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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1851-1894)
 김옥균(1851-1894)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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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 박규수를 만나고 그의 사랑방을 출입하면서 오경석과 유대치 그리고 뒤이어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통적인 유학과 실학의 범주에서 학문을 하던 '모범생' 수준이었다.

김옥균이 박규수를 만난 시점은 19세 때인 1869년(고종6)이었다. 박규수의 친척으로 박영효의 친형인 박영교는 북촌의 양반 자제들 내에서 중망을 얻고 있는 감옥균을 이내 박규수의 문하로 끌어들였다. 김옥균은 박규수 문하에서 처음으로 개화사상을 흡입한 이후 박규수의 소개로 유대치, 오경석 등과 만나면서 급진적인 개화사상에 빠져들었다. (주석 5)

박규수는 이웃의 영특한 청년 김옥균의 소문을 들었고, 자신의 사랑방 출입을 허하였다. 여기서 청년 김옥균이 박규수를 통해 오경석과 유대치를 만나게 된 것은 그에게는 가히 '신대륙의 발견'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지식세계는 유학과 실학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에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사회는 후기에 이르러 점차 격화되고 있던 봉건체제의 위기와 밖으로부터 밀어닥치고 있던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위협 속에서 일부 중인 출신 지식인과 양반관료들 사이에서는 국내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자각하고 세계정세의 추이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는 사상적 움직임으로서 개화사상이 형성되고 있었고, 이 사상에 따라 결집된 정치세력인 개화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개화사상의 형성과 전파에는 박규수를 비롯한 개명관료와 오경석, 유대치 등의 중인 출신 지식인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주석 6)
정독도서관 입구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 주변은 김옥균 집터로 알려진 곳이다. 김옥균 저택은 홍현에 자리해 ‘홍현댁’이라 불렸다. 정독도서관 안에 김옥균 집터 표석이 서 있다.
▲ 김옥균 집터 표석 정독도서관 입구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 주변은 김옥균 집터로 알려진 곳이다. 김옥균 저택은 홍현에 자리해 ‘홍현댁’이라 불렸다. 정독도서관 안에 김옥균 집터 표석이 서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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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파 지식인들을 만나면서 이들이 전하는 신사상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들도 이 영특한 청년을 아껴주었다. 오경석은 중국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 <지구설략(地球說略)>, <역언(易言)>, <격물입언(格物入言)>, <박물신편(博物新編)>, <만국공보(萬國公報)> 등의 문명서적을 들여온 터라 김옥균도 읽게 되었다.

지인들 사이에 '백의정승'으로 불린 유대치는 오경석이 들여온 각종 서책을 일찍 소화하고 이를 다시 김옥균 등 젊은층에게 전파하였다. 

김옥균에게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한의원 유대치다. 둘은 사제지간의 의리를 맺을 정도로 관계가 긴밀하였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직전에 병으로 누워있던 유대치를 위문하면서 거사를 깊이 논의한 바 있다. 유대치는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내 병든 몸을 이끌고 깊은 산속으로 행방을 감추었다. 그의 아내는 참수될 것을 두려워해 자결했다.

오경석 역시 중인 출신의 일개 역관에 불과했으나 빈번한 중국 사행을 통해 세계사정을 알게 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당대의 선각자였다. 그는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서양문명을 소개한 책자들을 구해와 유대치 등에게 일독을 권했다. 그가 가져온 책자는 유대치를 통해 곧바로 김옥균 같은 청년들에게 전해졌다. (주석 7)

김옥균의 개화사상을 일깨운 또 한 사람은 이동인이다. 그는 개화사상 뿐만 아니라 김옥균이 불교를 좋아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서울 근교의 봉원사 소속인 이동인은 일본의 거찰인 혼간지(本願寺)의 부산별원을 왕래하면서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의 소식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는 유대치와 교류하다가 김옥균을 알게 된 뒤 부산별원에서 입수한 <만국사기(萬國事記)>와 세계 각국의 풍물 사진 등을 전해 주었다. 그는 1879년(고종 16)에 처음 일본을 방문해 신문물을 눈으로 확인했고, 수신사 김홍집과 만난 뒤 정계인사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조사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되었으나 출발 직전에 대궐로 들어갔다가 이내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반대파에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주석 8)

김옥균은 이들과의 잦은 만남 그리고 가져온 서책을 통해서 구미에 비해 당시 조선이 얼마나 뒤떨어지고, 낡고 부패한 주자학체제를 청산하지 않으면 머잖아 구미 열강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할 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개화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학습을 하였다.

19세기 중엽부터 오경석, 유대치, 박규수에 의해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은 1870~80년대에 이르러 김옥균을 비롯한 김윤식, 김홍집,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어윤중, 유길준 등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들은 박규수, 유대치의 영향과 그들로부터 받은 책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자본주의 제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뜨게 되었다. (주석 9)


주석
5> 신동준, 앞의 책, 21쪽.
6> 망원한국사연구실 한국근대민중운동사서술분과 지음, <한국근대민중운동사>, 100쪽, 돌베게, 1989.(이후 <한국근대민중운동사> 표기)
7> 신동준, 앞의 책과 같음.
8> 앞의 책, 22쪽.
9> 앞의 책, <한국근대민중운동사>, 10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옥균, #김옥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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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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