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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준석(河駿錫, 1898년생, 창씨명 河本駿錫)은 경남 창녕 출신으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창녕 부호 집안 출신답게 청년시절부터 실업가로 진출하면서 막강한 권력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 하준석은 친일자본가로 성장하면서 만주 동광학원 이사로 활동했다. 동광학원은 친일파를 양성했던 학교이다.
ⓒ 전갑생
그는 와세다대 졸업 이후 국내로 들어와 1927년 1월 <현대평론> 발행인을 맡으면서 보수적 민족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적극적인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다. 현대평론은 몇 차례의 원고 삭제, 정간 처분을 받은 다음 1928년 1월, 11월호를 내고는 폐간되었다. 하준석은 그 뒤 바로 본격적으로 각종 친일단체 활동 및 정치인으로 변모한다.

1928년 11월 16일 대례기념장 위촉, 1931년 9월 창녕면협의회 의원, 1930년 4월 1일 경남 도평의원(민선), 1933년 5월 11일 경남도의원(관선), 1934년 9월 12일 밀양소조, 1934년 12월 21일 조선나병예방협회 기금 2천원, 1936년 8월 1일 선만(鮮滿) 개척 설립위원 피촉, 1936년 12월 6일 조선사위 사업협회 평의원, 1937년 12월 14일 국방교육회 부이사장, 1938년 1월 27일 동광학원 후원회 위원, 1938년 2월 4일 북지위문단, 1939년 6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는 등 일제 시기를 관통하며 각종 단체와 정치활동에 나서게 된다.

또한 조선공작주식회사 사장, 삼양제작(三洋製作) 사장, 조선총독부 산업경제조사위원, 제주도흥업회사 사장, 창녕주조 이사 등 10여 개 단체의 중요 간부직을 맡았다.

종로에 빌딩 세운 자본가 하준석

하준석은 산업자본가로 성장한 전형적인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1939년 6월 "우리 회사의 제내막(諸內幕)"이라는 글을 보면 더욱 확신할 수 있다.

대륙(大陸)빌딍(빌딩) 금도완성(今度完成)

서울 종로의 종로경찰서 자리이든 곳에 조선공작회(朝鮮工作會) 사장 하준석(河駿錫)씨가 대륙빌딍을 건축할 계획을 가저섯스나(가졌으나) 시국관계로 그동안 건축을 못하고 있든 바 최근에 가건축으로 2층 연와(煉瓦)빌딍을 짓기로 되야 공사 진행중인데 경비는 약 20만원이요 준공은 금추(今秋) 8월까지에 되리라고 한다(삼천리(제11권 제7호) 1939. 6. 1).

그가 종로에 2층 기와 빌딩을 건축할 수 있는 재력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조선중공업(朝鮮重工業)의 한국인 소유주중 한 사람으로 거금 1천원을 투자했다.

1940년대 공업인식에 관하여 그는 침략동반축적론(侵略同伴蓄積論)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공작주식회사 사장 하준석(河俊錫)이 회사를 설립할 때 행한 창립연설에서도 나타난다.

"지금은 지나사변(중일전쟁: 필자)은 이미 1개년여를 경과하여 제삼기작전에 이행하여 피의 장기항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군수자재의 제조확충은 더욱 긴절을 요하는데 아 조선은 대륙의 일부로서 지리적으로 만주국, 북지(화북)를 접하여 전시는 물론이요 평시에 있어도 각종 기계류의 많은 수요에 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때에 있어 전시평시를 불문하고 금후 우리 조선에 약속된 역할은 비상히 중차대한 바가 있다. 오인은 여기에 감한바있어 총후국민으로서 견실한 창의를 다하여 전시체제의 정비를 다하기 위하여 (중략) 전시중에 있어서는 제국전투능력의 확충강화에 공헌하며 평시에서는 중대업의 진흥발전에 기여하고저 하는 바이다.(<三千里>,1939년 4월호 44쪽)"

일제광란기로 접어들면서 그는 1941년 조선사회사업협회(朝鮮社會事業協會, 전신 조선사회사업연구회, 이하 조선사업협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떨쳤다. 당시 그는 김성수(金性洙, 보성전문학교장), 박흥식(朴興植, 주식회사 화신 사장)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최고의 친일권력자로 굴림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인 최고의 직위인 중추원 참의까지 지낼 수 있었다.

▲ 조선사회사업 평의원으로 선임된 하준석
ⓒ 전갑생
조선사회사업협회의 성격은 조선총독부 후생국 사회과 산하 재단법인 형태의 단체로서, "본부 및 각 도 지부가 서로 협력하여 조선에서 사회사업의 보급 및 발전에 노력"하는 조직을 표방하는데, 1941년 11월 조직 변경 당시의 목적 및 사업은, "조선에서 사회사업의 연락 보급 및 그 충실을 도모하고 사업의 건전한 발달을 기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 및 국민총력조선연맹, 기타 후원 하에 각 도 사회사업협회 또는 조선사회사업협회 도 지부가 주최하여 방면위원제(方面委員制)를 실시하여 부읍(府邑)에서 방면위원이 중심이 되어 종합적 실천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거물 친일파 하준석

하준석은 1939년 6월 만42세 때 청년 실업가로 유명세를 떨치면서 중추원 참의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때 현직 경남 관선 도의원직을 밑고 있으면서 조선정동총연맹 이사도 함께 겸직했다.

시중회(時中會)는 천도교 신파 지도자들이 주도하여 결성한 친일단체로서 천도교 신파의 대외적인 친일활동기구이다. 그는 1934년부터 이사로 활동하면서, "우리는 일본 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어느 방면으로나 잘 일치 합작하여 나아감으로써만 우리의 자립적 실력을 확충할 수 있다." 라고 강조했다. 당시 대표적인 참여자는 최린(崔麟), 김사연(金思演), 박희도(朴熙道) 등으로, 1938년 국민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단체로 참석하면서 해체되었다.

1936년 6월 그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위원회 및 간사회 참사로 활동했다. 그가 활동할 당시 장덕수, 박희도 등 다수 국내 유명한 친일파들도 함께 참여했다.

이 단체는 전시총동원기구("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강화를 위해 본부에 위원회와 간사회를 만들고, 동시에 연맹의 내부기구를 정비하고 양자 긴밀한 연계를 확보함.")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통제 강화를 위해 매일 아침 궁성요배, 신사참배 장려, 조선(祖先)의 제사 장려, 가능한 매일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국기의 존중게양의 장려, 일본어생활 장려, 비상시 국민생활기준양식의 실행, 국산품애용, 철저한 소비절약과 저금 장려, 국채응모 권장, 생산 증가와 군수품 공출, 자원의 애호, 근로보국대의 활약강화, 1일 1시간 이상 근로증가의 장려, 농산어촌 갱생 5개년 계획의 완전실행, 전 가정 근로, 응소군인의 환송영, 부상병의 위문, 출정군인 및 순국자 유가족의 위문과 가업 보조, 가능한 매일 순국자 영령 묵도, 유언비어 및 간첩 경계, 방공방첩의 협력 등을 강조했다.

▲ 친일정치인으로 성장한 하준석
ⓒ 전갑생
하준석은 1939년 4월 14일 경성조선호텔에서 열린 '징병·의무교육·총동원 문제로 군부와 총독부 당국에 민간유지가 문의하는 회(會)' 좌담회에 참석하여 '징병제를 역설'했다. 이날 좌담회 내용은 친일 잡지 <삼천리>(1939. 6. 1. 제11권 제7호)에 실렸다. 당시 좌담회에는 조선군사령부 소장,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비롯한 관료들과, 이종만(李鍾萬, 大同鑛業會社長), 인정식(印貞植, 평론가), 신태악(辛泰嶽, 변호사) 등 유명한 조선인 친일파들도 참석하였다. 이로써 하준석은 조선공작회사(朝鮮工作會社) 사장의 신분으로 열성적 친일파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바로 친일주구들 단체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40년 10월 16일 국민총력 조선연맹 참사로 임명되면서 '내선일체의 철저', '황국신민화', '신도 실천', '직성봉공에 의한 고도 국방체제 확립을 목표'로 맹렬하게 친일활동을 벌였다.

또한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경남도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징병제를 선전하고 '대동아전쟁'을 찬성하기도 했다. 특히 조선임전보국단은 지원병 제도의 취지를 선전하는 강연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긴급임시전선대회를 개최하여 전시 협력을 강화하였다. 주요 활동 내용은 중앙과 지방조직을 통해 저축강조, 금속회수운동, 청년체력검사 취지 철저운동, 부인계몽운동, 군복의 근로수리작업 등을 들 수 있다.

'성전을 위해 죽어' 라고 외친 하준석

하준석은 조선인 '지원병'들에게 "내선일체(內鮮一體) 구현화의 극히 현저한 실적으로서 제국을 위하여 또는 반도를 위하여 나가자" 라고 역설했다. 이 정신을 알리고자 한 광분하던 그는 "지원병사제군에게, 십만돌파의 소식을 듣고 전조선청소년제군을 격려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중추원 참의에 오른 하준석
ⓒ 전갑생

"국가총력전과 제군의 임무, 조선공영주식회사장(朝鮮工營株式會社長) 하준석(河駿錫)

제국의 황기2천6백년 축전도 임박하려는 금일 성사(聖師)의 향하는 대는 이미 적이 없고... 신정권의 수립등, 동아 신질서의 확보는 황군(皇軍)과 총후(銃後)국민, 이때를 당하여 전반도민의 갈망하던 지원병제도 제3년의 실적은 실로 지원자 10만, 원래 정원 일약 3천명이 되고 더욱더욱 반도자제중 다수 대륙국방(大陸國防)의 제일선에 용분활약할 수 있도록 된 것은 내선일체 구현화의 극히 현저한 실적으로서 제국을 위하여 또는 반도를 위하여 참으로 경하부감하는 차제이올시다.

그리고 지원병 제사는 나아가 순충지성(殉忠之誠)을 맹세할 황군전사에의 제일보가 됨과 동시에 생사를 가치하는 군인가정에 몸을 위하여 국가적 심신 연마의 도장에 정진하는 것이니까 반도의 삶을 형한 젊은 황민남자로서 넘을 것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지원병 제사, 모름직이 개인을 죽이고 의로운 일에 더한층 높여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의 격려에 능히 자숙자계하여 군인정신으로 총독각하의 제도 실시의 기대에 배치 않고 더욱더욱 성전(聖戰)의 관행에 진심으로 충성(忠誠)을 다하도록 희망하는 바이올시다(『삼천리』, 제12권 제7호, 1940. 7.1)."

위의 하준석의 글은 조선인 지원병들에게 '성전'을 위해 '진심으로 충성을 다해' 나가 죽어 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엄청난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는 하준석은 스스로 '전쟁광분자'로 표방했던 것이다. 수천 수만명의 조선 청년과 학생들은 하준석 같은 친일파 때문에 전쟁터로 끌려가 '황군'으로 전사해야 했다.

해방이후 하준석은 조선승마협회 이사(1945. 9) 등을 맡으면서 권력과 부를 축적하다가, 1949년 반민족특별법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1950년 5월 2일 그는 '반민족행위자'로 계속 재판을 받았지만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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