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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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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일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광복군이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김자동의 아버지는 간부였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5일 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창군 당시는 충칭에 있는 30여 명의 인원으로 우선 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이후 병력을 모집하여 부대규모를 확장해 간다는 계획이었다. 창립 1년 후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복안이었다.

임시정부는 각종 정보를 통해 만주지역에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인과 특히 1940년을 전후하여 북경·천진·석가장 등 화북지역 일대에만 20만여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여기에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 각지에 파견된 다수의 한인 병사들이 있었다.

한국광복군 선언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이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을 계속한다.

과거 삼십 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전을 계속하여 왔다. 영광스러운 중화민국의 항전이 4개년에 도달한 이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중화민국 최고영수 장개석 원수가 한국민족에 대하여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여 감사의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들은 한중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 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군하면서 <한국광복군 공약>과 <한국광복군 서약문>을 제정하였다. 김의한 정령은 모두 이 서약문에 서약을 하였다.
 
1942년 10월 제34차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다섯째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 둘째줄 오른쪽에서 넷째가 김자동의 부친 김의한이다.
▲ 임시 의정원 1942년 10월 제34차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다섯째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 둘째줄 오른쪽에서 넷째가 김자동의 부친 김의한이다.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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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공약

제1조 : 무장적 행동으로써 적의 침탈세력을 박멸하려는 한국남녀는 그 주의사상의 여하를 막론하고 한국광복군의 군인된 의무와 권리를 유함.

제2조 : 한국광복군의 군인된 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과 한국광복군 지휘정신에 위반되는 주의를 군내외에 선전하고 조직함을 부득함.

제3조 : 대한민국 건국강령과 한국광복군 지휘정신에 부합되는 당의(黨義)·당강(黨綱)·당책(黨策)을 가진 당은 군내외에 선전하고 조직함을 득함.
         
한국광복군 서약문

본인은 적성으로써 좌열 직함을 준수하옵고 만일 배제하는 행위가 유하면 군의 엄중한 처분을 감수할 것을 자에 선서하나이다.

一.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체를 희생하겠음.
二.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절실히 추행(推行)하겠음.
三.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하고 법령을 절대 준수하겠음.
四. 광복군 공약과 기율을 엄수하고 상관명령에 절대복종하겠음.
五. 건국강령과 지도정신에 위배되는 선전이나 정치조직을 군내외에서 행치 않겠음.

광복군 편제와 훈련

한국광복군 창설은 중국정부의 견제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이를 설득, 극복하면서 중국군의 제도를 참조하여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조직조례'를 제정하고 총사령부에 비서처·참모처·부관처·정훈처·관리처 등 10개의 부서를 두었다.

광복군 창설 당시 총사령관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 총무처장 최용덕, 참모처장 채원개, 부관처장 황학수, 경리처장 조경환, 정훈처장 안훈, 편련처장 송호성, 군의(위생)처장 유진동이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11월 광복군총사령부를 일본군의 전선 가까운 서안으로 옮기고 긴급하게 수행해야 할 과제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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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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