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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가 3일 오전 제주시 명림로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추념사를 대독하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3일 오전 제주시 명림로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추념사를 대독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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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3일은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한라산에서 유격대의 봉화가 울린 시점부터 1954년 9월 21일 제주경찰국장 신상묵의 명의로 포고문이 발표될 때까지 발생했다. 대략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제주도는 이 학살과 파괴·방화·약탈·기아 등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은 주로 1948년에서 1949년 사이에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로 수만 명의 제주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됐다고 알려져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 시신의 숫자만 해도 최소 1만 명이 넘으며, 전반적으로 인구 1/10인 3만 명의 민간인이 무차별 민간인 학살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보다 더 많게 추산한 경우도 있다. 미국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1949년 제주지사(임관호)는 6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며 미 정보국에 관련 자료를 전달했다고 한다("1949년 당시 제주지사, '4·3 희생자 6만명' 美 정보국에 전달", 연합뉴스, 2016.10.21일자 참고). 브루스 커밍스는 제주4.3평화포럼에서 '8만 명이 죽었다는 추정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발생한 학살로 희생된 대다수는 무고한 제주도 민간인이었고, 학살의 최소 85~90% 이상은 이승만 정권이 보낸 경찰병력과 군대, 서북청년단 등의 우익 성향 단체에 의해 자행됐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발생한 대학살에는 <국부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의 표현처럼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다.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던 회담이었지만

제주 4.3의 기원은 1945년 해방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제주도 지부를 결성했으나, 미군정이 설립되면서 이들의 친일경찰 우대 정책과 마찰을 빚었다.

해방 뒤 미군정 하에서 등용된 경찰인사의 최소 85% 이상이 일제시대 당시 친일경력 경찰이었는데, 제주도 그러했다. 1947년 3.1절 집회에서 친일경찰과의 마찰이 극대화됐으며, 이후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제주도민의 불만은 남로당의 무장투쟁과도 연계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중요한 점은 당시 남로당이 대중적 정당으로 제주도에서 상당 부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평등'과 '인민'을 강조하는 집단은 이상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고, 따라서 남로당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남로당은 단독정부 수립에 맞서 봉기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을 중심으로한 좌익진영의 봉기 뒤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세력들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병력을 제주도로 보냈다. 당시 진압군을 지휘한 김익렬은 인민유격대(남로당 조직)의 김달삼과 협상하고자 했다. 비극을 최소화시켜 평화적으로 끝내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대화를 거부한 주체는 바로 미군정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서 이른바 5.10 선거가 치러졌는데, 제주도는 4.3이 발생하면서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다.

미군정은 선거가 실패함에 따라 재선거의 성공을 위해 진압작전을 강화했으며,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미 군사고문단과 외교관리들이 한국 정부와 군·경의 강력한 조력자로서 민간인 학살을 조장했다고 한다.

제주 출생 한겨레 기자인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에 따르면, 1947년 3.1절 집회 이후 미군정은 "제주도는 전체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의 동조자이거나 관련 있는 좌익분자들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는 우익들의 보고나, 경무부 차장 최경진의 입에서 나온 '제주도 주민의 90%가 좌익'이라는 발언을 실은 정보 보고서 등을 통해 제주도를 좌익의 근거지로 간주했다(책 126쪽).

토벌작전에 개입한 미군
 
제주 4.3 사건과 그리스 내전을 비교하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한겨레의 허호준 전 기자가 쓴 책 <4.3 미국에 묻다>.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이 어떻게 개입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했다.
 제주 4.3 사건과 그리스 내전을 비교하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한겨레의 허호준 전 기자가 쓴 책 <4.3 미국에 묻다>.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이 어떻게 개입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했다.
ⓒ 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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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제주 4.3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제주도 문제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1948년 4월 29일에서 5월 1일까지 미군정의 작전명령에는 경찰병력과 군대가 어떻게 마을을 소탕할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 <4.3, 미국에 묻다>에 따르면, 1948년 6월 제주도 북촌리 집 앞 굴속에 숨어있다가 우익 진압군에 의해 붙잡힌 강서수씨의 경우 진압 현장에 있는 미군을 봤다. 아마도 우익들의 진압작전을 진두지휘했던 미군일 것이다. 아래는 책에 실린 강서수씨의 증언이다.
 
"밤에 숨었다가 밝아갈 때 붙잡혔는데, 나와서 보니 경찰관들이 죽 포위를 했더라고. 모자를 보니까 졸병들이 아니고 높은 놈들 같았어. 미국놈들 하고. 굴에서 나오니까 우리에게 수갑을 채워가지고 동쪽을 향해 엎드리라고 해. 사복을 입은 미국사람들은 키가 큰 놈들이었는데 세명인가 네명인가 돼. 따로 한 차를 탔으니까.

미국놈들이 '빨갱이' '빨갱이'하고 한국말을 하면서 총을 갖고 쏘는 시늉을 하는거야. 미국놈이 지시하면서 경찰관들이 같이들 막 모여들어. 우리는 경찰차에 타고 미국인들은 자기네 차에 타서 같이 제주시로 넘어갔지."

위의 증언으로 볼 때 미군은 우익 진압군과 더불어 토벌 및 학살 현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 책에 따르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제주도에 주둔한 미군들은 여전히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주도에서 발생하는 사태를 파악하며 토벌작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미군은 연락기까지 띄워 토벌작전을 벌였다. 책에 의하면 이 시기 제주도에 주둔한 진압군은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에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 연락기는 중산간 지대로 피신한 제주도민들을 체포하는 데 도움을 줬다.

당시 미군 연락기가 진압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는 진압군 지휘관인 송요찬이 미군 사령관에게 보낸 추천서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송요찬은 10월 10일부터 임무를 수행한 정찰 조종사 에릭슨(Fred M. Erricson) 중위에 대해 "수차례에 걸친 제주도 정찰비행을 통해 반란군의 집결지, 사령부, 정부군과 반군간의 전투상황을 제9연대에 넘겨줘 (이들을) 진압할 수 있게 했다"고 보고했다(같은 책, 220~221쪽).

이런 사실에서 미군의 개입이 제주 4.3 당시 벌어진 학살에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군 수뇌부의 제주도 사태에 대한 인식은 군에 의한 무차별 학살을 합리화한 것을 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자체적으로 조사를 통해 2003년 정부가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만 보더라도 "미군도 진압작전에 나섰다. 미군이 어느 정도 작전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나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는 이승만의 발언을 통해 미군의 역할을 일부 엿볼 수 있다"며, 미군의 개입을 서술했다(307쪽).
 
2003년 정부가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07쪽.
 2003년 정부가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07쪽.
ⓒ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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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 민간인 학살에 책임 없나... 제대로 규명해야

마지막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 정부가 이 학살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다.

놀랍게도 당시 미국은 제주 4.3사건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주한미군사령부와 주한미대사관 등이 본국에 보낸 각종 정보와 보고서를 통해, 제주도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위 책에 따르면, 미 국무부는 제주도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며, "제주도에서 일어난 공산반란으로 최소 15000명 이상 공산주의자들이 살육되었다"고 알고 있었다(책 261~262쪽). 트루먼을 포함한 미국 지도부에게 있어 제주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이었을 뿐이었다.

제주 4.3사건에서 우리는 현재까지도 미국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그리고 후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선 이러한 역사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개입을 조명하는 일은 당연히 중요하다.

태그:#4.3, #제주 4.3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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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전공자입니다. 사회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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