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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 김수경은 정해진, 이희승, 김계숙과 교류했다.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학생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과 함께 공부한 김계숙(金桂淑)은, 훗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1962~1968년)을 지낸다. 사진 왼쪽이 김수경이다.
▲ 1942년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앞에서 이희승과 함께 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 김수경은 정해진, 이희승, 김계숙과 교류했다.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학생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과 함께 공부한 김계숙(金桂淑)은, 훗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1962~1968년)을 지낸다. 사진 왼쪽이 김수경이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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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을 기리고 추모하는 글이 많이 발표되었다. 여기서는 추모시 일부와 추모비문을 소개한다.

거인의 거울

(전략)
선생님은 근 백년을 살아오시면서
선생님의 마음속에
선생님의 거울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의 거울은 바로
선생님 자신이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비추어 티끌만 한
부끄러움이 없도록
스스로의 거울을 쉼없이 닦으시면서
스스로를 사정없이 무섭게 다스리시며
그 한 세기를 살아오셨습니다.

스승으로서 엄정하시면서도
아버님처럼 자상하시고 인자하셨던
선생님!
선생님은 바로 저희들
아버님이셨습니다. (후략)
- 정한모, <일석 이희승 선생님 영전에>

추모비문

여기 겨레의 스승이요 민족의 지사 한 어른께서 고이 누워 계시다. 경술국치 이래로 세상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선생은 꼿꼿한 지조로 한 세기를 사시면서 백 년을 하루같이 겨레의 사표 자리를 지키셨다. 선생은 전의 이씨로 위는 희승이시니 1896년 6월 9일에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표일리에서 고 위종식 씨와 비 박원식 씨의 맏아드님으로 태어나 온갖 고초 끝에 1927년 34세의 나이로 경성대학 조선어문학과를 마치셨으나, 선생이 국어 연구에 뜻을 둔 것은 18세 때부터의 일이었다.

1930년 4월에 조선어학회 회원이 되어 민족의 숙원이었던 한글맞춤법을 완성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서 국어국문학 연구와 강의로 민족의 얼을 지키시다가 마침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주모자로 일제하에서 3년여의 혹독한 옥고를 치르셨다.

광복과 더불어 서울대학교·대구대학교·성균관대학교 교수와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학술원회원·국어심의의회위원·진단학회 평의원·국어학회 고문을 역임하시면서 국학진흥에 크게 이바지하고 학자, 교육자로서 큰 자취를 남기셨다.

한편 동아일보 사장직을 맡아 언론창달에 공헌하셨고, 현정회 이사장으로서 국조 단군의 숭앙사업에도 앞장을 서셨다. 선생은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이어 정재로 장학사업과 학회육성에 크게 마음을 쓰셨고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워 자부처럼 따르는 제자가 줄을 이었다.

구순에도 선생의 낭랑하시던 음성이 아직도 들려오는 듯한데 1989년 11월 27일에 세상을 뜨시어 13세부터 해로하시다가 1987년 12월 29일에 먼저 가신 배 경주후인 이승욱 씨의 장녀 정옥 여사와 함께 누워 계시니 부디 저승에서도 길이 편안하소서.

1991년 월 일
문하생 강신항 찬 정양완 서

※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주석
1> <새소식> 7호, 1990. 3. 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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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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