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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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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지난 3.1절 기념식장에는 강우규·김구·김규식·민영환·신채호·안중근·안창호·이회영·이봉창·윤봉길·유관순 의사 등 대표적 독립운동가 11명이 내걸렸다. 이에 대해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당대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분이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진이 보이지 않았다"며 억지를 부렸고 급기야 윤석열 대통령도 격노했다고 한다.

이러한 대통령의 의중을 읽었는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도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자유 대한민국'이란 국가 정체성을 바로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460억 원 짜리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들고 나왔다. 이에 야당과 몇몇 언론이 반발하자 보훈처는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면서도 "다양한 사례를 살펴보고 국회와 국민의 의견수렴을 거쳐 추진"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즉 야당의 반대가 약하고 국민 여론이 조용하면 건립하겠다는 뜻이다.

도대체 잊을만하면 되살아나는 이승만 기념사업은 언제부터, 누가, 왜 추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이승만 기념사업 탄생의 근거
 
1950년 2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 하네다 공항 출발에 앞서 재일 동포로부터 환송 꽃다발을 받고 있다.
 1950년 2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 하네다 공항 출발에 앞서 재일 동포로부터 환송 꽃다발을 받고 있다.
ⓒ 박도/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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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기념관 건립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역대 독재자들에 대한 기념사업의 법적 근거는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아래 예우법)'이다. 1969년 제정된 예우법은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로 시작된 듯하다. 5.16 쿠데타 이후 제5대 대선(1963년)과 제6대 대선(1967년)에서 박정희는 두 차례 모두 야당 윤보선 후보를 상대로 승리했지만 윤보선은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었으며 제7대 대선(1971년)에도 야당 대선후보로서 출마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예우법은 윤보선 달래기용이 이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 왜냐하면 1969년 제정 당시 예우법의 대상은 윤보선과 프란체스카 단 두 사람 뿐이었고 이 시기에는 감히 국민 정서상 이승만 기념사업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실제로 예우법 제정 4년 전인 1965년 이승만이 사망했지만 예우법은 이승만이 예우 대상이 아니었던 점 등을 보면 애초부터 예우법은 윤보선을 위한 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1980년 광주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1981년 예우법을 개정하는데 이때는 직전 대통령으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신군부에 순순히 권력을 이양한 최규하와 박정희의 세 유자녀를 위한 법 개정이었다. 당시 개정의 주요 내용은 최규하를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대우하고, 대통령 봉급의 95%를 지급하는 파격적인 대우가 그 골자다. 또한 박근혜, 박근영, 박지만에게도 대통령 봉급의 70%를 3등분 해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1988년 개정된 예우법은 전두환이 퇴임 후 자신을 위한 셀프 예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의 법적 근거와 주요 내용.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의 법적 근거와 주요 내용.
ⓒ 방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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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으로 연명하던 인사들, 기념사업에 불을 붙이다

4.19 혁명 후 34년 동안 이승만 기념사업은 잠잠했다. 심지어 이승만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1975년 기념사업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이렇다 할 활동은 하지 못했으며 이듬해인 1976년 <우남실록>을 발간한 것이 전부였다. 긴 잠을 자던 이승만을 깨운 이들은 남북의 화해무드에 화들짝 놀란 반공세력들이었다.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불바다' 발언 그리고 미국의 영변 핵단지 폭격 계획 수립 등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한창일 때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 요청으로 카터 전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면담하고 서울로 내려와 김영삼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전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결정된 것이다.

실로 6.25전쟁 휴전 41년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지도자가 마주 앉게되는 역사의 대반전이 다가오던 때에 가장 불안감을 느낀 이들은 바로 한평생 반공으로 연명하던 인사들이었다.

자칭 '반공 재야' 이철승을 비롯해 강인덕, 김삼봉, 오제도, 백선엽, 이명영, 이도형, 채명신 등은 1994년 2월 '건국원로 대표 긴급 시국대책회의'를 만들면서 현 시국을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질 총체적 위기'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우익단체 결성, 잡지 창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회'를 만들어 반공세력의 목소리를 내겠다고 벼렸다.

"여-야 정치인 할 것 없이 전범의 테러리스트인 김일성을 못 만나 안달을 하는가 하면 공영방송에서 건국의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고 좌익이었던 최능진 미군정 경무국 수사국장이 미화되고..."(<조선일보> 1994. 3. 13.)

이들이 남북정상회담을 약 한 달 앞둔 1994년 6월 30일 '우남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활성화를 위한 모임'을 성대하게 개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날 모임에서 이들은 "대한민국의 국가 기반을 닦은 위인을 푸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목청 높였다. 이들의 속내는 '미군정기 좌익과의 투쟁에서 승리해 현재의 대한민국을 세운 자신들을 푸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하소연이었다.

이날 모임의 참석자들의 면면을 보면 한국 반공세력의 총집결로 보인다. 특히 일제강점기 YMCA 부총무로서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한 윤치영의 참석은 놀랍지도 않지만 가수 이미자씨는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의문이다. 굳이 이승만과 이미자의 공통점을 찾자면 본관이 전주로 같다는 정도랄까. 누군가 이미자씨에게 본관도 같고 전직 대통령 기념행사이니 가자고 했고 이미자씨가 수락했다고 해도 그 책임은 고스란히 이미자씨의 것이다.

여하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승만 기념행사에 모인 반공세력들에게 꿈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반대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바라던 이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당시 대통령 통일비서관이었던 정세현의 탄식이다.

"7.27 공동선언이 탄생했더라면 YS가 남북관계를 '확실히' 발전시켰을 것이고 남북경협과 긴장완화가 연계되면서 남북관계 개선이 구조화됐더라면 보수성향의 후임 대통령도 그 흐름을 뒤집지는 못했을 것이다."(<한겨레> 2015. 11. 29.)

<조선일보>의 결합
 
1995년 2월 4일 김영삼 대통령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 개막테이프를 끊은뒤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1995년 2월 4일 김영삼 대통령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 개막테이프를 끊은뒤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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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세력들은 더욱 신이 나서 이승만 기념사업에 열을 올리고 여기에 <조선일보>가 결합하면서 이승만 기념사업은 '결정적 전환점'을 맞는다. 1995년 2월부터 약 한 달간 진행된  <광복 50주년·조선일보 창간75주년 특별기획전 : 이승만과 나라세우기>가 그것이다.

<조선일보>는 전시회 전부터 카운트다운 하듯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급기야 김영삼 대통령을 개막식에 초대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일보>는 이 전시회를 '인물탐구 넘어 현대사 재평가 계기로' 삼겠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월간 조선>(1993년 8월호)은 한완상 당시 통일부총리가 사회학회장을 맡았던 1992년 당시 출간한 6.25연구 논문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을 근거로 "전문학자들은 한 장관의 한국전쟁관이 수정주의 학설에 가깝고 북한측을 굳이 옹호하려는 논리라는 데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고 주장하면서 공세를 시작했다.

이후 1994년 6월호에선 대표적인 민주화운동가 출신으로 당시 김정남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의 이념과 역사관을 문제 삼았다. 결국 한완상, 김정남은 낙마했고, <조선일보>는 또다른 먹잇감으로 통일원의 통일캠페인 참고도서 <어린이를 위한 통일 이야기 - 나는야 통일 1세대>(이장희 한국외대 교수)를 용공서적으로 매도했다. 역시 이장희 교수도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됐다. 즉 남북정상회담 무산 후, 문민정부는 급격히 우경화의 길을 걷게 되고 한총련 주도의 1996년 8월 통일대축전·범민족대회를 초강경 진압하면서 학생운동진영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만다.

김영삼 정부에 이어 DJP 연합을 통해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나서는 등 처음부터 잘못된 역사 화해의 길을 걷는다. 그러한 와중에 일부 국회의원들과 역사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9년 12월 국회는 의회지도자 이승만 동상을 건립하자는 안건을 통과시킨다. 국회 표결에서 반대한 의원은 노무현·안동선·이영일·이미경·김홍신·정의화 등이다.

이승만 동상 건립을 반대한 노무현 의원이 대통령이 됐으니 참여정부 기간은 이승만 기념사업이 다소 소강 국면으로 접어든다. 하지만 박근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이승만 기념사업은 물 만난 고기 떼처럼 다시 준동하기 시작한다. 정부는 건국절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대안교과서를 만들고 어용 사장이 앉은 KBS에서는 이승만, 백선엽 미화 다큐들 상영했다. 한마디로 이승만 기념사업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게다가 이승만 기념사업회 측 인사들은 고려대 4.18 의거탑에 헌화하거나 4.19 민주묘지 참배를 시도하는 등 기념사업의 형태도 공세적으로 전환됐다. 여기에 이승만 10만원권 운동, 광화문에 동상 건립 시도 등 한마디로 염치를 망각한 주장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승만 관련 각종 조형물.
 이승만 관련 각종 조형물.
ⓒ 방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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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이승만 기념사업은 누가 주도하고 있을까.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역대 회장들의 면면을 보면 정치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보통 여느 독립운동기념사업회도 정치인들이 회장을 맡는 경우는 예사다.

그것은 정치인을 통해서 공적 지원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자 하는 기념사업회와 자신의 명함에 한 줄을 더 추가하고 싶은 정치인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승만기념사업회의 경우는 초대 회장 신도환과 3대 회장 홍석현을 눈 여겨봐야 한다.

신도환의 경우는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1960년 12월 제정된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아래 처벌법)'이 제대로 작동됐다면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해졌을 것이지만 부정선거 관련 혐의로 구속돼 사형이 구형됐다가 무죄로 풀려났다. 이듬해 5.16 쿠데타 이후 군사법정에서 20년형을 언도받고 8년 3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후 야당과 체육계 거물로 대접 받았다.

홍석현의 아버지인 홍진기는 3.15 부정선거로 체포된 후 1961년 혁명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6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한마디로 3.15 부정선거의 주요 인사들이 부활해 이승만 기념사업을 통해 자신들의 죄도 스스로 사하고 있는 격이다. 퇴물 반공정치세력으로 출발한 이승만 기념사업은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현역 수구 정치세력에 더해 재벌까지 가세한 것이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역대 회장.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역대 회장.
ⓒ 방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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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고 구경만 할 것인가

그렇다면 현재 이승만 기념사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단체는 어디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체는 4.19혁명희생자유족회, 4.19민주혁명회, 4.19혁명공로자회다.

이들 단체는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에 의해 4.19기념도서관(옛 이기붕 집 터, 강북삼성병원 앞)을 운영하는 등 국민의 세금으로 각종 지원을 받는다. 이러한 단체를 일명 공법 단체라고 한다. 이들 4.19 관련 공법 단체들이 앞장서서 이승만 기념사업을 막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해 말하는 사람의 입만 아프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비단 4.19 관련 공법 단체들뿐만 아니라 광복회, 최근 5.18 공법 단체들까지 왜 이렇게 타락했는지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4.19 세대의 타락과 변절이 그 원인일 것이다. 혹자는 4.19 세대 전체가 타락·변절하지는 않았다고 항변할 것이지만 여기선 4.19 세대라는 훈장으로 정치권에 입문하거나 또는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로 한정해서 말한다면 별다른 이견을 달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 주목할 인물은 바로 이영일이다. 이영일은 국회의원으로서 1999년 12월 국회에 이승만 동상 건립에 반대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4.19 당시 대학 3학년생으로 이승만 하야 운동에 동참한 것은 분명하지만 전두환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 이후 김대중의 새정치 국민회의 소속 의원, 광주일고 동창회장 역임 등 참으로 좌우를 넘나든 인물이다. 그는 지난 3월 자칭 '4.19 노장 참배단'을 이끌고 이승만 묘소를 참배하면서 "진정 감사해야 할 분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국민 섬긴 대통령… 4·19세대가 앞장서 갈등 역사 청산" 같은 망언을 쏟아냈다.
 
윤미향 무소속 의원이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후보자 이승만기념관 건립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윤미향 "이승만기념관 건립 중단하라" 윤미향 무소속 의원이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후보자 이승만기념관 건립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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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눈 뜨고 구경만 할 것인가. 전망은 어둡지 않다. 정부가 추산하는 이승만기념관 건립 비용이 대략 460억 원이라면 이 정도 액수는 순전히 이승만 추종세력들의 호주머니에서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반드시 국회를 통해서 국고 지원을 받아야 한다.

또한 부지 역시 서울의 어느 땅 즉 시유지를 받아야 할 테니 이 또한 서울시와 서울시의회의 협조가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국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야당이 꼼꼼히 예산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은 6월 장관급으로 격상되는 국가보훈부에서 올릴 이승만 기념관 예산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저지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이승만기념관 저지는 곧 헌법 정신의 구현임을 확신한다. 언론인 최일남 선생은 1988년 6월 5일 <한겨레> 칼럼에서 <'승만'민국에서 '두환'민국까지>라고 개탄한 바 있다. 우리가 이승만기념관을 막지 못한다면 다음은 우리 앞에 전두환기념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방학진씨는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입니다.


태그:#이승만기념관, #국가보훈처, #윤석열,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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