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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강제병합 10주년을 맞이한 이 날 기사에는 일제 당국이 사용했던 ‘병합’이라는 용어대신, ‘합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 <동아일보> 1920년 8월 29일자 기사. 한일강제병합 10주년을 맞이한 이 날 기사에는 일제 당국이 사용했던 ‘병합’이라는 용어대신, ‘합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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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성장하는 1900년대 초 조선사회는 일종의 과도기였다.

신식학교가 세워지는가 하면 구식서당도 많았다. 단발령이 시행되었으나 여전히 장발이 이어지고 조혼풍습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결혼 뒤에 머리를 깎았다. 

이희승은 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한 지 1개월 만에 13살의 나이로 결혼을 하였다. 집안 어른들이 정해놓은 이승욱의 딸 이정옥(李貞玉)과 결혼한 것이다. 결혼식이 올릴 때까지 얼굴도 보지 못한 여성과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다. 이같은 연유로 당시 이른바 신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역시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과 눈이 맞아 본처를 버리고 재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 이희승의 가까운 친구들 중에도 적지 않았다. 그는 부인이 1987년 12월 향년 93살로 운명할 때까지 '백년해로'를 하였다. 

그가 다니던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 1학년은 2개 반으로 학생수가 100명이 넘었다. 같은 반에 뒷날 독립운동과 야당지도자가 된 해공 신익희와 박정희 3선 개헌을 끝까지 반대한 공화당 당의장을 지낸 정구영 그리고 윤비(尹妃)의 남동생 윤동섭과 사촌동생 윤정섭 등이 있었다. 이때 만난 신익희와는 서로 가는 길은 달라도 평생 가깝게 지냈다. 1956년 5월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가 유세길에 뇌일혈로 급서하자 애끓는 추도사는 장례식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신익희 군은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성품으로 동료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한 고향(경기도 광주) 친구 이윤신의 집에 기숙했던 그는 늘 검정 물을 들인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15세 소년 시절에도 매우 젊잖이 조숙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담화회 때에 특히 명성을 떨쳤다. (주석 1) 

이희승이 이 학교에서 이능화(李能和) 선생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조선해어화사>, <조선불교통사>, <조선여속고>등의 저술가로서, 그에게서 역사의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희승의 학교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일제가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졸업 시기를 앞당겼다. 원래 1911년 3월에 졸업예정이 1910년 10월 16일로 당겨진 것이다.

"국치를 당한 것은 외국어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나이 15세였던 나는 비분강개하는 어른들을 보고야 나라를 잃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지만 철이든 학생들은 '나라를 잃었는데 공부하면 뭣하나' 하여 학교를 자퇴하는 일이 많았다." (주석 2) 

이희승은 학생생활을 하는 시기 조혼으로 꼬마신랑이란 놀림의 대상이 되었으니 괘념하지 않았다. 키가 작고 연약했지만 포부가 크고 당당하였다. 그는 뒷날 <오척 단구(五尺短軀)>라는 수필을 썼다. 

"네 키가 작다 하니 대체 몇 자 몇치나 되느냐."고 물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대답하여 두겠다. 

대학예과에 입학을 할 무렵에 잠방이 하나만 입고 양말까지 벗어 버리고 재어 보니 꼭 '5척 0촌 2분'이었다. 어쨌던 5척 이상이니까 군인이 되는 데 키로서는 우선 합격권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의기양양할 것은 없어도 또한 자포자기할 필요가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체소하기 때문에 관심은 키 큰 사람에게보다 키 작은 사람에게 더 많이 간다. 어떤 기회에 혹은 거리를 다니다가 키 작은 사람을 발견하면 기어이 따라가서 내 키와 넌지시 견주어 보는 버릇이 생겼다. 난장이 아니고는 내 키보다 더 작은 이가 있을 리 없지만 그러나 전연 없는 바는 아니다. (주석 3)

나라가 망했지만 그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정구영 등 동료들과 경신고보 2학년에 편입했다.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3학년 1학기가 끝날 즈음 학우 6, 7명과 집단자퇴로 차별에 맞섰다. 이후 아버지의 소개로 양정의숙 법률과에 입학했으나 1913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조선교육령에 따라 이 학교가 고보(高普)로 격하 개편되자 그만두었다. 전문학교에 다니던 처지에 고보 1학년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술국치로 벼슬에서 물러난 아버지는 이희승이 18살 되는 해 고향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생활근거를 잃었고 아들은 배움의 터를 잃었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로 전락하고 아들은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왜소한 그는 농사 짓는 일이 힘에 겨웠다. 

그러던 차에 일가 중 휘문의숙에 다니는 이한룡의 교과서를 빌려보게 되었다. 이희승이 일생의 화두를 찾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책은 주시경 선생이 지은 <국어문법>이었다. 

처음 호기심에서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이런 학문도 있었구나" 하는 경이를 맛보았다. 재독, 삼독을 하고 5, 6회를 거듭 읽는 동안 "나도 국어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내 인생의 길은 이렇게 시작이 됐으니 참으로 기연이라 할 것이다. (주석 4)

나라와 학업의 길을 모두 잃고 (빼앗기고) 방황하는 청년에게 '국어공부'의 화두를 제시한 주시경은 누구인가.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순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의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협성회를 창립하여 <협성회보>를 발간하고 조선문동식회(朝鮮文同式會)를 결성, 한글기사체의 통일과 연구에 힘쓰는 한편, 경향 각지의 여러 학교와 강습소를 다니며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였다.

나라가 기울던 1905년 국어연구와 사전편찬에 관한 건의를 정부에 제출하고, 1907년 정부내의 학부(學部)의 국어연구소 위원으로 들어가, 나라가 망해도 국어만은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하였다. 국치의 해인 1910년 <국어문법>을 지었고, 최남선이 창설한 광문회에서 간행되는 국어관계 서적의 교정과 <말모이(국어사전)>의 편찬 책임을 맡았다.

한말과 일제강점 초기에 한글연구와 우리글 지키기에 온 힘을 쏟고 최현배·김두봉·권덕규·염상섭·변영태·현상윤·신명균·이규영·장지영·이병기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키워, 해방 후 남북에서 한글운동의 선두주자로 만들었다. 

1914년 국내의 독립운동 동지들이 수감되자 해외 망명을 준비하던 중 급환으로 38살에 별세하였다. 누구일까요?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이다. 어느 독립운동가 못지않는 애국자이고 '한글'이란 이름을 창안한, 세종대왕의 후계자라 하겠다. (주석 5)


주석
1> 앞의 책, 35쪽.
2> 앞의 책, 42쪽.
3> 이희승, <한 개의 풀이로다>, 58쪽, 휘문출판사, 1978.
4> <회고록>, 49쪽,
5> 김삼웅, <한글운동의 선구자 주시경평전>, 16쪽, 꽃자리, 202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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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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