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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이 내용 가운데는 '을사오적' 등 익히 알려진 유명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물론 조선·동아의 사주를 비롯해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발굴 친일파' 등 40명 가량의 친일파들의 행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에 대한 우리사회의 본격적인 논의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주2회 이를 연재할 예정합니다... 편집자 주)


▲ 지난 1998년 10월 25일 서울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이화여대생 등 100여명이 친일파 김활란의 이름을 딴 '우월 김활란 상'제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잣코 구경만 할 수가 잇겟습니까. 이 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서부터 되여 잇섯습니다. 내지(일본)학도들과 함께 전문대학 법문계(문과) 반도(조선)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이르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 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엿습니다. 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거러가야될 길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가지 리유 때문에 참렬을 못하는 것입니다. …아프로는 결전하의 국가목적에 쪼차 한사람이라도 더만히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할 각오가 잇슬 뿐입니다”
―「男子에게 지지안케-皇國女性으로서의 使命을 完遂」, 『매일신보』, 1943년 12월 25일자

일제하 지식인이 신문에 쓴 글 한두 편을 놓고 그의 전부인 양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거대한 감옥’ 또는 ‘노예선’으로 불리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쓴 글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생명에 위협이 있었느냐, 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했느냐 하는 점이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않는 지식인은 비난받아 마땅

모든 지식인들에게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몇몇 의·열사가 이에 속할 뿐이다. 그러나 ‘과오권(過誤權)’을 인정한다고 해도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친일 지식인들이 비난받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첫머리의 인용문은 우월(又月) 金活蘭(1899∼1970년)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기고한 글이다. 그렇다면 김활란은 역사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가? 답은 ‘없다’다. 이유는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딴 상 제정은 지식인 사회에 대한 배반이라고 봐야 한다.

흔히 김활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 가운데 하나는 ‘여성박사 제1호’다. 그는 학사·석사·박사를 따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5년간 미국유학을 했다. 귀국해서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당시 이화여전 교장)의 뒤를 이어 1939년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다. 굳이 나눈다면 그는 친미(親美)인사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대동아전쟁’이 터지자 친일, 반미(反美)인사로 돌변하였다.

“저 흑노(黑奴)해방의 싸움을 성전(聖戰)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고 했다. …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東亞)의 천지로부터 미영(美英)을 격퇴하여 버리자”.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 결성식(1941년 12월 2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그가 ‘여성의 무장’이란 주제로 강연한 내용의 일부다. 일제하 대부분의 친미·기독교인사들(백낙준 白樂濬, 신흥우申興雨 등)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해방 후 다시 친미인사로 변신을 거듭했다.

이화학당 졸업 후 '7인의 전도대' 만들어 민족운동 전개

▲ 이화여대 총장시절의 김활란
그는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초대 이화여대 총장에 보임됐고 이승만정권 하에서 한미(韓美)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그의 초심(初心)을 의심케 할 만한 대목이다.

3·1만세의거 당시 김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치고 모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돼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소위 ‘7인의 전도대(傳道隊)’를 만들어 기독교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한 전도활동 수준을 넘는, 일종의 민족운동이었다.

1920년대 후반 좌우 민족진영의 통합으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뒤이어 27년 4월 여성계 민족단체로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었다. 그는 근우회 창립멤버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활동을 중단하고는 미국유학을 떠났다.

1931년 말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농촌교육 관련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문맹퇴치·봉건잔재 타파 등을 내걸고 농촌운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행한 ‘소극적’ 사회운동이었다.

그의 친일행보는 36년 이화학당 부교장으로 있던 시절 첫걸음을 내딛는다. 이 해말 그는 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하였다. 37년 1월 그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7월 들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애국금채회는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의 부인들이 주동이 돼 전쟁물자로 바칠 금비녀·가락지를 모으기 위해 결성한 친일 여성단체였다. 이후 여러 친일단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방송선전협의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등등.

신사참배 거부 와중에도 "내선일체 깃발아래 모이자" 외쳐

그의 활동 중에서 대표적인 하나가 기독교 활동이다. 38년 6월 당시 조선YWCA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매일신보』, 1938년 6월 9일자)라며 일본YWCA에 가맹을 발표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를 당하고 구속자·순교자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그가 취한 행동은 이랬다.

39년 4월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한 이후 그의 친일행각은 본격화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이전(梨專)을 지키기 위한 목적도 없지는 않았다. 김해 김씨인 그의 문중에서는 본관을 따라 ‘김해(金海)’로 창씨를 하였으나 그는 독자적으로 ‘천성활란(天城活蘭, 아마기 카쓰란)’으로 창씨개명하였다.

‘어차피 창씨를 해야 한다면 정말 (일본식으로) 창씨를 해서 자신의 독립된 일가를 세울 생각’이었다. (김정옥金貞玉, 『이모님 김활란金活蘭』 중에서) 41년 12월 대동아전쟁 개전 이후부터는 강연·방송은 물론 가두로 나서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 선전하였다.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등 인력동원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촉구하였다. 해방 직전 무렵 안질로 고생하고 있던 그를 문병차 찾아온 조카(김정옥 전 이대교수)에게 그는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 다닌 죄값’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김정옥의 앞의 책 중에서).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해 반성도, 사죄도 아니다. 뒤늦은 자괴(自愧)라고나 할까.

"역경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산 행운아"

제1회 수상자도 못낸 '김활란상'

'김활란상' 이 아직도 수상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화여대 '우월 (又月) 김활란 탄생 백주년기념사업회'는 지난 99년 5월 24일 "국내외 각계 저명인사 및 단체로부터 34명을 추천받았으나 적당한 후보자가 없어 제1회 수상자를 선정하지 못했다" 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 상의 수상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앞서 98년 5월 이화여대측이 '김활란상' 제정을 선포하고 나선 이후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들은 김활란의 친일행적을 문제삼아 상 제정을 반대해 왔었다.

김활란상은 김활란 박사의 탄생 1백주년을 맞아 이화여대측이 학술.교육 등 각 영역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국내외 여성에게 시상하기 위해 그의 탄생 100주년인 99년 5월 제정됐다.
/ 정운현 기자
해방 후 그는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박정희 정권하에서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독재권력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두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

지난 98년‘김활란상’ 제정 움직임이 보도된 후 민족문제연구소측이 발표한 ‘반대성명서’에 따르면, 그는 ‘4·19 당시 이대(梨大) 학생들의 시위참가를 막았으며, 이듬해 5·16이 터지자 박정희의 특사로 미국으로 달려가서 군사반란의 정당성 홍보에 날뛰고 다녔다’고 한다.

여기자 최은희(崔銀喜)는 그를 두고 ‘모질고 악착한 역경을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산 행운아’라고 평했다. 식민지 시대와 격동기를 산 지식인의 일생이 이러했다면 그는 ‘어두운 시대의 동반자’로 살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60년 가까이 이화인(梨花人)으로 살면서 일제하∼건국기에 이대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 나아가 한국여성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 가운데 ‘흠결’이 너무도 많다고 하겠다. 이대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양보한 셈이다.

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추진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되살리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뿐이다.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새로 밝혀 다시 쓴 친일인물사

정운현 지음, 개마고원(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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