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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조선표준어' 사정위원회 때의 '조선어학회' 기념사진(1.이윤재 2.한징 3.안재홍 4.이숙종 5.이희승)
▲ 1935년 "조선표준어" 사정위원회 때의 "조선어학회" 기념사진(1.이윤재 2.한징 3.안재홍 4.이숙종 5.이희승) 1935년 '조선표준어' 사정위원회 때의 '조선어학회' 기념사진(1.이윤재 2.한징 3.안재홍 4.이숙종 5.이희승)
ⓒ 이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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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에 당한 6.25 전쟁은 50대 중반의 이희승에게도 감내하기 어려운 재난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똑같은 내용의 대통령의 담화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국군이 어디어디에서 괴뢰군을 격퇴시켰다. 서울은 사수할 것이니 서울 시민들은 각자 직장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웃 사람들의 피난채비를 멍청히 '구경'하는 사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피난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위로는 80 고령의 부모님을 모신데다 아래로는 이제 막 백일이 된 맏손녀 옥경이 딸려 있었기 때문이다.(주석 1)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산전·수전·공중전을 겪은 터에 이번에는 '실전'을 당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사수'를 녹음으로 틀어놓고 줄행랑치면서 한강교를 폭파시켜, 피난길도 막혔지만, 가족상황이 피난의 엄두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꼼짝없이 '인공치하'에서 3개월을 지냈다. 어느날 서울대학에서 총장 관사로 모이라는 지시에 따라 나갔더니 북쪽에서 온 청년이 평양행을 지시하자 '치질'을 이유로 간신히 면하고, 그들이 규장각 소장 도서를 가져가고자 포장을 하는 일에 이어서 교과서 만들 프린트물의 철자법 교정에 동원되었다. 학자로서의 가책에 시달렸으나 '포로신세'여서 어찌할 수 없었다.

8월 22일 87살 되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전쟁 중에 당한 일이라 더욱 황망하여 간신히 장례를 치렀다. 국군과 유엔군의 9.28 수복의 와중에 인민군의 소행으로 집이 전소되었다. 간신히 몸만 빠져나오고 가족은 무사했으나 분신과 같았던 책과 각종 자료가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수십 년 동안 모았던 수천 권의 책을 태워버린 것은 아직도 아까워 견딜 수가 없다. 중학 시절부터 호떡 한 개 안 사먹고 사 모은 책들이요.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사 모은 것들이었다. 오늘날 국내외 어느 곳에도 없는 목판본 <내훈언해(內訓諺解)> 4책과 동춘 송준길 선생이 효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내사본(內賜本) <용비어천가> 1권 6책 등 귀중한 책들도 많았기에 학자인 내게는 너무 큰 아픔이 아닐 수 없었다. (주석 2)
순식간에 온가족이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끼니는 커녕 변변한 옷 한 벌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친척의 도움으로 광화문의 서대문 쪽의 뒷골목에 허름한 집 한 채를 빌려서 기거하였다.

단팥죽 장사를 시작했다. 집사람과 며느리가 단팥죽을 만들었고 나는 떡집에 가서 찹쌀떡을 받아왔다. 찹쌀떡은 따로 팔기도 하고 작게 잘라서 새알심 대신 단팥죽에 넣기도 하였다. 10원 어치를 팔면 2원은 남는 장사였다. 제과점에 가서 양과자도 조금씩 받아다 팔았다. 워낙 목이 좋은 곳인데다 세상이 어지러웠던 덕분에 장사는 잘됐다. (주석 3)
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 김수경은 정해진, 이희승, 김계숙과 교류했다.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학생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과 함께 공부한 김계숙(金桂淑)은, 훗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1962~1968년)을 지낸다. 사진 왼쪽이 김수경이다.
▲ 1942년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앞에서 이희승과 함께 도쿄제국대학 유학 시절 김수경은 정해진, 이희승, 김계숙과 교류했다. 이희승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 유학생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도쿄제대에서 김수경과 함께 공부한 김계숙(金桂淑)은, 훗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1962~1968년)을 지낸다. 사진 왼쪽이 김수경이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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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서울대학 교수가 가족과 함께 단팥죽 장사를 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어느 날 문교부에서 불렀다. 

수복 후 어느 날의 일이었다. 문교부로부터 부름을 받은 나는 구 국회의사당에 자리잡고 있던 청사를 찾아간 일이 있다. 그곳에서는 나와는 그런 사이가 아닌 사람이 장관이라고 버티고 앉아 있다가 "이 선생, 그동안 부역했군요"하더니 징계위원회에 회부한다고 했다. 인공치하 3개월 동안, 서울대학교에 강제로 끌려 나가서 교과서를 만들 프린트물의 철자법 교정을 한 것을 '부역'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서울을 끝까지 사수할 것이니 서울 시민은 각자의 직장을 지키라"던 이 대통령의 지시 방송을 충실히 지킨 것이 어째 부역이냐는 못난 생각이 들었으나 아무 항변도 못한 채 3개월 감봉 처분을 받고 말았다. 형편이 좋아 교통편의를 얻어서 살길을 찾아 도망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 피난 못 가고 포로 생활을 하여 고생했던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한심한 작태 들이었다. (주석 4)

전세는 역전이 거듭되었다.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38선을 넘어 남진하였다. 이희승은 가족 논의를 거쳐 단신으로 피난을 결심했다. 이번에도 서울에 잔류했다가는 뒷날 무슨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될 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6.25사변 때 도강을 못하셨던 선생께서 1951년 1월 3일 단신으로 서울을 출발, 보행으로 대구에 도착하신 날이 19일이었으니 당시 60노인께서 겪은 민족수난의 극히 작은 일단면이었다고나 할 것이다. 일제에 의해 겪은 영어생활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족에 대해 저질러진 동족상잔전으로 또 다시 이런 고초를 겪으시다니, 이 6.25로 선생은 충정로에 있던 댁이 잿더미로 화했고 그 통에 무엇보다도 애써 모으셨던 책이나 카드를 모두 잃었으니 당시의 상심, 실의는 얼마나 크셨을까. (주석 5)
천신만고 끝에 부산에 도착하여 우연히 길거리에서 월파 김상용을 만나 그의 소개로 김활란이 경영하는 <코리아 타임스>에서 일거리를 찾았다. 그리고 지인의 안내를 받아 해병에 문관으로 발령을 받고 일하였다. 얼마 후 두고 온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어 해병대 신현준 사령관의 배려로 상경, 가족을 상면하게 되었다. 다음날(1951년 4월 13일) 노모가 운명하고, 조카딸은 중공군의 총에 맞아 죽고 며느리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군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가족을 이끌고 해상을 통해 피난수도 부산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1952년 3월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이 해체되고 서울대학이 문을 열게 되면서 이희승은 해병대 문관을 사직하고 교수로 되돌아왔다. 문리대에 나가면서 이웃의 부산대와 이화여대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하나같이 교사는 지붕의 천막이요 벽은 널빤지로 막은 판잣집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정부가 환도하자 서울대학교도 서울로 돌아왔다. 이희승도 가족과 함께 힘든 피난생활을 마치고 환도하였다. 


주석
1> <회고록>, 172쪽.
2> 앞의 책, 178~179쪽.
3> 앞의 책, 180쪽.
4> 앞의 책, 182~183쪽.
5> 남광우, <일석 이희승선생의 평생을 조명한다>, <딸깍발이 선비> 3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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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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