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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고구마를 캐기 위해 비닐을 걷고 있다. 옆에는 고구마 캘 삽도 놓여 있다.
 필자가 고구마를 캐기 위해 비닐을 걷고 있다. 옆에는 고구마 캘 삽도 놓여 있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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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그동안 텃밭에서 정성들여 키운 고구마를 캤다. 고구마를 캐는 것은 어제가 처음은 아니다. 추석 이전부터 조금씩 캐 먹기 시작해서 벌써 몇 번 캐 먹었다. 고구마는 수확 기간이 다른 뿌리 작물에 비해서 상당히 길게 이어진다. 나의 경우에는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한 달여에 걸쳐 수확한다. 조금씩 캐다가 10월 이맘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캔다.
 
수확한 고구마의 일부와 반찬거리로 딴 고구마 줄기이다.
 수확한 고구마의 일부와 반찬거리로 딴 고구마 줄기이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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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작물을 캘 때는 언제나 그렇듯 땅속에 숨어있는 작물이 어떤 모양으로 얼마나 많이 들어 있을까 하는 기대와 설렘이 있다. 예상보다 풍성한 모습을 드러내면 농부로서의 희열이 온몸으로 퍼진다. 예상보다 못하면 실망스럽지만 뭔가 노력이 부족했거나 원인이 있겠지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텃밭이라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삽이나 호미로 캐다가 보면 고구마를 찍어서 허옇게 상처를 내거나 두 동강을 내는 수도 있다. 자식이 다친 것처럼 마음이 상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심스럽게 삽질을 계속한다. 옆에서는 아내가 반찬거리로 쓸 고구마 줄기를 따고 있다.
 
옆 밭의 어르신 부부가 울타리 너머로 넘겨준 고구마 줄기를 따고 계신다.
 옆 밭의 어르신 부부가 울타리 너머로 넘겨준 고구마 줄기를 따고 계신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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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우리 밭에는 올해도 고구마 작황이 괜찮은 편이다. 옆 밭의 어르신 부부는 산짐승이 내려와 해치는 바람에 고구마가 거의 없다며 언짢아하셨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아내와 함께 캐놓은 고구마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 비닐봉지에 담아서 옆 밭의 어르신에게 건네드렸다. 고구마 줄기도 따서 반찬하시라고 고구마 덩굴을 한아름 울타리 너머로 넘겨드렸다.

금세 표정이 밝아지시며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곧이어 생각지도 않은 머루포도 두 송이를 괜찮다는데도 기이어 먹으라고 주신다. 마음이 훈훈해진다. 이런 게 이웃 간에 오가는 정이랄까. 

고구마 수확철이 되면 예전 어린 시절의 추억도 떠오른다. 아버지는 해마다 이른 봄에 밭 한쪽에 '무강(경남 남해 방언, 씨앗으로 쓰는 고구마)'을 심으셨다. 그 씨앗 고구마 '무강'에서 순이 돋아서 자라면 우리 가족은 그 순을 잘라서 본밭의 두둑에 심었다.

본밭의 고구마순이 자라서 무성해지면 그때부터는 어머니가 고구마 줄기나 순을 잘라서 무침, 찌개 같은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고구마 줄기는 삶아서 말렸다가 겨울에도 요긴한 반찬거리로 쓴다. 정월 대보름 때 어머니가 무침 요리를 해 주시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는데... 어머니의 손맛이 그립다.

가을 수확 때는 아버지가 먼저 밭에 펼쳐져 있는 고구마 덩굴을 낫으로 걷어서 가장자리로 끌어내신다. 나도 옆에서 거들어 드린다. 고구마 덩굴은 말려서 밭 한쪽에 쌓아놨다가 겨울 내내 소의 여물로 쓴다. 덩굴을 다 걷은 다음, 우리집 일꾼이던 소가 맨 앞에서 쟁기를 끌면 아버지는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면서 고구마 두둑을 갈아엎으신다.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 뒤를 따르면서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는 고구마를 주워내기 바쁘다. 그렇게 주워내어 온 밭에 흩어져 있는 고구마를 한데 모아서 '빼때기(날 고구마를 납작하게 썰어 말린 것)'를 만든다.

경남 남해에서는 절간고구마를 '빼때기'라 부른다. 어머니와 나는 번갈아 가면서 고구마 써는 기계를 손으로 돌리고, 아버지는 기계에서 잘려 나오는 고구마를 온 밭에 널으신다. 널어놓은 것들이 말라서 빼때기가 되면 그것을 다시 한데 주워 모아서 마대에 넣어 한꺼번에 마을 골목에 내놓는다. 집집마다 팔기 위해 내놓은 빼때기 마대가 골목길을 따라 길게 줄을 선다.

농협에서 판정관이 나와 금속막대기 같은 것으로 마대를 일일이 찔러보고 등급을 매긴다. 등급에 따라서 가격 차이가 난다. 잘 마르고 상태가 좋으면 상위 등급을 받는다. 최고 등급, 1등급을 받으면 그날은 아버지께서 거나하게 막걸리 한잔 하시는 날이다. 고구마 농사하는 마을 사람들이 너나없이 어울려 기분을 내는 날이기도 하다.

밭에서 빼때기를 하고 상태가 좋은 고구마는 골라놨다가 지게에 짊어지고 집으로 가져온다. 그 중 일부는 어머니가 손수 칼로 썰고 말려서 우리 가족이 먹을 빼때기를 만든다. 그렇게 어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빼때기는 간식으로도 먹고, 겨울철에 한 번씩 만들어 먹는 '빼때기죽'은 그 시절의 별미다.

집으로 가져온 대부분의 고구마는 큰방 한쪽에 설치된 고구마 저장소인 통가리에 가득 채운다. 그 고구마는 겨울 내내 이른 봄까지 주식으로 먹는다. 또 일부는 남겨서 봄에 다시 씨앗 고구마 '무강'으로 활용한다.
 
수확한 고구마의 일부로 적당한 크기에 빛깔도 좋아 보인다.
 수확한 고구마의 일부로 적당한 크기에 빛깔도 좋아 보인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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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는 보물 같은 작물이다. 예전 어려운 시기에는 사람은 물론 농촌의 든든한 살림 밑천인 소까지 먹여 살렸다. 특히 겨울철에는 고구마 없이는 살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전의 고구마는 잎부터 뿌리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작물이었다. 잎과 줄기는 반찬으로, 뿌리는 삶아먹고 구워먹는 주식으로, 사람이 먹고 남는 나머지는 몽땅 소가 먹었다.

지금도 고구마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물이다. 나는 다른 작물에 비해 유독 고구마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우선 재배하기가 편하다. 거름을 많이 주지 않고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잘 자라며, 고구마 덩굴이 무성한 밭에는 잡초도 거의 없다. 추억 어린 고구마 밭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또한 고구마는 나눠먹기 편하고 보관하기도 편하다. 수확철에는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서 수확의 기쁨과 오랜 정을 나눈다. 고구마만큼은 누구보다 잘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자부심 같은 게 있다. 내가 농사를 그만두는 날까지 고구마는 우리 텃밭에서 나와 함께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실릴 수도 있습니다.


태그:#고구마, #고구마 수확, #텃밭 고구마, #빼때기, #빼때기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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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삶과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가끔 글로 표현합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살맛나는 따뜻한 세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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