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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 김수경은 정해진, 이희승, 김계숙과 교류했다.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학생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과 함께 공부한 김계숙(金桂淑)은, 훗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1962~1968년)을 지낸다. 사진 왼쪽이 김수경이다.
▲ 1942년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앞에서 이희승과 함께 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 김수경은 정해진, 이희승, 김계숙과 교류했다.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학생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과 함께 공부한 김계숙(金桂淑)은, 훗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1962~1968년)을 지낸다. 사진 왼쪽이 김수경이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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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규정에 따라 2년 임기를 마친 이희승은 다시 학계로 돌아왔다. 1965년 9월 1일, 대구대학교 교수 겸 대학원장에 취임했다. 서울대학교 상대 학장을 지낸 권오익이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이희승을 추천한 것이다.

이희승은 이 자리도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다. 서울과 대구에 두 살림을 차릴 형편도 못될 뿐더러 나이도 어느덧 일흔 살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쌓은 학문적 성과를 묵힐 수 없다는 집요한 설득에 이희승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수요일 오후에 기차로 대구로 내려가서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사흘간 강의를 하고 토요일 오후에 다시 기차로 서울로 올라오는 출장 근무 형태였다.

서울과 대구를 오가는 생활은 1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런 뒤에 그는 성균관대학 대학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권오익이 성균관대학 총장에 취임하면서 이희승을 다시 초빙했기 때문이다. 대구대학교의 출강은 장거리 여행인데 비해 성균관대학교는 동숭동 자택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한결 수월했다.

그가 살던 서대문 집은 6·25 전쟁 때 파괴되어 그동안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관사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집을 잃은 지 24년 만인 1973년에 동숭동 서울대학교 관사를 불하받아서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짓고 살던 터였다.

1968년 7월에는 학술원 부회장(인문과학 담당)에 선출되었다. 1953년에 학술원이 창설될 때부터 이희승은 회원으로 참여했다. 1957년 7월에 학술원 공로상을 받고, 1960년에는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는데, 1968년에 부회장에 선출된 것이다. 학자로서 큰 영광이기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사이에 성균관대학교도 정년제도 만들어져 시행되었다. 일흔 살의 나이로 정년을 맞아 1969년 2월에 퇴직했다. 서울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 맞는 정년퇴임이었다. 정년퇴직은 했으나 서울대학교와 성균관대 대학원에서도 강의를 계속했다. 비록 규정에 따라 퇴직은 했으나 그의 폭넓고 전문적인 지식은 여전히 학생들에게 필요했다.

그의 퇴직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단국대학교 장충식 총장과 김석하, 이승욱 교수였다. 이들의 부탁으로 이희승은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소장에 초빙되었다.

내가 단국대에 간 것은 1971년 1월 동양학연구소가 창설되면서였다. 장충식 총장과 김석하, 이승욱 두 교수가 찾아와서 동양학연구소라는 연구기관을 설립 중인데 소장으로 와 달라고 청했다. 그때 내 나이가 74세로 어디에 있다가도 그만둘 나이인데 어떻게 맡느냐고 사양했는데, 이 사람들이 세 번씩이나 찾아와서 간청을 하는 바람에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사학을 전공한 장 총장은 동양학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남다른 데가 있어서 동양학 연구에 특별한 배려를 해주었다. 나도 기왕 맡은 바에는 전시용이 아닌 정말로 실속 있는 연구를 하는 연구소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연구소의 사업으로 우선 세 가지를 정했다. (주석 1)

이희승은 연구소 사업의 조건으로 '1년에 한 번씩 중·일 학자들도 초청한 정례 학술세미나 개최, 매년 연구논문집 발간, 한·중·일의 주요 사료를 모아 세 나라의 문화 교류에 관한 자료집 발행' 등을 내세웠다. 이 조건들은 모두 수용되었고, 그는 이후 10년 동안 동양학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다.

그런대로 보람을 가지고 일했던 내 최후의 직장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은 처음 장 총장과 약속했던 대로 꼭 10년 만인 1981년에 그만두었다. 단국대학교에서는 동양학연구소의 건물을 일석기념관이라고 이름 붙이고 일석학술상이라는 걸 만들어 개교기념일에 수상하는 등 분에 넘치는 영예를 나에게 베풀었다. (주석 2)

주석
1> <회고록>, 234쪽.
2> 위의 책, 23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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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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