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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외교부장관이 지난 6일 발표한 '강제동원 해법'에 대해 한국에선 피해자 및 지원 단체,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강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면 가해자 쪽인 일본에선 "일본 정부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좋은 안"(기무라 간 고베대 교수, 6일 YTN 보도)이라는 등 환영하는 분위기 일색입니다.

피해국인 한국에서는 반발하고 가해국인 일본에서는 환영하는 이런 모순된 상황이, 바로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강제동원 해법'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역설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윤석열 정부와 그 '응원단'들은 이런 국내의 반발을 예상했는지 여러 궤변을 동원해 여론 무마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진 장관이 말한 "대한민국의 높아진 국격과 국력에 걸맞은 대승적 결단으로서 우리 주도의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후안무치입니다.

일본 논리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화자찬 '정신 승리'
 
박진 외교부 장관이 2023년 3월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2023년 3월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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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런 논리는 한마디로 '정신 승리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논리라면 객관적으로 보아 우리나라보다 국력이 강한(국격은 모르겠으나) 일본 쪽이 오히려 대승적 결단을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닌지요. 이것은 '식민지 시대의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두 완전하게 해결됐다'라는 일본의 논리를 100% 그대로 받아들인 굴욕적인 방안을, 그럴듯한 말을 동원해 포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중국의 문호 루쉰의 소설 <아Q정전>에서 주인공 아큐가 동네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정신 승리법'처럼 말입니다.

"고령의 피해자를 위해 정부가 책임감을 갖고, 과거사로 인한 우리 국민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보듬는 조치"라는 박 장관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령의 피해자를 위한다고 하지만, 지금 대법원에서 승소한 15명의 피해자 중 살아 있는 분은 양금덕 할머니, 김성주 할머니, 이춘식 할아버지 세 분입니다. 그런데 90살이 넘은 이분들 모두 정부가 발표한 3자 대위변제에 반대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정부의 발표가 고령 피해자들의 의사와 전혀 무관한, '고령 피해자 팔이'임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7일 국무회의에서 이번 해법이 "정부가 피해자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한일 양국의 공동 이익과 미래 발전에 부합하는 방안을 모색한 결과"라고 말했는데, 이 발언 중 최소한 '피해자의 입장 존중'은 들어내는 게 맞습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3.6 강제동원 해법이 동격이라니...

윤석열 정부에 응원을 보내는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 '친윤 언론'이 반대 세력, 특히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내세우는 것이 1998년 10월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통칭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입니다. 민주당의 대선배인 김대중 대통령이 공동선언을 통해 한일이 미래지향적 협력을 하기로 했는데, 그와 비슷한 윤 대통령의 결단을 반대하는 건 김대중 대통령을 부정하는 꼴이라는 주장이죠.

<문화일보>의 6일치 사설(<윤 정부의 한일관계 결단... DJ정신도 뒤집는 '야 죽창가'>)와 <조선일보>의 7일치 사설(<민주당 식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원조 친일, 굴종 외교 아닌가>)이 대표적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악의적 왜곡입니다.

한번 그 당시 공동선언이 어떻게 나왔는지 봅시다. 이 선언은 기본적으로 '과거 직시'와 '미래 지향'을 두 기둥으로 삼고 있습니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입니다. 즉 오부치 총리가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면서 과거를 직시하기로 했기 때문에 김 대통령이 미래 지향으로 나가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또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오부치 총리가 한국이 이룬 민주화를 높이 평가하고, 김 대통령이 이를 받아서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을 준수하며 비핵 3원칙과 전수방위 원칙 아래 이룬 국제사회에 대한 공헌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오부치 총리처럼 과거를 통절하게 반성하고 사죄했나요. 그가 말한 것은 반성과 사죄는커녕 '앞으로 후세가 더이상 사죄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 담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2015년 종전 70주년 선언까지 포괄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요즘 일본은 평화헌법과 비핵 3원칙, 전수방위 원칙을 지키기는커녕 이를 대폭으로 뜯어고치며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강제 동원 해법을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과 동격으로 언급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고 싶다면, '윤석열-기시다 선언'이 맞는다고 봅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9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한 컨퍼런스 빌딩에서 한일 정상 약식회담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9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한 컨퍼런스 빌딩에서 한일 정상 약식회담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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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안'과 3.6 해법이 같다고?

또 한 가지 여당 쪽에서 야당을 공격하는 소재가, 문희상 전 국회의장의 해법입니다. 민주당 출신인 문 전 의장이 추진했던 이른바 '문희상 안'이 바로 제3자 대위변제 방안인데, 민주당이 이번 해법을 반대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7일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서 이런 논법을 구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왜곡입니다. 문희상 안은 일본의 전범기업을 포함한 일본 기업과 한국의 기업이 참여하고, 여기에 화해·치유재단에서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하고 남은 돈 등을 출연해 기금을 만들어 보상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습니다. 또한 문희상 안은 입법으로 해결을 모색했었습니다.

6일 발표한 윤석열 정부안과 문희상 안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전범기업 등 일본 기업의 참여'입니다. 윤석열 정부안은 재원에 대해서 "민간의 자발적 기여 등을 통해 마련하고, 향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목적사업과 관련한 가용 재원을 더욱 확충"이라고만 밝혔을 뿐입니다.

이런 차별점은 쏙 빼놓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 제3자 변제 안이니 같다고 하는 것은, 포장만 보고 내용은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차이를 알면서 그랬다면 질이 나쁜 속임수입니다.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 해법 강행규탄 긴급 시국선언에 참석하자, 시민들이 할머니를 응원하며 손을 잡아주고 있다.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 해법 강행규탄 긴급 시국선언에 참석하자, 시민들이 할머니를 응원하며 손을 잡아주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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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수성향의 미디어들은 대체로 정부의 강제 동원 해법을 '고육책'이라고 마사지해주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는 7일 <'고육책' 징용 해법... 한·일 관계 정상화 계기로 살려가길>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국내법(대법원판결)과 국제법(청구권협정)을 동시에 존중하면서도 안보와 경제를 위해 시급히 한·일 관계를 풀어야 하는 정부의 고충이 반영된 '고육책'"이라고 이번 해법을 평가했습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대법원 판결을 깡그리 무시한 이번 해법이 과연 대법원 판결을 고려한 고육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안보와 경제를 위해 대법원판결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고육책'이라고 하면 모를까요.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와 그 응원단이 '3.6 강제동원 해법'을 변호하는 논리가 너무도 실상에도 맞지 않고 논리에도 어긋나 이런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태그:#윤석열, #강제동원, #한일관계, #3.6해법, #정신승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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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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