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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 김수경은 정해진, 이희승, 김계숙과 교류했다.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학생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과 함께 공부한 김계숙(金桂淑)은, 훗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1962~1968년)을 지낸다. 사진 왼쪽이 김수경이다.
▲ 1942년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앞에서 이희승과 함께 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 김수경은 정해진, 이희승, 김계숙과 교류했다.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학생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과 함께 공부한 김계숙(金桂淑)은, 훗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1962~1968년)을 지낸다. 사진 왼쪽이 김수경이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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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작고 왜소한 체구였다. 그러나 이것이 콤플렉스가 되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 지장을 주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건장한 인물 여럿이 함께해도 하지 못할 일을 척척 해냈다. <5척 단구>는 자신의 작고 왜소한 체구에 관해 쓴 글이다. 좀 긴 글이어서 일반론적인 부분은 생략하고 비교적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 내용을 골라서 소개한다.

다양다채성(多樣多彩性)의 구색을 갖추기 위함인지 필자는 가장 단소한 체구를 타고났다. 이 사실은 필자에게 비극이 되는 일도 있고 희극이 되는 일도 있으며, 때로는 희비 교착의 혼성극이 되는 일도 있다. 어떤 친구는 이수광 볼쥐어지르게 나를 놀려댄다.

"웬 안경이 하나 걸어오기에 이상도 하다 하였더니 가까이 닥쳐 보니까 아 자넬세 그려." 하는 말은, 우선 약과로 들어야 하고(六·二五 사변 전까지는 근시로 말미암아 안경을 썼었다). 무슨 회합에서 불행히 사회를 맡아 보게 되거나 목침돌림 차례가 와서 일어서게 되면 "자네는 서나 앉으나 마찬가지니 앉아서 하게." 하는 반갑지 않은 고마운 말도 가끔 듣게 된다. 대추씨라는 탁호(卓號)를 받게 된 것은 단단하다는 의미 외에 '작다'는 뜻이 더 많이 내포되었다는 것을 빤히 짐작하게 되었고, 일찍이 소인구락부(주로 교원으로 성립됨)의 패장을 본 일이 있었으나 내 위인이 꺽져서가 아니라 키가 가장 작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은 다 말로만인지라 그다지 탓할 것도 없고 마음에 꺼림칙할 것이 조금도 없다. 그저 마이동풍 격으로 흘려만 보내고 받아만 넘기면 뱃속은 편할 대로 편하여 천하태평이다.

그러나, 가장 질색할 노릇은 무슨 구경터 같은 데서 서서 볼 경우에, 키가 남보다 훨씬 크다면 사람우리 데 밖에서 고개만 넘석하여도 못 볼 것이 없을 터인데 나와 같이 작은 키로는 구경꾼들의 옆구리를 뻐기고 두더지처럼 쑤시고 들어가서 제일선에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 현대의 공중도덕의 수준에 있어서는 나로서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려면 우선 건곤일척의 결심과 대사일번(大死一番)의 노력이 필요하므로 대개는 애당초부터 단념하고 말게 된다. 내가 만일 구경을 즐기는 벽이 있었더라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추렴을 내서 먹는 자리가 있다고 하자. 체소(體小)한 필자는 본래 먹는 분량도 적거니와 먹는 템포조차 이 세상에 그 유례가 다시 없을 만큼 느리기 때문에 내 젓가락이 음식 그릇에 두 번째 들어가기 전에 한 두럭이 다 달아나고 말게 된다. 돈은 돈대로 내면서도 음식은 맛도 채 못 보고 물러가게 되니 억울하기가 한이 없다. (중략)
키 작은 사람으로서 가장 타격이 큰 것은 외교에 있어서다. 신언서판이란 말이 있지마는 여인(輿人) 교제에 있어서는 몸집이 비대하고 신수가 미끈한 것이 우선 첫인상으로 효과 백 퍼센트다. 이 첫인상이란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워낙 작고 오종종하고 졸토뱅이로 생겼으면 남에게 한 손 잡히는 것이 열이면 열 번이다. "고추는 작아도 맵기만 하다"라든지, "제비는 작아도 강남만 잘 간다."라는 속담이 통하기 전에, "산이 커야 골이 깊지" 하는 선입견을 주기 쉽다. 그리하여 열 양중(兩重) 나가는 사람이라면 닷 냥쯤밖에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다. (중략)

"네 키가 작다 하니 대체 몇 자 몇 치나 되느냐."고 물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대답하여 두겠다.

대학예과에 입학을 할 무렵에 잠방이 하나만 입고 양말까지 벗어 버리고 재어 보니 꼭 '5척 0촌 2분'이었다. 어쨌든 오 척 이상이니까 군인이 되는 데 키로서는 우선 합격권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의기양양할 것은 없어도 또한 자포자기할 필요가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체소하기 때문에 관심은 키 큰 사람에게보다 키 작은 사람에게 더 많이 간다. 어떤 기회에, 혹은 거리를 다니다가 키 작은 사람을 발견하면 기어이 따라가서 내 키와 넌지시 견주어 보는 버릇이 생겼다. 난장이 아니고는 내 키보다 더 작은 이가 있을 리 없지마는 그러나 전연 없는 바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속담화가 되어 있지마는, 진정이지 김부귀(金富貴)와 같은 멋없이 늘씬한 키는 눈곱만큼도 부럽지 않다.
병자호란 때에, 바람 앞에 촛불(風前燈火)과 같은 국운을 두 어깨에 둘러메고 나서서, 용하게도 난국을 돌파하여 나간 회세의 외교가인 오리대신(梧里大臣) 이원익 선생은 두루마기 길이 장(丈) 자 여덟 치였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니, 이 자(尺)는 오늘에 우리가 쓰고 있는 자가 아니라 필시 침척(針尺)이었겠지마는 무던히 작은 키라고 아니할 수 없다. (후략) (주석 1) 


주석 
1> <한 개의 돌이로다>, 156~158쪽, 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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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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