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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송(冬孤松)'이라 불리는 인문연구원 모임이 있다. '겨울에 외롭게 솟은 소나무' 동고송. 시인 백석처럼 외롭고 높고 가난한 삶을 살고자 하는 분들의 모임이 있다. 공식 명칭은 '사단법인 인문연구원 동고송'이다.

동고송 회원들은 행복한 분들이다. 일 년에 네 차례나 역사기행을 떠나니 말이다. 이번 4월에는 '해남 가는 길'을 떠났다. 해남에 가면 대흥사가 있고, 대흥사엔 서산대사의 유품이 있다. 또 해남에는 시인 고정희의 생가가 있고, 김남주의 생가가 있다. 나의 형인 시인 황지우는 지금 해남 현산에서 작업복을 입고 밭을 갈며 살고 있다. 남들에겐 '해남 가는 길'이겠지만, 나에겐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다. 해남은 내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자 마지막 숨을 토한 곳이다.
 
‘해남 가는 길’ 윤선도의 녹우당 소나무 밑에서
 ‘해남 가는 길’ 윤선도의 녹우당 소나무 밑에서
ⓒ 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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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으로 가는 버스에서 누군가 다가와 나에게 주문을 한다. "작가님, 황지우와 김남주가 1980년 7월 서대문교도소에서 만났다면서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8시 형과 나는 시국의 비상함을 직감하고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이후 10일 동안 남쪽에서 벌어진 피바다를 나는 까마득히 몰랐다. 뒤늦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에 뛰어들었다.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전두환의 하수인들은 독 오른 뱀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권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죽음의 고문을 가하였다.

종로 3가 단성사 앞에서 황지우 시인은 유인물을 뿌렸고, 바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는 장사가 없다. 고문은 10일을 넘어갔고, 형의 몸은 사체가 되어갔다. "동생을 잡아들여!" 그러면 고문을 중단하겠다는 달콤한 유혹의 거래를 성북서는 제시했다.

어느 날 나는 어머님께 전화를 했다. 그런데 전화 저편에서 어머니의 통곡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들 한 명을 살리기 위해 아들 둘을 죽여야 하는 딜레마'의 상황을 어머니는 무언의 통곡으로 나에게 타전한 것이다. 나는 서둘러 공중전화를 끊고 현장을 벗어났다.

이후 황지우는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80년 7월만 해도 황지우는 유명한 시인이 아니었다.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하고 학교를 잘리고, 시라도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김남주 시인
 김남주 시인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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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도 유명한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한 목숨 걸고 독재정권과 싸웠던 남민전의 전사였다. 시작(詩作)은 김남주에게 부업이었다. 감옥살이 9년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황지우와 김남주가 광주일고 동문이라는 사실을 더러는 알 것이다. 하지만 두 시인이 서대문교도소 감방 동기임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먼 데서 벗이 오니 즐겁지 아니 하냐(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 황지우가 감옥에 들어왔으니 김남주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없었을 것이다. "뭐야, 재우가 들어왔다고?"(황지우는 필명이고 본명은 황재우다)

감옥에서 복도 청소를 담당하는 죄수를 '소지'라고 부른다. 소지는 이 방 저 방, 1층과 2층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감옥에서 띄우는 편지를 '비둘기'라고 부른다. 김남주는 서둘러 황지우에게 비둘기를 보냈다. 요구르트병에 꼬깃꼬깃 접힌 편지 한 통이 황지우의 방에 떨어졌다.

"재우야, 얼마나 고생이 심했냐? 몸은 성하냐?" 이런 위로의 글이 담겨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편지를 열었다. 아니었다. 그 편지에는 황지우의 안부를 묻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성북서의 형사들이 동생을 찾고 있었듯이 남민전의 전사도 동생을 찾고 있었나 보다. "느그 동생은 어디서 뭐 한다냐?"

내가 두 번째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것은 1979년 7월이었다. 김해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감옥에서 보던 책들을 보따리에 이고 고향으로 왔다. 어머니는 다짜고짜 나에게 물었다. "광우야, 너 좌익이지?" 솔직히 고백하건대, 당시의 나는 좌익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어설픈 좌익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일대기(1978년 창비)를 읽고서 그제야 독립운동이 좌익들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알았다.

이어지는 어머니의 충고가 참 희한하였다. "광우야, 내가 본 좌익 어르신들은 덩치가 황소만 했고, 눈깔이 호랭이 같았시야. 김대중 같은 인물은 인물도 아니제." 좌익에 대한 어머니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어머니는 1919년생이고 1933년 해남 북평면의 야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야학의 교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이었고, 이후 체포-연행-구금-취조-고문-투옥의 삶을 치른 좌익 인사들이었다.

이번 해남 가는 길에서 동고송 회원들은 독립운동가 김홍배 선생의 생가터를 탐방하였다. 김홍배는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를 조직하여 완도와 해남, 장흥 등 전남 일대의 항일운동을 이끈 분이다. 일본 경찰은 전남운동협의회를 체제 전복을 기도하는 적색 단체로 지목하여 관련자 500여 명을 연행하였고, 50여 명을 구속하였다. 나는 회원들에게 설명하였다.

"저는 한국근현대사를 어머니의 구전으로 배웠답니다. 어머니는 김홍배 선생의 동료들에게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어느 날 선생들이, 뻘밭에 게 들어가듯, 사라지더라는 거예요.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이 터졌던 거죠. 서울 등지에서 활동한 이재유의 트로이카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립니다. 이현상, 김삼룡, 이관술... 많이 들어 보셨죠? 그런데 김홍배, 이기홍의 이름을 들어 본 분은 드물 겁니다.

저는 역사에서도 지역 차별이 있다는 걸 보면서 참 가슴이 아팠어요. 내년이면 민청학련 50주년입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금된 분이 1000여 명이구요, 구속된 분이 120여 명이지요. 일제강점기 인구가 2000만 명이었으니까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은 민청학련만큼 떠들썩한 사건이었던 거죠. 그런데 아무도 이 거대한 항일독립운동조직에 대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김홍배 선생, 이기홍 선생께 아직도 서훈을 하지 않고 있어요. 눈물이 나서 더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네요."


심승남씨는 한말 호남 의병장 심남일의 종손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가 내게 와 가슴 아픈 사연을 털어놓았다. "작가님, 심남일 의병장의 평전을 발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황광우 작가(사단법인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태그:#좌익, #김남주,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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