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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모습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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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모시던 그의 주군에게 총을 겨누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 사연들이 있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긴급조치 9호 치하에서 많은 학생이 투옥되고 학교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거두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700명의 대학생이 1975년 5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제적을 당하고 있었다. 김재규 역시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볼 때 대학생들의 제적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지근 거리에서 정보수집과 사태수습의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은 1976년 12월 이후였다. 과연 김재규는 전임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시절에 자행되었던 '광주일고 고교생 17인의 제적 사건'을 알고 있었을까?

대학생의 제적은 가슴 아픈 일이다.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쏟은 땀과 노고를 생각해 보라. 하지만 고교생의 제적은 대학생의 제적과는 차원이 다르다. 제적된 대학생은 세월이 지나면 언젠가 복학이 된다. 하지만 제적된 고교생은 세월이 지나도 복학이 되지 않는다.

대학교 2학년 때 제적당한 대학생이 서른 살에 복학이 허용되면 다시 캠퍼스에 다닐 수 있다. 하지만 고교 2학년 때 제적당한 고교생에겐 복학이 허용되지 않으며, 만에 하나 복학이 되더라도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고교생의 제적은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성(非可逆性) 때문에 당사자에겐 사회적 사형 선고에 해당하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부모님께 남긴 유서, 비정한 그 심정 
 
광주광역시 공원 내에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광주광역시 공원 내에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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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오면 '민청학련 사건 50주년 기념행사'가 이곳저곳에서 열릴 것이다. 이철과 유인태가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이고, 이해찬과 설훈이 그 시절 학생운동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50년 전의 일을 회고하는 행사가 열릴 것이다.

1974년 그 시절 민청학련 대학생들은 데모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모조리 감옥으로 끌려갔다. 반면 1974년과 1975년 광주제일고 학생들은 네 차례나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하지만 아직 '광주제일고 유신헌법 철폐 시위 사건'에 대해 발언하는 분은 없다.

긴급조치 9호 시절 캠퍼스의 시위는 대부분 '학우여!'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 잡혀갔다. 그런데 광주일고 교정에서는 학생 대표가 연단에 올라가 '왜 유신헌법은 철폐되어야 하는가?'를 밝히는 성명서를 당당하게 낭송하였고, 전교생 2000명이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았다. 나는 고교 1년 때 이 '시위의 교과서'를 경험했다.

1974년 10월 21일, 3학년 지병주와 정경연, 이항규는 그렇게 대담하게 시위를 이끌었다. 지병주는 1974년 4월 광주의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3박 4일 고문을 당했다. 고교 시절을 마무리할 수 없어 거사를 주도하였다. 정경연은 아버님께 유서를 쓰고 비장한 심정으로 거사를 이끌었다.

광주일고생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11월 15일, 손호상과 박석면, 김윤창과 신민호는 제2차 시위에 돌입하였다. 3학년 형들이 교문을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2학년들은 교문을 돌파하고 도청으로 진출하는 것을 시위의 전술적 목표로 삼았다. 그 날은 민반공 훈련이 예정된 날이었기 때문에 경찰들은 거리를 비워놓고 있었다.

광주일고 1학년과 2학년은 신속하게 교문을 돌파하고, 충장로를 시위의 물결로 바꿔놓았다. 스크럼을 짜고 '으샤으샤' 소리치며 달렸다. "자유, 정의"를 목청껏 외쳤다. "유신헌법 철폐"를 외쳤다. 상가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오매, 어째야쓰까!'하며 호응해주었다.

이 길, 이 거리에서 외치는 함성, 충장로 5가에서 1가까지 이어지는 이 길을 달려가는 고교생의 시위대열은 1929년 11월 3일에 있었던 대시위와 흡사하였다. 다른 것이 있었다. 1929년에는 말을 탄 일본 순사들이 칼과 몽둥이로 진압하였고, 1974년에는 경찰들이 최루탄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광주일고생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75년 4월 15일, 할복으로 박정희 독재에 항거한 김상진 열사의 추도식을 우리는 올렸다. 이어 5월 1일 개교기념일을 기하여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 두 사건으로 3인이 투옥되었고, 17인이 제적되었다.

이 전례 없는 고교생 제적 사태는 박정희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백조의 노래'(swan song)였을까? 학우들이 떠난 빈 책상을 지켜보아야 했던 광주일고생들은 이후 대학에 진학하여 전국 각지의 대학에서 박정희를 몰아내는 시위대열의 앞장을 섰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2005년 11월 3일 제76주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식에 앞서 김원본 광주시교육감과 반면환 광주시의회의장 등 주요인사들이 광주일고 교정에 세워져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참배하고 있다.
 2005년 11월 3일 제76주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식에 앞서 김원본 광주시교육감과 반면환 광주시의회의장 등 주요인사들이 광주일고 교정에 세워져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참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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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이 지났다. 그때 우리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우리는 왜 그렇게 뜨거웠을까? 답은 명확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는 비문을 보며 자랐다. 전통은 무서운 것이었나 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열일곱 청소년들이 점심시간이면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애통해했고, 민족의 혼을 일으키자는 열띤 논의를 하였다.

그런데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전면에 청동으로 부조된 선배의 얼굴을 만지면서도 우리는 그 이름을 몰랐다. 가르치는 교사도 없었고, 알려주는 선배도 없었다. 생각해 보자.

동학농민혁명운동을 말하면서, 전봉준과 김개남의 이름을 모른다면, 이 얼마나 공허한 역사인가? 3.1 민족운동을 말하면서 유관순도 모르고 33인도 모른다면, 이 얼마나 공허한 역사인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의 이름을 모르고서 '이어라 전통'을 외쳤으니, 이 얼마나 공허한 역사인가?

2020년 5월 몇몇 뜻있는 분이 '장재성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 장재성 선생인 것을 알아냈으나, 우리는 선생이 언제 타계하였는지 몰랐다. 가족들은 아예 면담을 거부하였다. 트라우마로 인해 만나는 것 자체를 기피하였다. 어렵게 기일을 알아냈다. 그런데 가족들도 선생이 어디에서 타계하였는지 몰랐다.

형무소 수감 중에 헌병들에게 끌려 총살을 당하였으니 광주형무소 인근, 무등산 자락에서 총살되었지 않았을까 우리는 추측하였다. 산동교 인근 운암동 산자락에서 처형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도 하였다. 아니었다. 선생은 1950년 7월 5일, 양산동의 장고봉에서 처형되었다. 광주형무소에서 트럭에 싣고 온 죄수들을 헌병들은 이곳에서 불법 처형하였다. 그리고 시신 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놓았다고 주민은 증언하였다.

해가 서산에 지고 있다. 조금 있으면 사위가 어둠에 잠길 것이다. 이번 17호 역사산책은 여기에서 마치고자 한다. 가슴 아픈 민족의 역사를 어찌 한숨에 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태그:#광주일고 기념탑, #광주학생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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