의 외국인 고문(顧問)으로 고용돼 비밀리에 활동한 까닭에 국내에는 그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임종국씨조차도 그의 글에서 ‘김인승’이라는 이름 석 자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몇몇 역사학자 역시 논문에서 그를 언급한 바는 있으나 그의 전모를 밝히지는 못했다.

김인승의 친일행적은 지난 96년 2월 성신여대 구양근(具良根·당시 도쿄대 외국인 연구원) 교수가 발표한 한 논문을 통해서 그 전모가 드러났다. 구 교수는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서 입수한 3건의 자료를 토대로 ‘일본외무성 7등출사(七等出仕) 뢰협수인(瀨脇壽人)과 외국인 고문(顧問) 김인승’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친일파의 ‘선구자’격인 김인승의 친일행적을 추적해보자.

김인승은 함경북도 경흥(慶興) 태생으로 본관은 김해(金海). 7대조 때 경흥으로 이사한 뒤로 그의 집안은 토반(土班, 지방의 양반)으로 전락하였다. 그는 16세 때부터 경흥부(慶興府)에 근무하면서 상당한 직책을 맡기도 했다.

'양학 공부' 일본인 다케후지 통해 친일의 길로 들어서

'병자수호조약’이란?
한-일간 최초의 외교행위이자 불평등조약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은 병자년에 체결됐다고 해서 일명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으로도 불리는데 정식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조선과의 국교교섭을 줄기차게 추진해온 일본은 조선정부의 쇄국정책으로 교섭이 난항에 빠지자 1875년 9월 20일 해안측량을 빙자하여 ‘운양호사건’을 고의로 유발시켰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군함과 함께 구로다를 전권대사로 파견, 1876년 2월 27일 조선측 대표 판중추부사 신헌(申櫶)과 수교협상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총 12조로 구성된 이 조약은 ▲부산 이외에 원산·인천 추가 개항 ▲조선연해 측량권 허용 ▲개항장 내 조계(租界)설정·일본인의 치외법권 인정 등 다분히 일본측에 유리한 내용들뿐이다.

이 조약은 양국이 국제법적 토대 위에서 체결한 최초의 외교행위이자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홍수와 기근이 몰아치던 1869년 그는 모종의 일로 이 지역 수령과 의견충돌 끝에 관직을 그만두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땅 니코리스크(한국명 吹風, 블라디보스토크 북방 50리 지점)로 탈주하였다.

그 뒤 이곳은 식량을 찾아 월경(越境)한 조선인 유랑민이 대거 운집해 살고 있었는데 한학 실력이 출중했던 그는 여기서 학교를 열고 생도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김인승은 여기서 다케후지 헤이가쿠(武藤平學)라는 한 일본인과 사귀게 된다.

다케후지는 원래 양학(洋學, 서양의 신학문)을 공부하려고 집을 나왔다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흘러오게 된 사람이었다. 바로 이 다케후지가 나중에 그를 친일의 길로 안내하는 첫 안내자가 된다.

한편 이 무렵 러시아가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진(南進)정책을 강행하자 1875년(明治 8년) 4월 일본정부는 외무성 7등 출사(出仕, 일본의 구식 관직명) 세와키 히사토(瀨脇壽人. 1822∼1878년)를 블라디보스토크와 포셋 지방에 파견, 러시아와 교섭을 갖게 하였다.

세와키는 공식적으로는 일본 외무성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키 위해 파견한 외교관이었지만 사실상 정탐꾼이었다. 일본 외무성이 그에게 준 「출장명령서」(1875년 4월 4일)에는 임무의 대다수가 ‘탐색’ ‘정탐’인데 이 중의 절반은 의외로 조선에 대한 것이다. 명령서에는 구체적으로 ‘조선인을 고용하여 조선땅으로 들어가서 토지·풍속 등을 탐색하고 올 것’ 등이 명기돼 있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세와키는 조선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안을 모색하고 있던 세와키는 여기서 일본인 다케후지를 만나 문제의 김인승을 소개받는다. 김인승의 학식과 경험을 높이 산 세와키는 귀국길에 그를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

"일본과 조선은 상맥상통의 나라"

이 무렵 일제는 다수의 외국인 고문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1874∼75년 무렵에는 그 수가 약 2천 명에 달했다. 운양호사건(75년), 강화도조약(76년)이 체결되기 바로 직전의 일이다.

당시 일제는 조선에 ‘황국(皇國)의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이를 근거로 대륙을 침공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외국인 고문 채용은 이를 대비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 그리고 그 첫 군사행동이 바로 75년 9월 20일 발생한 ‘운양호사건’이었다.

1875년 7월 세와키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온 김인승은 운양호사건 발생 직전 1차로 3개월간(8월 1일∼10월 30일) 일본정부와 외국인 고문 고용계약(日給 1원)을 맺었다. 당시 일본 외무성이 그를 고용한 목적은 ▲만주지방 지도작성 ▲북방사정 탐색 ▲조선 침략용 지도작성 ▲기타 필요한 사항에 대한 자문 등. 이 중에서 김인승이 크게 기여(?)한 부분은 조선에 관한 사항이었다.

김인승의 일본 외무성 외국인 고용계약서 총 5조로 된 이 계약서에는 고용목적, 급료 등이 명시돼 있다. 또 그를 고용한 주체가 일본 외무성이며, 소개자인 세와키 히사토와 김인승의 이름도 문건 말미에 분명히 나와 있다.
ⓒ 구양근 교수 제공

1875년 일본 육군참모국이 조선 침략용으로 작성한 〈조선전도(朝鮮全圖)〉는 김인승의 자문을 받아 작성된 것이다. 지도 하단부에 적힌 ‘조선 함경도인 모(某)씨에게 친히 그 지리를 자문받고…’의 모씨는 바로 김인승을 지칭한 것이다. 지도 외에도 당시 조선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계림사략(鷄林事略)』 역시 그의 자문을 받아 출간됐다.

한편 1차 계약기간중인 10월부터 김인승의 급료가 월급제로 바뀌면서 액수도 두 배로 늘어났다. 당시 일본 외무경 데라시마(寺島宗則)는 태정대신(太政大臣, 총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어는 물론 한학, 시문(詩文)이 능통하여 아주 유용한 인물로…한지(韓地, 조선)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라고 그를 평가하였다.

일제는 강화도조약 체결을 앞두고 그를 적절히 활용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강화도조약 체결(1876년 2월 27일) 이후까지 1년 가까이 도쿄에 머물면서 조선침략을 위한 갖가지 정보와 조언을 일본측에 제공했는데 결정적인 공헌은 역시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서였다.

일본 군함에 머무르면서 공문 한문번역·수정 책임

1876년 초 강화도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본정부의 대표 구로다 특명전권공사가 그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그는 ‘이번 수행에서도 만약 머리를 깎지 않고 의복을 바꾸지 않으면 이는 제가 조선인을 자처하는 일이며 일본인의 입장에 처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황국(皇國, 일본)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황송해 했다. 심지어 ‘끓는 물, 타는 불 속이라도 어찌 고사하겠는가’라며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1876년 2월 4일 강화도에 도착한 구로다 일행은 1주일 만인 2월 10일 강화부(江華府)에 상륙하여 다음날 11일부터 담판에 들어갔다.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보름 이상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 군함에 머무르면서 공문의 한문 번역과 수정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약체결 과정에서 수시로 일본측에 조언을 해주었는데 구로다에게는 조선관리 설득방책 18개항을 서면으로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전신기(電信機) 사용을 권장하는 내용에서부터 ‘여러 말 할 필요없다. 청국(淸國, 청나라)은 그처럼 인구가 많고 땅이 넓은데도 먼저 일본에 강화조약을 청하여 맺었다. 두루 살펴 깊이 생각하라’(18항)는 등 공갈·협박성 문구도 들어 있다.

‘직량(直亮)’한 성격에 동포애도 강한, 조선의 전통적 선비정신의 소유자였던 김인승. 당시 그는 일본의 속셈을 헤아리지 못한 채 ‘일본과 조선은 상맹상통(相盟相通)의 나라’로 보고 일본의 강화도조약 체결 추진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조약 체결 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얼마후 러시아로 되돌아갔는데 도쿄에서 남긴 한 편지에서 ‘거리에서 듣기 불편한 말들이 들리고 길을 걸으면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적었다. ‘친일파 1호’가 배족(背族)의 대가로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보상은 멸시와 증오였다. 그의 이후 대개의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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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