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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콰이당마오즈(快當帽子) 분교 터
 신흥무관학교 콰이당마오즈(快當帽子) 분교 터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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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은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치한 데 이어 광업사(廣業社)를 조직하여 수전(水田) 개간을 통한 동포사회의 농업발전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문제는 토지는 물론 황무지라도 한인 이주민이 개발하기가 쉽지 않았다. 향후 독립군관을 양성하는 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서는 많은 동포들이 이주하고, 여기에 필요한 농지가 필요했다. 

성재 이시영의 역할이 컸다. 6형제와 함께 망명하여 이곳에 터를 닦았던 그는 중국총통 위안스카이를 만나 문제를 해결하였다.

중국인들의 오해가 쉽지 않자 이시영은 베이징으로 가서 한국에 있을 때 친밀했던 위안스카이(遠世凱)와 중국 총통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중국인들의 오해를 어느 정도 풀 수가 있었다. 

이시영은 대한제국 외부에 있을 때 위안스카이와 자주 만났다. 당시 그는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의 명을 받아 총리외교통상사의가 되어 조선에 머물면서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는 한편 청나라 세력을 심어 일본에 대항했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귀국하여 1906년 이홍장이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북양대신이 되고, 1911년 신해혁명 후에는 총리대신이 되어 손문과 손을 잡고 중화민국 초대 대총독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석주 이상룡(1858~1932). 우당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석주 이상룡(1858~1932). 우당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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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과 이시영 등이 만주에서 신흥강습소에 이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는 위안스카이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이상룡은 한인들의 토지매입이 용이해진 상태에서 광업사를 조직하여 수전 개간을 통한 동포들의 농업 발전을 도모한 데 이어 자신계(自新契)를 조직하여 이주민들의 실업 활동을 진작시켜 현지 한인사회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했다. 장차 독립군관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계 취지서〉를 통해 교포들의 인식 변화와 참여를 촉구했다. 내용에서 확연히 달라진 그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이미 고식적인 동도서기론이나 구본신참 또는 법고창신 수준을 뛰어넘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자신계 취지서

이윤(伊尹)이 이르기를, "새로운 것을 쓰고, 묵은 것은 버린다."하였다. 오늘날은 바로 일대 변환의 국면이다. 풍조에 떠밀려 옛 것 치고 새롭게 되지 않은 것이 없거니와, 그중에서도 먼저 새로워진 것은 무대를 점거하여 우등이 되고 승리를 하는 반면에, 뒤늦게 새로워진 것은 하풍(下風)으로 물러 앉아 열등이 되고 패배를 하게 되니, 이는 자연스런 법칙이다. 

새로워지는 것에는 두 가지 도가 있다. 자신으로부터 새로워진 것은 새로워질 권한이 내게 있다. 그러므로 선택하고 취사하여 그 완전함을 다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새로워진 것은 새로워지는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 그러므로 속박되고 내몰리어 그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된다. 한 나라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고, 한 사회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새로운 사업에 뜻이 있는 자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묵은 사람들이다. 오직 옛 것이 있다는 것만 알고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다가, 하루아침에 강한 무리들을 만나게 되어 하는 일마다 꺾이고 패하여 화망(禍網) 속에서 남은 목숨이 되어 지방을 떠돌게 되었다. 일단 발을 들어보면 전장(戰場)이 아닌 곳이 없다. 

풍상에 단련되고 운회(運會)에 부딪히다 보면, 새로운 것도 또한 새롭게 되고, 새롭지 못한 것도 또한 새롭게 된다. 남을 따라 행동하여 허수아비 같은 상태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조종대(操縱臺)가 내게 있어서 남자다운 정신을 지니는 것이 낫다.

저 중국을 보지 못하였는가? 지난날의 진부함이 어떠하였던가? 그런데도 한번 스스로 혁신한 이후로는 국세가 점차 신장되어 민기(民氣)가 점점 견고해지니, 이는 우리들이 가장 흠탄해야 할 바이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다른 사람과 같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하였고, 또 이르기를,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워 할 일이 없을것이다." 하였으니, 별난 사람이 없으면, 괴이한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아아! 우리 한인들은 노력하고 새롭게 하기를 오직 중국처럼 하여야 할 것이다. (주석 1)

옥수수 창고에서 시작했던 경학사가 합니하로 옮겨 교사를 신축하고 교명을 신민회의 '신(新)' 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흥(興)' 자를 붙여 '신흥강습소'라 지었다.

신흥강습소 교사는 토착민들의 오해가 풀리면서 합니하 강북쪽 언덕 위에 신축할 수 있었다. 각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고 병영사(兵營舍)도 신축하였다. 내무반에는 사무실·편집실·숙직실·나팔실·식당·비품실이 구별되어 있었고, 생도들의 성명이 부착된 총가(銃架)가 별도로 설치되었다.  

신흥강습소는 1911년 5월 교사 낙성식을 갖고 교명도 신흥중학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4년제 본과와 6개월 또는 3개월 과정의 속성과를 병설하여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젊은 인재들을 교육 훈련시켰다. 

신흥강습소는 자금난 등의 난관 속에서도 1911년 12월 제1회 특기생으로 김연·변영태·성주식 등 졸업생 40여 명을 배출했다.

강습소는 당초 양기탁 등의 국내 모금과 이석영의 재산으로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국내 모금이 중단되고 말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석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석영의 재산도 이내 고갈되고 말았으므로 재만 동포들의 기부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911년에 서간도 지역에는 풍토병이 만연하고 가뭄과 서리 등 천재까지 겹쳐 동포들의 농사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신흥강습소는 더 이상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경영의 어려움 속에서도 교사·학생들은 조금도 움츠려들지 않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가를 부르면서 교육과 훈련에 매진하였다. 다음은 교가 1절이다. 

 신흥강습소 교가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의 영절의 
 여러 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젖 ㅡ 먹여 준 ㅡ 이가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ㅡ좔좔 결치며 돈ㅡ다. (주석 2)


주석
1> 이상룡, <석주유고(상)>, 628쪽,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2008.
2> 박환, <신흥강습소>, <한국독립운동사사전(5)>, 354쪽, 독립기념관, 200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상룡, #석주이상룡평전, #이상룡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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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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