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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경북 예천군에 자리한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의 묘
 경북 예천군에 자리한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의 묘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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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파동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6월의 피난수도 부산은 전란기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장기집권욕은 법과 질서보다 조작된 민의와 폭력에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권력을 연장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국회의원이 탄 버스가 헌병대로 끌려가는가 하면, 자신을 저격하려는 군인을 정당방위로 사살한 서민호 의원이 국회의 석방결의로 석방되었는데도 이에 항의하는 관제데모가 계속되고, 재야원로 60여 명이 호헌국국선언문을 발표하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여러 사람이 테러를 당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시국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거행된 6·25기념식전에서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하여 정계는 한층 더 심상치 않은 먹구름에 덮이게 되었다. 이날 유시태(당시 62살)는 민국당 출신 김시현 의원의 양복을 빌려입고 김의원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유유히 기념행사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하여 한참 기념사를 읽는데 2m쯤 떨어진 뒤에서 독일제 모젤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의열단 출신인 유시태는 방아쇠를 잡아당겼으나 탄환이 나가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격발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거듭 방아쇠를 잡아당겼으나 탄환은 여전히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섰던 경호헌병이 권총을 든 유시태의 팔을 탁 치고, 동시에 뒤에서는 치안국장 윤우경이 유시태를 끌어앉혔다.

대통령 암살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유시태는 헌병대로 끌려갔다가 곧 육군특무대로 이송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유시태에 이어 연루자로서 그에게 권총과 양복을 제공한 혐의로 김시현 의원이 체포되고, 뒤이어 민국당의 백남훈·서상일·정용한·노기용 의원과 인천형무소장 최양옥, 서울고법원장 김익진, 안동약국 주인 김성규 등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민국당의 고위층으로까지 수사를 확대할 기미를 보였으나 뚜렷한 혐의사실이 드러나지 않자 더 이상 확대하지는 않았다. 국가원수 살인미수혐의로 구속기소되어 선고공판에서 유시태·김시현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김성규·서상일·백남훈 의원에게는 징역7년, 6년, 3년, 최양옥·김익진·노기용에게는 무죄가 각각 선고되었다.

그후 53년 4월 6일 대구고등법원에서 열린 제2심에서 유시태·김시현에게 사형, 서상일ㆍ백남훈에게는 징역 6개월, 1년 집행유예가 선고되고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두 사람은 대법원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복역하던 중 4·19혁명을 맞아 과도정부에서 국사범 제1호로 출감했다.
독립운동가 권애라 김시현 부부
 독립운동가 권애라 김시현 부부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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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암살미수의 배후 김시현(1883~1966)은 경북 안동군 풍산면에서 태어났다. 중교의술(중학과정)을 졸업하고 한때 장사를 하다가 29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 1917년 귀국했다.

1919년 3.1혁명 당시 고향에서 시위에 앞장섰다가 상주 헌병대에 수감되고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 김좌진 등과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재무부 책임을 맡았다.

동향의 김원봉 등이 1919년 11월 중국 지린성에서 조선의열단 창단 소식을 듣고 달려가 합류했다. 이후 그는 의열단의 각종 의열투쟁을 위한 자금조달·무기구입·폭탄제조 등을 지휘하고, 직접 현장에 나서기도 하였다. 1923년 3월 그는 남정각·유석현 등과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동원해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사건(1920), 오성륜·김익상의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저격사건(1922), 김지섭의 도쿄 이중교 폭파사건(1924) 등 의열단원들의 숱한 테러사건의 배후에는 언제나 김시현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삶은 투옥 - 석방 - 투옥의 연속이었다. 김시현의 체포·투옥경력을 중요한 것만 간추려 보아도 1919년 상주헌병대 체포 및 탈주, 1920년 체포 대구형무소 1년 복역, 1923년 체포, 안동 -대구형무소 등 10년 복역, 1933년 베이징에서 체포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 5년 복역, 1943년 체포 베이징 일본영사관 구치감·경성헌병대 1년 복역, 1944년 체포 경성헌병대에서 1945년 8월 15일 출감 등 파란만장하다.(김종구, <김시현>)

일제타도를 위해 청춘을 바친 그는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환동포 구원사업을 위한 '고려동지회'를 조직하고, 민족자주연맹과 좌우합작위원회 등에 참여했다. 1950년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 안동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민주국민당 후보였다.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이승만의 폭정으로 나라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수하들에 의해 김구가 암살되고 반민특위가 해체되었으며, 곧 발발한 6.25전쟁으로 강토는 시산열해를 이루었다. 피난수도 부산에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파동이 진행되고 민주주의와 민생이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미서훈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
 미서훈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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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현의 심중에 의열의 피가 끓었다. 이승만 제거를 작심했다. 의열단 동지였던 유시태가 행동대로 나섰다. 생명을 걸고 일제와 싸울 때 나라를 되찾으면 모두가 잘 사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자는 꿈이었는데, 이승만에 의해 독립투사들은 암살되고 나라는 갈라져 전란 중이고, 이승만은 오로지 권력연행에만 완강하고 있어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했다. 오래된 권총이 불발한 것이다.

그는 유시태와 함께 이승만 암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지들에게 누를 끼칠까 보아 민국당을 탈당하여 애먼 사람들이 화를 입지 않도록 배려를 잊지 않았다.

김시현과 유시태는 4월혁명 후 석방되면서 "그때 권총알이 나가기만 하였으면 이번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한이다"라고 목메이는 출감소감을 밝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김시현은 무려 18년 7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치열한 독립운동가인데도 이 사건을 이유로 아직도 국가의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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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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