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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평전>을 집필한 이광호 작가가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노회찬 의원의 삶과 꿈에 대해 말하고 있다. 2023.6.26
 <노회찬 평전>을 집필한 이광호 작가가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노회찬 의원의 삶과 꿈에 대해 말하고 있다. 2023.6.26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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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전에 보면 노회찬 의원의 단점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노 의원의 단점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가 잘 안된다는 점이다. 심상정 의원조차도 "깊이 얘기 나눠보고 싶은데 늘 대화가 안 됐어요"라고 얘기했을 정도다. 대중과의 소통에는 능했는데 왜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는 잘 안됐을까?
"소통이 안 됐다기보다 이런 점이 있는 것 같다. 노 의원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예를 들면, 2016년에 창원에 갈 때 노원에서 선거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황당했다. 노 의원이 얘기를 안 하니까 가기 직전까지 노원에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여영국(전 정의당 의원)이 올라와서 '창원에 와야 한다'고 얘기하고, 종일 같이 있었는데도 노 의원이 말을 안 했다. 굉장히 중요한 결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수를 많이 읽는, 바둑으로 치면 '장고 바둑'을 두는 것이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귀를 막는 것은 아닌데, 토론을 통해서 결정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럴까? 쉽게 얘기하기 어려운데, 우선 본인의 판단에 대한 책임감과 신뢰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이런 수 저런 수를 다 두고 결정하는 것 같다. 창원에 내려갈 때 내린 결정이 그렇다. 결국은 여영국이 노원에 가서 '미안합니다, 노 의원은 창원으로 갑니다'라고 할 때까지 노원에서는 몰랐다.

2017년 대선 후보에 안 나간 것도 마찬가지였다. ('노회찬의 영원한 조직실장'이라는) 오재영도 끝까지 몰랐다. 그런 스타일이 있긴 있다. 물론 스타일의 문제로만 얘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튼 굉장히 신중하게 여러 가지 수를 읽기 때문에 장고가 된다. 바둑을 못 두는 사람은 여러 가지 수를 읽을 수가 없다. 수많은 변수들이 얽히고 섞이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전략적이거나 전술적 사고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노 의원이다. 그런 자기 결정에 대한 신뢰와 책임감이라는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심지어는 결정장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동작에서 기동민(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의 단일화를 제안했을 때도 참모들은 아무도 몰랐다. 김종철(전 정의당 대표)이 얘기한 것처럼 심상정 의원은 막 도와주고싶은 마음이 드는데 상대적으로 노 의원은 그런 마음이 덜 들게 하는 사람이다. 

노 의원의 단점을 비유하면 이런 것이다. 정치가 공적 가치와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는 정치를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우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비유한다. 노 의원은 연꽃을 피우려는 강력한 욕망과 실력은 있는데 진흙탕 싸움에는 약했던 것 같다. 권투로 치면 노 의원은 아웃복서다. 세계에서 최고의 아웃복서는 무하마드 알리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경쾌한 풋트워크(foot walk)와 클린 펀치 외에 약간의 쇼맨십으로 인해 권투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됐다. 노 의원이 이런 권투는 잘한다. 

그런데 마이크 타이슨은 인파이터다. 어떤 때는 상대방의 귀를 물어뜯기도 한다. 이렇게 잡아서 치는 인파이팅을 노 의원이 싫어해서 못 하는 것인지, 못 해서 싫어하는지 모르겠는데 그쪽에 약하다. 정치가 '연꽃'이라는 멋진 대의명분이 있는가 하면 그 이면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왔다갔다 한다.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정치인의 말에서 나오는 것은 연꽃이지만, 손발이 움직이는 데는 진흙탕일 경우가 많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거기는 진흙탕이니까 거기서 인파이팅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약한 것이 노 의원의 약점이다."

- 저도 직접 겪어 보니 노회찬 의원은 토론이나 인터뷰 등 공적 대화에는 능한데, 후배나 주변 참모들, 지인들과의 사적 대화는 약한 것 같다. 
"그래서 오재영과 내외한다는 소리도 나온 것이다. 나는 사적으로 노 의원과 만날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당에서 처음으로 노 의원과 술 마실 때가 있었다. 노 의원이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됐을 때 <진보정치>(민주노동당 기관지)팀에 술을 한잔 사준다고 해서 만났다. 나중에 술자리에 있었던 기자 얘기를 들으니까 노 의원이 나하고 몇 시간 동안 소설에 대한 얘기만 했다고 하더라. 나하고 동년배기도 하고 나도 소설을 좋아하는데, 그런 얘기가 아니면 다른 얘기는 잘 안 하는 것 같다."

- 이정미 현 정의당 대표가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도 곱씹어야 봐야 할 대목이다. "노 대표님은 숱한 난관을 개인기로 뚫고 왔어요. 지지자들을 세력화하지 못했습니다.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모래알처럼 있었죠. 그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어떤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노회찬이니까 개인기가 통한 거죠. 너무 특출났으니까요." 지지자들은 많은데 그 지지자들을 제대로 정치세력화하지 못했다는 지적인데, 정치인으로서 노회찬 의원의 단점을 날카롭게 짚었다. 
"세력화가 조직화인데 이런 생각 든다. 리더가 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조직 분야에 그 부분에 능한 사람을 배치해서 그 사업을 진두지휘하거나 일상적으로 보고받고 체크해야 하는데 노 의원은 그것을 안 한다. 오재영이 '노회찬의 영원한 조직실장'이란 얘기를 들었는데, 오히려 노 의원이 아닌 당의 조직실장으로서 역할을 한 것 같다. 오재영은 노 의원의 표를 조직하러 다니지 않고, 정파 간 갈등이 있을 때 조정하러 다녔다. 리더가 그런 쪽(조직화)에 중점을 두지 않으니 참모들도 정책에는 강할지 모르지만 대중조직화에는 약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결국은 본인이 그런 방식을 잘 못하는 것 같다. 못하니까 열심히 하지도 않고. 노 의원은 당의 리더는 대중적 지지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대중적 영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당이 정파적 중심 사고를 해서 안 한 것인지, 대중적 지지는 노 의원이 제일 많았지만 당내 정파를 침몰시키거나 누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서 그랬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런 부분에 신경을 안 썼다.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송파구에서 지역구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이런 저런 당내 선거가 있을 때 노 의원은 한 번도 자기한테 전화를 안 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노 의원답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하려고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2016년에 창원 재·보궐선거 때 피말리는 민주노총 내부 경선을 거쳤다. 노 의원팀이 여기 내려와서 선거 운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말을 안 하고, 딱 전화기만 잡고 계속 전화만 돌렸다. 노 의원의 오랜 참모가 그것을 보고 '선거는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했다. 그때는 2016년이고 노 의원은 2000년부터 선거해 오던 사람인데... 노 의원은 당내 선거도 그렇게 안 했다는 것이다. 

조직화한다는 것이 일상적으로 술도 마시면서 거리를 좁히고 공사 간에 챙길 것을 챙겨주면서 전화할 멤버들을 조직화하는 것인데, 노 의원의 조직을 보면 당내 주요선거 때 지역 책임자들은 있는데 그런 식으로 조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16년에서야 선거는 이렇게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고 했으니...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심상정 후보가 2등이 된 결정적인 것이 전화통화 등 조직 선거였다. 하지만 노 의원은 그런 것을 안 했다. 삼성엑스파일 사건 때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의원 탄원서를 받는데 150명이나 해줬다. 그런데 노 의원은 전화 한 통도 안 했다. 보좌관들이 하고, 심상정 의원이 제일 열심히 했다. 그런 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분명히 약점이다."

- 노무현과 박근혜, 문재인, 이재명처럼 노회찬 의원도 팬덤 정치(지지자들의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렇게 조직화 하는 선수들과 노 의원 주변에 있는 참모들은 색깔이 서로 다른 것 같다. 정책, 기획 등의 사람들은 많이 모여 있었는데 현장에서 부딪치고 조직화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다른 하나는 노 의원이 노조 안에서의 활동(경력)이 없었으니까 한국의 현실에서는 그것이 굉장히 큰 약점이다. 심상정 의원의 경우 2007년, 2015년 당내 경선에서 노 의원을 이긴 것은 정책이 훌륭해서였다고 하지만 조직적으로 (심 의원이 활동했던) 민주노총의 덕을 봤다. 민주노총 조직표가 실제로 심 의원에게 갔다."

노회찬 "분단은 민족사이지만 가족사이기도 하다"
 
노회찬 의원의 부산 시절 가족 사진.
 노회찬 의원의 부산 시절 가족 사진.
ⓒ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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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전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얘기들이 상당히 많이 공개돼 있다. 이북 출신 아버지와 어머니 집안에 관한 얘기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일단 초기에 가족이 그것을 널리 알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노 의원도 30대가 돼서 처음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장한어머니상을 받고 영부인 육영수랑 밥 먹고 반지까지 받았다. 어머니가 열심히 약방을 한 것도 있고, 월남해 피란 온 어머니 입장에서는 오빠와 남동생이 국보법 등에 걸려 학교 활동, 학부모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래서 장한어머니상을 받았다. 그런 사정이 한편에 깔려 있어서 집안 얘기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가족들이 널리 알릴 동기가 전혀 없었고, 대중들이 이것에 관심을 가질 일도 없었다. 평전에 나온 디테일한 내용은 가족들도 몰랐을 것이다. 나도 이번에 평전을 쓰면서 실향사민(失鄕私民, 1950년 6월 24일 전쟁 발발 이전에 '이남 또는 이북'에 거주했지만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1953년 7월 27일 시기에 '이북 또는 이남'에 있는 민간인)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알았다."

- 방금 얘기한 '실향사민'은 노회찬 의원의 외할머니를 가리키는데, 노 의원의 외할머니는 늦게 피란을 온 가족들과 함께 다시 북한(흥남)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내용 같다. 
"처음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완전 무관한 생존의 문제였다. 노 의원의 어머니는 여기서 결혼했고, 둘째 외삼촌은 서울대에 들어갔고, 나머지 가족들(늦게 피란 온 외가쪽 가족)은 살길이 막막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더라도 내 땅과 내 집이 있는 거기(흥남)로 가면(물론 이분들이 김일성 통치 하에 있었던 분이긴 하지만) 여기보다 거기서 사는 어려움이 덜하겠지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는 60년 이상 살았던 동네인데 여기는 아주 낯선 데였으니까. 그때는 피란민도 많아서 살기 어려울 때라 막막했을 것이다. 그런 생계 때문에 북으로 다시 간 것이다. 

생계 때문에 가긴 했어도 당시 기록들을 보면 넘어가면 빨갱이라고 해서 서북청년단이 (귀향을) 막고 실제 폭력 행사도 해서 고향에 못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으로 송환된) 실향사민 37명 중에 포함된 것을 보면, 여기서 살기 굉장히 어려웠고, 고향에서 사는 것이 지금보다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그리고 '70년 동안 분단되겠어?'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때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몇 달 아니면 몇 년 있다가 다시 고향에 갈 거라고 생각했고, 이렇게 분단될 줄 알았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노회찬 의원은 언제 외할머니의 월북(귀향) 이야기를 처음 들었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1980년대 후반인 것 같다. 1997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직접 가서 만났으니까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그때 북으로 갔던 이모를 중국 연변에서 만났다."

- 외할머니의 자의에 의한 월북(귀향)이 노회찬 의원 가족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나?
"상처라는 것이 불어 터져야 하는데 터지지 않았다. 노 의원도 30대 때 처음 들었을 정도로 아는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 등 소수였다. 소수만 알았기도 하고 당시에는 이런 것들을 쉬쉬 해야 할 때였다." 

- 노회찬 의원이 쓴 1972년 8월 11일 자 일기를 보면 "통일이 되면 나는 그곳으로 제일 먼저 달려갈 것이다. (중략) 그리고 늙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리라"라고 썼다. 자신이 태어난 '부산'보다는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흥남'(함남 흥남 서호리)을 자신의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한 것일까?  
"자기가 (어머니 고향을) 경험한 것도 아닌데, 상상, 이데올로기, 통일 이런 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본인은 '분단은 민족사지만 가족사'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 특히 노회찬 의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으로 둘째 외삼촌(원태진)을 들었는데 왜 그런가? 
"노 의원이 1956년생인데, 네다섯 살 때 서대문 형무소에 자주 면회를 갔다. 외삼촌이 국보법으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외삼촌을 어려워 했다. 아파트에 살았는데 산 염소를 가져와서 잡은 것을 보면 외삼촌은 범접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노 의원도 그 외삼촌을 어려워 했다. 그런데 멋도 있었다. 특히 누님(어머니)한테 뭘 사줄 때 보면 손도 컸다. 아이들이 보면 외경심을 들게 하는 분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다 서울대 수학과를 갔는데 서울대 졸업을 3일 앞두고 형사들이 부산으로 와서 외삼촌을 검거해 갔다. 7년 만기로 감옥에서 살다 보니 졸업도 못 했다. 피란 와서 고등학교 다니고, 서울대에 가고, 졸업 전에 잡혀갔으니 애들에게는 외경심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외삼촌이 서울대 수학과인데 여러 가지 재능이 있었다. 이분이 부스럼약을 만들었데 약효가 좋아서 인기가 있었다. 나중에 건강식품 관련 일을 했고, 건강식품관련 책도 쓰고 번역서도 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그런 길로 갔다. 여러모로 조카들에게 범접하기 어려운 분이었다. 

노 의원은 (고등학교) 재수할 때부터 외삼촌과 같은 집에 살았다. 외삼촌하고 술도 마신 것 같다. 당시 일기에다 '외삼촌 말을 듣고 내가 결심을 굳혔다'라고 쓰기도 했다. 외삼촌과 나눈 얘기들, 외삼촌이 읽던 책들, 이런 것들이 당연히 그 시기 노 의원이 유신에 저항적인 청소년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 외삼촌의 태도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많이 알고 있는 분인데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가르쳐 들지 않은 것에서 인간적 매력도 느꼈던 것 같다. 본인은 외삼촌을 '아버님처럼 모신 분이다'라고 얘기했다."

- 노회찬 의원의 가족사가 그의 '북한관'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아니다.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혁명이론이 엔엘피디알(NLPDR,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이었는데 그때 조직들이 깊이 공부했다기보다 '독점심화', '식신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등의 이론들이 있어서 그랬다. 여기는 자본주의 발전도 안 되고, 민주주의도 안 되니까 혁명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노 의원이 속해 있는) 인민노련 지도부는그런 혁명 이론들에 대해 '정말 그래?' 의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도 엔엘피디알을 넣었는데, 그 엔엘은 엔엘(NL, 민족해방파)의 민족해방론 같은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주요 모순이든 기본 모순이든 분단은 주요 모순점 중 하나라고 생각해 엔엘이 들어갔다.  

그것보다는 양우진씨(변형윤 교수의 학현학파 출신으로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가 쓴 서울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한국자본주의의 성격 규명을 위한 일시론, 1986년)이 많이 읽혔다.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국가의 일반적인 발전 경로를 밟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때 혁명이론의 토대가 되는 세계관을 흔들었다. 그 논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민노련은 엔엘, 피디 등의 혁명이론에 교조적으로 집착하지 않았다. 노 의원은 운동권, 특히 현장에 가 있는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수입된 혁명이론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았나 하는 문제의식을 꽤 가지고 있었다."

"'갈라서', 결혼생활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노회찬 의원과 부인 김지선씨의 결혼식 사진. 두 사람은 모두 노동운동가였다.
 노회찬 의원과 부인 김지선씨의 결혼식 사진. 두 사람은 모두 노동운동가였다.
ⓒ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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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도 평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노회찬 의원의 삶의 한 부분인데, 부인 김지선씨와의 갈등 관계도 평전에서 새롭게 공개됐다. 저도 평전에서 가장 가슴 졸이며 읽었던 대목이다. 노회찬 의원 부부의 갈등 부분을 평전에 포함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결혼생활이 어땠는가도 노 의원을 아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쓰고 싶었고, 물론 김지선 선배의 동의도 받았다. 공적으로 공개된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사, 결혼 후 입양 문제 등 부부 간 문제 등도 노 의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결혼생활에서는) 노 의원도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다. '왜 말을 안 해, 말을 해' 하며 싸우기도 하고, '갈라서' 이런 때도 있었다. 두 분이 싸우면서 '갈라서' 하는 것은 가볍게 한 것이 아니어서 좀 심각하긴 했다. 

입양하려고 할 때 노 의원이 입양에 썩 적극적이지 않았다. 물론 반대는 안 했지만 이게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노 의원의 공적인 얘기만 하면 분명히 존재하는 사적 공간에서의 일들이 사라질 수 있는데 그것을 알리는 것이 노 의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김지선 선배가 안 된다고 했으면 당연히 안 썼을 것이다. 김지선 선배는 처음엔 머뭇거리다가 '필요하다면 하세요'라고 해서 이렇게 쓴 것이다."

- 노회찬재단의 평전기획위원회도 동의했나?
"동의했다."

- 평전을 쓰기 위해 김지선씨를 직접 인터뷰했을텐데 노회찬 의원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아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인터뷰 자체가 매우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 
"인터뷰를 세 번이나 했다. 많이 울어서 힘들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는데 그때만 해도 힘들어서 인터뷰가 자주 그쳤다. 평전의 초고가 된 다음에 원고를 보여준 사람이 몇 안 된다. 박갑주(변호사)는 법적인 문제를 검토하고, 박창규(노 의원 보좌관 출신의 오랜 참모)는 사실 확인을 했다. 그리고 가족 중에는 동생(노회건)하고 김지선 선배에게 보여드렸다. 김지선 선배는 그때 '나는 안 읽겠다'고 했고, 이번에 책이 나와서 한 권 드렸다. 원고를 다 쓴 다음에 최초의 게이트 키퍼(gate keeper, 언론매체에서 기사 내용을 선택하고 검열하는 직책)가 김지선 선배였는데 제일 무서웠던 사람이다. 김 선배가 어떻게 말씀하실까? '담백해서 읽기 어렵지 않았다. 좋았다.' 그렇게 얘기했다. 그 순간 나는 가슴 졸이던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 부부 간 갈등 요인으로 '말이 없는 남편'을 꼽았는데, 이는 주변 사람들이 노회찬 의원의 단점으로 '대화가 잘 안 된다'는 점을 꼽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연결되는 부분도 있다. 노 의원이 김지선 선배에게 쓴 긴 편지를 보면 '내가 얘기를 아주 안 하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썼는데 실제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김지선 선배의 입장에서 보면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결혼했는데, 바깥에서 있었던 얘기를 나한테 왜 안 하냐는 차원이 아니라, 힘든 일을 같이 해나가기 위해 우리가 부부가 된 것 아니냐, 이런 게 컸다."

- 노회찬 의원은 그 부부 간 갈등관계를 어떻게 풀었나? 평전에 보면 말보다는 자신이 제일 잘 표현할 수 있는 편지나 메모 등 글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김지선 선배에게 보낸 편지로 남았다. 우리 같으면 술 한 잔 마시면서 풀면 되는데 노 의원이 그런 것에 약한 것 같다. 어떤 측면에서는 노 의원이 김지선 선배를 약간 어려워하는 측면도 있고, 기대는 측면도 있다. 내가 김지선 선배에게 '노 의원이 선배를 어려워 하지 않았어요?' 물어보니까 '그렇다'고 하더라."

"자신의 삶과 가치가 외화된 당을 중심에 놓고 죽음을 선택했다"
 
영결식 당일 노회찬 의원을 떠나 보내는 국회 청소 노동자들.
 영결식 당일 노회찬 의원을 떠나 보내는 국회 청소 노동자들.
ⓒ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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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의원이 드루킹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사실을 부인하고, 그것을 제대로 후원금(정치자금) 처리하지 않은 것 때문에 꼭 목숨까지 끊어야 했나 하는 안타까움이 아직도 많이 있다.  
"그럴 것이다. 노 의원의 삶과 가치가 외화된 것이 당인데, 그 일로 인해 그것이 무너지게 됐다. 노 의원이 대중적 신뢰를 많이 쌓아왔던 사람이기 때문에 더 많이 오랫동안 힘들었을 것이다. 본인뿐만 아니라 당까지 그랬을텐데 탈출구가 안 보였다. 당을 살리고 자기를 살리는 길이 뭘까 생각했을 것이다. 누구나 그 생각을 하지만 누구나 그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왜 이런 선택을 했나? 자기하고 당이 하나인데 척력(두 물체가 서로 밀어내는 힘)이 생기면서 자기를 당과 떨어뜨려야 당이 사는 상황이 돼 버렸다. 절대로 상상도 못할 상황이 생긴 것이다. 노 의원은 핀치(절박한 상태)에 몰려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냉철한 '직업 전투원'의 계산 속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본다. 

전 존재를 던지는 결정을 한 것은 자신의 전 존재인 당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무한책임 무한사랑의 당이었다. 노 의원이 담백하게 썼지만 유서에는 다 써 있다. 자기가 당한테 누(累)가 된다고 했는데, 단 하나의 누지만 현실에서는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이해하면서도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자체를 공격해서 상처를 들쑤시고 들쑤셔서 당을 망가뜨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질텐데 노 의원이 그 빌미와 원인을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손석희의 뉴스룸(JTBC)에 나와서 손석희가 물어보니까 아니라고 얘기했다. 4월 첫 보도가 나온 다음 돌아가신 7월까지 3개월 동안 계속 부인해왔다. 처음 터졌을 때 시인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 의원 인생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자기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이 노 의원을 (끝까지) 몰고 갔다."

- 당시 부인 김지선씨가 기자회견을 제안했는데, 그 기자회견을 실제로 했다면 노회찬 의원의 죽음은 없었을까?
"그 점은 나도 아쉽다. 왜 그랬는지 아쉽다. 김지선 선배나 노 의원은 일찍부터(2016년) 팩트를 알고 있었다. 김지선 선배가 현명한 제안을 했는데, 그것은 노 의원 기준으로는 아니었던 것이다."

- 노회찬 정치의 바탕이었던 '공적 부끄러움'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보는가? 평전에서는 "자신의 잘못이 빚어낸 개인적 부끄러움의 공적 무게를 그는 이겨낼 수 없었다"라고 썼던데.
"대중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았는데 그 신뢰와 지지의 근거들이 무너지는 사건이었다. 돈을 받았다는 것과 거짓말을 했다는 것. 특히나 이것은 당과도 관련돼 있었다. 앞서 노 의원이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이 구분되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했는데, 받은 행위가 있었고, 부인하는 행위가 있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어떻게든 살아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감옥이든 뭐든 책임지겠다는 플랜비(PLAN B, 최초 계획이 실패했을 때 대안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계획)를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 노회찬 의원의 죽음에서조차 그의 진정성, 일관성이 있는 것 같다. 
"삶이다, 삶. 죽음이라기보다도 삶을 그렇게 정리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를 뿐이다. 핀치에 몰려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그렇게 선택해야겠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때도 당을 중심에 놓고 했다. 물론 당을 중심에 놓고 한 것이 자기를 중심에 놓고 한 것이다. 당은 자기 삶 전체였으니까. 당과 끝까지 같이 가야 하는데, 내가 어느 순간 당과 떨어져야 당이 살게 되는 말도 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서 삶을 중단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어머니 친구 "태순이가 치매 걸린 것을 하나님께 감사"

- 평전을 쓰기 위해 자료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을텐데, 혹시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김종해라고, 노 의원의 의형제가 있다. 직업학교(구로)에서 만난 사람인데 그분과 인터뷰한 것 중에 못 쓴 것이 있다. 노 의원이 아주 좋아했던 아우인데, 노 의원한테 서운한 것이 있었더라. 다 큰 아들의 취직을 부탁한 모양인데, 노 의원은 그런 것을 못하지 않나? (웃음) 그분이 그랬다. '사람 좋은 회찬이 형이 어디서 밥이나 먹고 있을까 걱정했다'고. 노 의원이 대학을 나왔다는 것도 당연히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분이 헤어진 다음에 노 의원을 무지 많이 찾아다녔다. 노 의원이 이분에게 잘 보일 이유가 전혀 없는데, 노 의원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사귀고 대했는지가 그분한테서 보이더라. 그런 점에서 인상에 남았다. 

또 한 분은 책에 거의 인용을 안 했는데, 노 의원 어머니의 친구 분이다. 이 분은 나하고 인터뷰 약속을 잡고 2주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기억을 끄집어 내는 것이 힘들었다고. 그 분과 한 인터뷰 중에 먹먹해진 것이 두 번이다. 한번은 '태순이가 치매에 걸린 것을 하느님한테 감사한다'고 했다. 이 분이 독실하게 성당을 다니는 분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노 의원의 어머니가 치매에 안 걸렸으면 노 의원이 안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분이 '그렇지 않았으면 태순이는 터져 죽었을 것이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정말 먹먹해지더라. 

그리고 내 인터뷰 말미든 어디는 꼭 집어넣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의 책(<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2014년)과 노 의원 인터뷰(9회) 원고가 책 쓰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됐다. 많이 인용됐을 뿐만 아니라 인용 안 된 것도 원고에 녹아들어갔다. 노 의원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책과 자료라 개인적으로 구영식 기자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도 꼭 전하고 싶다."

- 저자와 노회찬 의원의 나이 차이가 한 살이면 동시대에 살았다고 봐야 하는데, 동시대인으로서 노회찬을 어떻게 평가하나?
"소수파라는 측면에서 노 의원과 나는 비슷하다. 나는 딴다라(밴드) 하면서 학교에서 잘렸고, 노 의원은 고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했다. 당시 고등학교에서 운동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그것이 널리 알려지기도 쉽지 않았다. 서울사대부고를 나온 분과 전화 인터뷰를 했는데 '내가 사대부고 다닐 때 경기고 노회찬의 이름을 들었다'고 했다. 노 의원이 고등학교 운동권 중에서도 좀 알려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학교 간 연대가 이루어졌는데, 경기고와 양정고, 용산고 등이 모이는 모임이 있었고, 그 모임이 노 의원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노 의원도 유신 시대의 산물이다.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일은 아닌데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노 의원처럼) 그런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끝까지 삶의 준거틀로 산 사람은 희귀하다."

"평범한 사람이 비범하게 살려고 노력하다 갔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현관 앞에서 열린 고 노회찬 의원 국회 영결식에서 조사를 한 후 돌아서며 흐느끼고 있다. 2018.7.27
▲ 노회찬 없는 국회... 흐느끼는 이정미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현관 앞에서 열린 고 노회찬 의원 국회 영결식에서 조사를 한 후 돌아서며 흐느끼고 있다. 2018.7.27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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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금 여기서' 노회찬 의원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
"정치인이든 아니든 자기 삶을 진하게, 정말 열심히, 자기 에너지를 소진하며, 하고 싶은 것을 재미있게, 열심히 하고 간 사람이다. 그는 직업이 정치인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게 행복하다고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못 갖는다. 그래도 자기 직업을 행복으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 의원은 권력이 아니라 일상을 변화시키자고 했다. 노 의원은 '공기'라는 표현을 썼는데, '일상의 공기를 바꾸자'는 것이다. 그렇게 바뀐 공기의 사회는 뭐냐하면, 자기의 직장을 통해서 가족이 생활하고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일상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은 문제가 되는 것이고. (노 의원이 생각한 사회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면 제일 행복한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자기 직업을 행복으로 연결하는 사회였다. '노회찬은 말 잘하는 정치인', 이런 것이 아니라 정치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진하고, 열심히, 신나게, 때로는 모험적으로 살고, 긴장감 있게 살았다. (정치인이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 직업 안에서 그런 것들을 찾으면 된다는 보편적인 교훈을 주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면 노회찬 의원은 행복했겠다.  
"노 의원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으니까 노 의원은 행복에 가까운 편이다. 물론 힘들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행복한 삶과 편안한 삶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 노회찬 의원을 '신화화'하는 것은 노 의원도 원하지 않을 것 같다. 
"본인이 신화적 존재도 아니고. 황광우(인민노련 출신의 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는 '노회찬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얘기했는데 평범한 사람이 비범하게 살려고 노력하다가 갔다."

- 예약 판매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책 <조국의 시간>보다 많이 팔려야 하는 것 아닌가? (웃음)
"그랬으면 좋겠는데…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사주면 되지 않을까? (웃음) '인간 노회찬'이 궁금한 분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 고 노회찬 전 의원이 사용했던 책상과 유품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 고 노회찬 전 의원이 사용했던 책상과 유품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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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①] "나는 '노회찬 위인전'을 쓰지 않았다" https://omn.kr/24mgg
- [인터뷰②]"부모에게 보낸 서늘한 편지, 노회찬 이해하는데 중요" https://omn.kr/24nvp

태그:#노회찬 평전, #이광호, #노회찬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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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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