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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찬씨 광주를 지킨 이유로 주먹밥을 해 주며 등을 토닥여준 아주머니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살아 생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았다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김태찬씨 광주를 지킨 이유로 주먹밥을 해 주며 등을 토닥여준 아주머니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살아 생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았다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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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총을 쥐고 광주를 지킨 것은 어찌 보면 주먹밥을 해 주며 등을 토닥여 준 아주머니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살아생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았어요."
  
2021년, 나는 <윤상원 일기>를 작업하고 있었다. 그 무렵 어느 선배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어이, 광우. 항쟁으로 유명을 달리한 무명용사들, 총을 들고 싸운 항쟁의 주역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소." 선배의 낮은 음성에 실린 조언은 나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죽비였다.
   
당초 <윤상원 평전>을 쓸 계획이었는데 선배의 조언 한마디에 나는 <윤상원 평전> 대신 <오월 무명용사의 평전>을 쓰기로 방향을 틀었다. 망월동에 누워 있는 상원 형도 '오월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영령들과 항쟁의 용사들을 제일 먼저 모셔야지'라며 나의 선택을 환영할 것 같았다.

광주에 살면서도 나는 정작 항쟁을 이끈 주역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풀빛출판사에서 간행한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집>을 뒤늦게 발견한 후 500여 분의 피맺힌 이야기, 10권 분량의 방대한 기록을 밤을 새워 읽었다. 이 소중한 구술을 이제야 만나는 것인지 한탄스러웠다. 

주인공들의 이름을 익히기 위해, 주인공들의 성격을 알기 위해 2년 동안 사료집을 뒤지고 뒤졌다. 뒤지다 보니 주역들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꼭 만나고 싶은 분이 있었다.

쇠망치를 만들어 거리에 나섰다는 용접공 김여수, 총알이 먹고 있는 김밥을 스치고 지나갔다는 식당 종업원 김현채, 피 흘리는 중학생의 수술을 거부한 의사에게 총을 들이대며 수술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구두닦이 박래풍, '공수부대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라며 빛고을의 의기를 선동했다는 무용강사 전옥주, 기동타격대 7조 조장, '서방의 주먹'이었다는 김태찬 등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김여수는 1995년에, 김현채는 2009년에, 박래풍은 2018년에, 전옥주는 2021년 영면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딱 한 분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살아 있는 자의 증언
 
5.18 피해자 김태찬씨
 5.18 피해자 김태찬씨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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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찬. 그의 과거를 뭐라고 표현할까? 주먹이냐, 건달이냐. 회고록에서 본 그대로 그는 영민했고 위협적일 정도로 당당했다. 9월 4일 오후 4시, 오월 기록관에서 만난 그의 입에선 솔직한 이야기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4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40년 후에 구술하다 보면 진실성이 떨어집니다. 기억의 착오도 많고, 남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인 양 회고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가 있을까요?

망월동 묘역에는 풀이 없는 두 곳이 있습니다. 아시죠? 윤상원과 박관현의 묘역입니다. 나는 항쟁 기간 윤상원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자신의 부재를 합리화하고 면죄부를 받기 위해 윤상원을 영웅화한 것이 아닐까요? 

학생운동 출신자들, 지식인들의 사고는 저와 같은 이들의 사고와 달랐습니다. 우리가 총을 쥐고 광주를 지킨 것은, 어찌 보면 주먹밥을 해 주며 등을 토닥여 준 아주머니들 때문입니다. 살아생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았습니다.

광주항쟁은 지도부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항쟁이었잖아요? 우리가 총을 잡은 것은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숨이 바로 끊어지지 않고 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모습, 색색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모습, 말도 못 하고 눈을 껌벅이며 발발 떠는 모습 등목이 관통당해 죽어가는 시민군의 모습에 저는 지금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5월 26일 오후, 모두가 집으로 갔어요. 갔다가 돌아온 분이 딱 한 분이 있었죠. YMCA에서 시민군 병력 30명을 계림초등학교 부근으로 수송하고 도청에 돌아왔더니 오후 11시 무렵 이종기 변호사가 상황실에 들어왔습니다.

'젊은이들이 죽어 가는데 나이 먹은 내가 발 뻗고 잘 수 있겠는가. 자네들하고 같이하려고 왔네. 자네들은 살아서 이 역사를 증언해 주소. 무모하게 저항하지 말고.' 오월은 공동체였잖아요. 이렇게 함께 죽자고 외쳤잖아요. 함께 밥을 먹고 피를 나누었잖아요.

당시 상무대 영창 한 방에 150명이 수용되었는데, 모두가 옴에 걸려 고생했어요. 그런데 학생과 일반인을 분리 수용하자는 거예요. 그렇게 2·3호실은 학생과 지식인, 1·4·5·6호실은 우리 같은 민초들이 수용되었죠. 누가 분리 수용을 요구했는지 아세요? 이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영창에서 그대로 재연되었어요.

오월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이 있고, 지금까지 오월의 소뼈다귀를 우려먹는 사람. 저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내 성미를 알기에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습니다. 동지는 간데없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말던가, 광주민중항쟁에서 민중을 빼던가."
 

김태찬은 1980년 12월 출소하고도 전두환을 몰아내는 싸움판에 또 뛰어들었다. 전남청년연합의 신영일, 김전승과 어울리다가 1986년 또 구속돼 김해교도소에서 징역을 살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나의 교도소 동문이었다. 나는 1979년 김해교도소에서 징역을 살았던 적이 있다. 징역 동문을 만났다는 사실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오월은 묻는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분들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분들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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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묻는다. '그때 어디에 있었느냐?', '너라면 도청의 최후를 지켰을까?' 고통스러운 악마의 물음이다. 40년 동안 오월의 이야기를 들었다. 해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알아도 알아도 오월의 참혹함은 그 끝이 없었다.

불가사의한 것이 오월 광주였다. 어떻게 해서 맨주먹의 시민들이 현대식 무기로 무장을 한 최정예 공수부대에 대항할 수 있었던가? 조직도 없고, 지도자도 없는 민중이 조직된 국가 폭력에 항전한 것은 세계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도청의 최후였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 고교생들이, 주먹들이 왜 도청의 최후를 지켰을까? 현명한 철학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사태였다.

윤상원 일기 -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지은이), 황광우 (엮은이), (주)글통(2021)


태그:#윤상원 일기, #광주오월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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