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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만의 존재 특이성으로 영어로 번역할 때 우리말의 소리 나는 그대로인 'Chaebol'로 적는다고 한다. 그런데 금융 자본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금융의 재벌화'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금융은 자본주의 발달 초기에는 산업 부문에 자금을 공급하는 보조적 위치에 있었던 반면, 점차 자본이 집적되고 그 역할이 커지는 금융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자본주의의 중심적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금융업이 다른 산업에 비해 위험은 작고 수익이 커 자본의 축적이 쉬웠던 점과 자금이 항상 부족했던 산업화 시기에 자금의 공급자로서 우위의 위치에 있었던 사실이 그 배경이 된다.

우리나라만의 특징도 있다. 초기 국가주도 산업화 시대에는 금융업이 정부의 정책 의지에 종속되었으나, 민주화 시기를 거치며 금융자유화가 진행되었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금융업의 과점화가 이루어지고, 2001년 금융지주회사 제도가 도입된 이래 은행 등이 지주회사로 전환되면서 2023년 6월말 현재 국내 10개 금융지주회사의 연결총자산(3478조 원)이 금융권 총자산의 51.4%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대형화되었다. 재벌이 참여한 제2금융권도 규모가 커졌다.

또한 정부에서 금융을 별도의 산업 부문과 같이 인식해 금융업의 외형과 수익을 키우기 위한 정책에 우호적인 것도 금융회사가 대형화되는 데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

이렇게 금융이 힘을 갖게 된 상황에서 금융의 공정성을 들여다보려면 금융시장 참여자의 행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금융업이 대형화되고 이익 규모가 커지면서 금융이 다른 경제주체들에 권력적 우위관계를 갖고 기득권 세력화하는 '금융의 권력화'를 생각할 수 있다. 금융지주회사는 주주, 이사회의 견제가 미약해 지주회장 등 경영진에게 권력이 모이는 권력의 개인화, 집중화 현상까지 생겨나기도 한다. 제2금융권의 대형 금융회사도 규모를 앞세워 시장지배력을 갖고 권력화가 이루어지기 쉽다.

금융업은 권력과 이익유지를 위해 더욱 단기수익 창출에 몰두한다. 금융지주, 대형 금융회사는 매년 최고수익 기록을 경신하고, 직원에게는 높은 성과급, 퇴직금을 지급하고 있다. 금융자유화의 물결 속에서 금융상품 규제는 약화되고 금융소비자는 과도한 부채속에 높은 금융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또한 시장 주체들간에 서로 연결되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정치화'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과거에는 금융업이 정부가 지분을 가진 금융회사, 공공기관의 인사와 관련해서 정부와 정치권에 연결하려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치권, 언론, 법조계와의 연대 구조를 공고히 해 시장에 자기 목소리를 관철하고 있다.

과거 정부주도 경제발전 시기에는 관치금융의 폐해를 걱정했다면 이제는 금융이 권력화, 정치화되어 시장이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부작용에 대해 우려하게 된다. 금융업이 본연의 역할을 통한 사회 발전에 기여 하는 게 아니라 금융위기, 사고를 일으키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의 권력화, 정치화로 시장이 왜곡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우려 사항은
 

첫째, 금융업계가 자본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무게를 갖게 되어 '게임의 규칙'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결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공정하지 못한 이익을 취할 여지가 생긴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더한데, 로비가 합법화된 미국에서는 연방정부, 주정부에 등록된 로비스트가 수만명에 달하며, 로비 활동비로만 수조 원 이상의 돈이 쓰인다. 막대한 금력으로 세상의 룰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꿔 가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에서 월가를 개혁하기 위한 도드-프랭크법 실시 등 여러 조치가 있었으나, 근본적인 개혁은 미흡했다. 이는 오바마 행정부의 금융위기에 대한 문제인식이 철저하지 못한 면도 있었으나, 월가의 막대한 금력에 의한 정치권 로비 등 저항의 힘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 힘은 더욱 커지고 집요해지고 있다. 그에 반해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영향력을 갖기 힘든 금융소비자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추상적이다.
 
2012년 5월 1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메이데이 기념 행사가 열린 가운데, 브라이언트 파크에서부터 유니온스퀘어까지 행진을 하고 있는 월가 점거 시위대.
 2012년 5월 1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메이데이 기념 행사가 열린 가운데, 브라이언트 파크에서부터 유니온스퀘어까지 행진을 하고 있는 월가 점거 시위대.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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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을 지냈던 아서 래빗(Arthur Levitt)은 저서 <월스트리트를 장악하라(Take on the street)>에서 "현대사회에서 금융이 가진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금융업계가 이제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될 때는 법규정을 움직일 능력까지 갖게 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우리나라는 로비가 합법화되어 있지 않고, 금융업이 시장의 규칙에 미치는 영향이 미국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금융업계가 자기 이익유지를 위해 대응하는 힘은 점차 커지고 치밀해지고 있다.

두 번째 우려 사항은 금융업의 끝없는 이익 추구와 경영진의 권력 유지를 위해 거래 상대방인 금융소비자들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 닷컴 버블까지의 금융사고는 대중의 '비이성적 과열'이 작은 충격에 붕괴되어 피해를 일으켰다면, 21세기에 들어서는 힘을 갖게 된 금융회사가 계약 상대방인 소비자로부터 과도한 이익을 취하려고 해 발생된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서는 2007년 은행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고 계약조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무분별한 주택담보대출을 해주다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영국에서는 2005년에서 2010년까지 지급보증보험(PPI, Payment Protection Insurance)을 수수료 수입 목적으로 대량으로 불완전판매한 사고가 외국의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우리나라는 2019년 부실사모펀드 사태가 여러 문제가 집결된 소비자 피해의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이는 투자지식과 경험을 가진 전문투자자가 가입해야 할 성격의 사모펀드를 일정 금액 이상의 투자자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규제가 완화된 상태에서, 금융회사가 수익 극대화를 위해 파생결합펀드 같은 고위험의 투자상품을 일반상품과 같이 판매해 소비자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힌 것이다.
 
2020년 3월 26일 시민사회단체 금융정의연대와 신한 라임·헤리티지 펀드 피해자 연합은 서울 중구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연임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2020년 3월 26일 시민사회단체 금융정의연대와 신한 라임·헤리티지 펀드 피해자 연합은 서울 중구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연임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 조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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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사태 이후 관련 금융회사는 피해자에 대한 구제, 회사의 내부통제 정비 등의 조치에 집중하기보다는 경영진에 대한 중징계를 모면하는 데 더 신경을 쓰는 듯한 행태를 보였다. 이들은 법률회사 및 언론에 거액의 법률비용, 광고홍보비를 들여가며 감독당국의 책임 추궁을 피하려고만 해 수년간에 걸친 법률 공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벌 회장이 소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듯이 대형 금융회사 경영진은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만 행사하였다. 이익만 취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행동이 공정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금융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사회 모두가 저마다의 이익 추구에 몰두하는 역사의 흐름에서 이익 및 권력 추구에 관성이 생긴 금융을 제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금융이 제역할을 하고 지속가능하려면 우리는 금융의 권력화, 정치화에 대한 문제인식을 명확하게 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먼저 금융회사 스스로의 자기 절제와 혁신이 필요하다. 금융업계는 자신의 단기수익 창출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시장 전체에는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금융업자로서 단순히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의 공공성, 금융업의 신뢰를 생각해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 권한과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지배구조의 개선이 절실하다. 주주를 대신해 대리인인 경영진을 감독하고 감시하는 이사회의 구성 및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경영진의 책임경영을 이끌 수 있는 '규칙'을 제대로 만들어 경영진영에 대한 평가, 보상 및 책임을 엄정하게 집행해야 하겠다. 또한 단순 준법감시 차원이 아닌 조직 내 건전 경영 시스템과 조직문화를 개선하려는 진정한 내부통제가 이루어지도록 최고 경영진부터의 노력이 필요하다.

금융회사의 자기 절제와 스스로의 개혁이 부진하다면 금융권력은 마땅히 제어되어야 한다. 우선 금융감독당국은 금융시장의 공정 거래질서 확립을 위한 '공정한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금융회사 본연의 역할 수행에 대해서는 제도개선 등으로 적극 지원해야 하지만, 금융시장 참가자의 도덕적 해이 및 이로 인한 소비자의 피해에 대해서는 경영진에게 권한에 맞는 책임을 묻는 등 엄정 대처해야 한다. 아울러 모든 정책집행 과정을 투명하게 해 관치금융의 우려를 불식시켜야 함은 물론이다.

공정한 금융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감독당국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권출범 초기와 같이 정부의 영향력이 클 때에는 금융회사는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종전의 관성으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 언론, 시민단체, 금융 자율규제 기관 등 시장 참여자의 견제와 균형이 함께 중요하다. 시민 사회세력의 연대와 긴밀한 협력이 더없이 요구되는 현실이다.

태그:#금융의권력화, #금융의정치화, #금융의재벌화, #금융권력의제어, #금융정치의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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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에서 30 여년을 근무하고 부원장보를 마지막으로 퇴직했습니다. 건전하고 공정한 금융질서 확립과 금융소비자보호라는 조직의 존재이유와 내 본성, 가치추구와의 어울림이 커 업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올바른 금융시장을 위한 고민을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이 글이 금융업의 공정성제고를 위한 생산적 논의의 장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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