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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 10인의 묘. 위쪽 왼편부터 신현모(신윤국)(독립유공자1-173), 한징(독립유공자1-397), 이윤재(독립유공자1-1-499), 이석린(독립유공자2-0775), 이강래(독립유공자2-0926), 서민호(독립유공자3-093), 정인승(독립유공자3-359), 최현배(독립유공자4-144), 이인(독립유공자4-566), 김양수(독립유공자7-147).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 10인의 묘. 위쪽 왼편부터 신현모(신윤국)(독립유공자1-173), 한징(독립유공자1-397), 이윤재(독립유공자1-1-499), 이석린(독립유공자2-0775), 이강래(독립유공자2-0926), 서민호(독립유공자3-093), 정인승(독립유공자3-359), 최현배(독립유공자4-144), 이인(독립유공자4-566), 김양수(독립유공자7-147).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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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검·경의 가혹한 고문은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 모두에게 자행되었다. 같이 구속되었던 한글학자 최현배의 증언이다.

나는 삼십여 명의 동지들과 한 일 년 동안 홍원경찰서에서 비행기를 타고 기절하였고, 물을 먹고서 까물어졌으며, 목총으로 머리를 난타맞아 유혈이 낭자하였고, 곤장을 맞아 등과 궁둥이가 터졌으며, 발길로 종아리를 채여서 워낙 상하였기 때문에 40도의 신열이 나고 앓았으며, 쇠꼬챙이로 전신을 쑤시이고 손바닥으로 뺨을 맞기는 항다반의 일이었다.

이러한 달초에 짝하여 갖은 모욕과 천대를 받았다. 이것이 나 하나만의 겪음이 아니라 삼십여 동지들이 똑같이 겪는 바이며, 그 밖에 우리들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불려와서 모욕과 박해를 당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 이것이 일제 최후의 발악으로서 우리 겨레에게 영구 불멸의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주석 1)

다시 이희승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들은 이렇게 혹독한 고문으로 이른바 자백이라는 것을 얻어냈지만 여러 사람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아 그 말을 맞추기 위해 또 고문을 했다. 당하다 당하다 우리가 지고 말았다. 재판도 받아보기 전에 유치장에서 개죽음을 당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에 검찰에 송국되어 부인하고 경찰서에서는 저들의 요구대로 모두 시인하기로 합의했다. 우선은 살고 보아야 할 노릇이었다.

그들은 어휘 카드에서 '태극기는 대한제국의 국기', '창덕궁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궁궐'이라 주석한 것을 내놓고 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고, 심지어 '서울'에 대한 주석이 '토오쿄오'보다 길고 자세하다고 트집을 잡기도 했다. 

그들의 요구대로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서였다"고 시인하면 "그것은 곧 조선 독립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면 '반국가적'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3단 논법인데, 예정된 결론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유도신문이었던 것이다. (주석 2)

이희승 등 한글학회 회원 33인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1년 동안 고문을 당하면서 문초를 받다가 함흥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중 일부는 기소유예로 석방되고 나머지 16명은 기소되어, 예심으로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르는 도중에 이윤재·한징 두 분이 옥사하였다.

살아남은 14명 중 2명은 면소되어 나가고 이희승 등 12명은 1944년 12월 살을 에는 함흥형무소에서 9차례나 공판을 받았다. 1945년 1월 16일에 2년 내지 6년의 선고를 받은 사람이 13명, 무죄가 1명이었다. 이희승은 3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유죄선고를 받은 이 중에서도 일부는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이희승·최현배·정인승 등 4명은 일본인 판사의 복종 권유를 뿌리치고 끝내 불복을 선언, 서울 고등법원에 상고를 하였다. 그리고 해방 이틀 전인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기각 판결을 받았다.

우리 네 사람은 상고를 하여 놓고, 반년이 넘도록 감방에서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었다. 처음에는 상고 재판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가기를 기다렸지마는, 지리한 감방에도 세월은 흘러감에 따라 바깥 세상의 형편의 변해 감을 기미채게 되었다.

간간이 감방 안에서 공습 경보로 불을 끄고서 캄캄한 밤을 세우기도 하다가, 5월 어느 날에는 독일의 무조건 항복의 소식을 새어듣게 되었다. 그날따라 나를 제 방으로 불러다가 조선의 고래의 사회상의 설명을 들어 가면서 적던 감옥 교무과장 이시우라(石浦)가 아무 예고없이 그 호출을 중단함을 본 나는 무슨 긴박한 상태가 바깥에서 벌어져 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우리의 기다림의 애타는 심정은 독일의 뒤를 잇는 일본의 항복에만 쏠리었다.

언제나 올 것인가? 언제나 올 것인가? 가슴 깊이 자나깨나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주석 3)
이희승 등에게 일제가 붙인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조선민족 독립운동이었다. 검찰의 기소이유서에서 드러난다. 

소위 어문운동은 민족 운동의 한 형태로서 민족 고유의 언문의 정리, 통일 보급함으로써 민족 고유 문화의 쇠퇴를 방지할 뿐 아니라 그 향상 발전을 가져오고, 문화의 향상은 민족 자체에 강한 반성적 의식을 가지게 하고, 강렬한 민족 의식을 배양함으로써 민족에게 독립 의욕을 일으키어, 정치적 독립 달성의 실력을 양성함에 그 목적이 있다. (주석 4) 


주석
1> 최현배, <나의 걸어온 학문의 길>, <나라사랑> 제10집, 173쪽, 외솔회, 1973.
2> <회고록>, 144쪽.
3> 최현배, <자유>, 1963년 제8호.
4>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조선어학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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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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